소설리스트

103화 (103/186)

103

“……뭐 하는 겁니까.” 

얼굴을 어루만지는 가녀리고 섬세한 손은 클로드에게 너무나도 자극적인 것이었다.

살결을 스칠 때마다 오싹거리는 전율이 일었다. 입술에 닿았을 때는 짐승처럼 핥아서 깨물어 버릴 뻔했다. 지금도 욕망으로 이성이 부서질 것 같은 충동에 정신이 어질어질하다. 그런데 그를 들쑤신 그녀의 얼굴은 그에 반해 잔잔한 편이었다.

“따로 떨어져서 위험을 피하는 데에 실패했으니까. 이제 어떻게든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따로 말고 같이.”

태리는 같이, 라는 단어에 힘을 주곤 다시 한번 눈동자만을 움직여 주위를 살폈다. 얼굴이 상세히 분간이 될 정도의 거리까지 포위망이 다가와 있었다.

궁지의 몰린 죄수와도 같은 신세다. 누가 보아도 스릴러에, 범죄물. 같이 탈출하려면 처해 있는 이 입장부터 뒤집어야 할 것 같았다. 다시 말해서 장르를 바꾸는 거였다.

자신들을 쫓아오던 저 살인마들이 ‘어? 이 길이 맞나?’ 하고 갸우뚱할 만큼. 주변을 가득 메운 관객들이 ‘내가 본 게 추리극이 아닌가?’ 하고 혼란스러워할 만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장면을 보여 주면 된다.

태리는 가슴을 커다랗게 들썩인 후 클로드에게 한 발자국을 더 가까이 다가섰다. 흔들리는 눈동자 속에는 발그레해진 얼굴의 제 자신이 작은 상으로 맺혀 있었다.

부끄러운데 해도 될까.

못 할 것 같은데 하지 말까.

아니, 그래도 해야 된다.

정말로 시간이 없었다.

“잠시만…… 실례할게요.”

같이 탈출하는 거다. 이렇게 해서 같이.

그의 눈 속에서 부끄러워하던 제 자신이 두 눈을 꼭 감으며 시야가 까맣게 지워졌다. 눈을 감은 태리는 그대로 발꿈치를 들어 올렸다. 고개도 조심스럽게 꺾어 올렸다. 그리고 굵고 강한 선을 지녔다고 생각했었던 클로드의 턱 끝에 촉촉한 입술을 찍었다.

아, 이게 아닌데.

여기에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입술을 대고 난 다음에 바로 알았다. 자신이 잘못된 곳에 입을 맞췄다는 걸.

일단 키가 너무 모자랐고. 결심은 그것보다 약간 더 모자랐고. 부끄러움은 넘쳐 나도록 많아서 생겨 버린 결과물이었다.

큰일 났다. 이게 아닌데. 결심했을 때 한 번에 성공해야 했던 건데. 지금도 부끄러워서 기절할 것 같았으므로 똑같은 걸 두 번이나 시도할 만한 용기는 차마 나지 않았다.

어떡하지. 진짜 못 하는데. 부끄러워서 못 하는데……. 제자리에서 발을 동동 굴리며 그녀가 클로드의 큰 키를 탓했다.

“키가 너무 컸다고…….”

반면에 클로드는 짧은 사이에 정신이 마비되었다가 풍선처럼 터지고 난 다음 느릿하게 현실로 돌아왔다. 지금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떨리는 손이 방금 전 접촉이 있었던 부위를 믿을 수 없다는 듯이 쓸었다.

턱 끝에 닿았었던 간지러운 촉감.

그 촉감.

견고했던 이성이 금이 가며 흔들리려고 한다. 눈앞에선 실패를 자책하며 깨무는 빨간 입술과 빗물에 젖은 옷감 너머로 하얀 살결이 대비되어 보였다.

내가 드디어 미쳤나.

“방금 무슨 일이…….”

휘청이는 듯한 목소리에 태리가 손가락을 꼼지락대며 사정을 털어놓았다.

“나 때문에 노, 놀랐죠? 미안해요. 우리 둘이서 같이…… 안전하게 시선을 돌리려면 이런 방법밖엔 없다고 생각했어요…….”

팔짱을 끼고 걷는 남녀의 우산 속은 쉽게 들출 수 있을지 몰라도 입맞춤을 하고 있는 남녀의 우산 속은 웬만해선 지나칠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단속을 피해 가려고 했다.

상대가 다른 사람이었다면 시도도 하지 않았을 테지만 클로드라면 괜찮았으니까. 그에게는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그와는 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정은 들은 남자에게서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회전목마의 멜로디 소리만 아득하게 들려왔다.

나는 그랬는데, 너는 그게 아니었나. 혹시 싫었나. 정말 그랬나.

대답 없는 그 고요함이 무서워서, 온갖 부정적인 가정들이 몰아닥치는 그 정적이 겁이 나서 덜컥 어린애처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왜인지 모르겠는데 찡하고 순간적으로 눈물이 고였다.

“싫었……어요……?”

망설이고 망설인 끝에 작은 소리로 달싹여 물었다. 전처럼 눈을 바라볼 자신이 없어서 고개를 푹 떨궜는데 커다란 손이 다가와서 양 뺨을 덮으며 얼굴 전체를 감싸 쥐었다.

그리고 태리는 다시 보았다. 또 한 번 제게로 가까워져 오는 자기 자신을. 회색 눈동자 속에 맺힌 홍조 어린 여자의 얼굴을.

전과 똑같이 시야가 가득 찼고 눈이 감겼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긴 속눈썹에, 가늘고 길게 내리깔린 남자의 눈이었다. 제 입술을 삼키러 온 짐승 같았다. 곱고 깨끗하고 강하고 부드러운. 물처럼 아름다운 짐승.

입을 벌리고 들어오며 마침내 침묵이 깨지고 속삭임이 스며들었다.

“싫을 리가.”

어디서부터 시작된 건지 모를 저릿함이 선명하게 퍼져 나간다. 진작에 떨어져 발밑을 나뒹구는 우산 때문에 세찬 비를 맨몸으로 받아 내는데도 달뜬 체온 때문에 추운 줄을 몰랐다.

다리에 힘이 풀릴 거 같아서 매달린 가슴팍에서 말발굽처럼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그녀가 만지자 더 흥분했는지 클로드는 고개를 꺾어 더 깊숙하게 들어왔다.

태리는 꼼짝없이 붙잡혀 자신을 먹어 치우는 듯한 입술을 받아들였다. 애처로운 고개가 그의 손길에 젖혀지자 속눈썹에 고여 있던 빗방울들이 눈물처럼 귀 옆으로 떨어졌다.

뭐가 이렇게 좋지. 어떻게 하면 이렇게까지 좋을 수가 있지.

멈추지 않고 터져 나오는 욕구 때문에 클로드는 벌써부터 통제력에 균열이 가고 있었다.

그는 평생을 성기사로 살아온 몸이었다. 욕망에 대한 절제와 다스림을 신념만큼이나 중요한 가치로 여겼다. 그것을 위해 주어지는 고된 수련조차도 일상처럼 받아들이며 살아왔다.

그런데 이 한순간에 애써 쌓아 온 그것들이 모조리 무너져 내리고 있는데도 괴롭다기보단 황홀감에 젖어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다.

살면서 단 한 번도 욕망 때문에 이성이 무너진다는 기분이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했었는데, 잘게 떠는 몸을 품 안에 가두고 연약한 살을 헤집고 있는 지금 그 욕망이란 것 앞에 그는 무릎을 꿇고 녹아내리고 있었다.

‘아, 정말로, 나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단지 입술이 닿은 것뿐인데 성대가 긁히는 것처럼 목에서 거친 신음이 흘러나온다. 숨이 뜨겁게 차서 몸이 펄펄 끓었다.

충실히 안으로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위태롭게 그어 두었던 선이 모래처럼 흩어져 갔다. 손대지 말아야 할 열매를 깨물었기에 이리도 단 것일까. 언제나 바랐지만 결코 할 수 없을 거라고 여겼던 일을 벌이고 있었다.

그는 기사였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고 살아오면서 내내. 그리고 앞으로도.

그러나 공주를 지키는 기사는 아니었다.

기사는 공주를 지키지 않는다. 해친다. 해치고 파괴하고 망가뜨리기 위해 그는 그녀의 땅으로 보내졌다. 그러니 감히 그녀에게 입을 맞춘다면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라고, 그렇게 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말했다. 이게 같이 있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다만 그의 키가 너무 큰 게 문제라 했던가. 그래서 허리를 깊이 숙여 그녀가 버겁지 않도록 높이를 맞췄다.

‘이젠 아무래도 좋아.’

아무래도 좋다. 제 인생의 어디가 망가진대도. 어떻게 된대도.

안 된다고 속삭이는 쥐꼬리만 한 이성으로는 더는 이 욕망을 꺾지 못한다. 지독하게 혀를 얽으며 클로드는 그 순간 이미 지옥으로 떨어질 결심을 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손이 돌연 뺨에서 귀를 타고 내려와 목 뒤를 감싸며 파고들었다. 다른 손은 더 아래로 내려가 가느다란 허리가 휘도록 끌어안은 뒤, 강하게 당겨 빈틈이 없을 정도로 몸을 바싹 붙였다.

그리고 벽으로 밀쳤다.

“……!”

둘을 위협하듯 노려보던 포스터 안 살인마의 눈이 출렁이며 짓이겨졌다.

태리는 반사적으로 밀어 내려 했지만 벌써 앞에는 클로드의 가슴이, 등 뒤로는 단단한 벽이 막고 있어서 빠져나올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할 수 없도록 벽에 몰아붙여진 채 집요하게 맞물리는 키스를 받으려니 쾌락은 더욱 자극적인 방향으로 날을 세웠다. 가끔씩 아주 깊고 은밀한 부위에 문질러질 때면 허리를 감싸고 있는 그의 팔에 아주 강한 힘이 들어갔다.

숨이 벅찬 태리가 버티다 못해 고개를 돌려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폭발해서 입술을 놓지 못하는 클로드는 그녀가 고개를 돌리는 데로 계속해서 쫓아왔다. 입 속에 든 것을 다 가져갈 것처럼 먹어 치우려 한다.

놀란 그녀가 또 한 번 도망치려 하자 그는 마지막까지도 집착적으로 쫓아왔다가 조각만 남은 이성을 그러모아 집어삼켰던 것을 겨우 놓아주고 떨어졌다.

입술을 뗐을 때, 태리의 눈 속에 가득 찬 것은 목덜미까지 뜨겁게 달아올라 있는 기사의 모습이었다. 누군가가 그의 입 속에 묘약이라도 털어 넣은 것 같았다.

아직 숨결이 채 정돈될 틈조차도 없었는데, 그는 또다시 얼굴을 붙이고 다가와 젖은 입술 앞에서 속삭였다.

“입, 맞춰도 됩니까.”

그건 도저히 목소리가 아니었다. 목소리가 아니라 신음. 깊은 곳 어딘가를 고통스럽게 긁고 나오는 듯한 낮은 신음 같았다.

“난…….”

소리로 나온 대답은 한 음절뿐이었는데 자제력 같은 건 바닥난 지 오래였는지 그가 섣불리 덮쳐 들며 말을 앞질렀다.

“싫으면 피해요. 소리 지르고 깨물어. 날 잡아갈 놈들이라면 저 뒤에 널려 있으니까.”

그리고 입술을 도로 집어삼켰다. 안을 빨아들이듯이 정복당한다. 그런데도 꿀단지 속을 헤매는 것처럼 달큼하다고 느껴졌다.

비 웅덩이를 짓밟고 다니는 치안대의 군화 소리, 정해진 주젯거리 없이 퍼지는 사람들의 수다 소리가 서서히 경계 밖으로 밀려 나간다.

마치 주술의 시간제한이 풀린 것처럼 그 누구도 뒤엉켜 있는 두 사람을 건드리지 않았다. 이 잡듯이 뒤지던 수색의 손길도 바로 곁을 지나가면서도 방해하지 않고 스쳐 갔다.

드문드문 그들을 향한 야유와 환호가 쏟아지곤 했지만 서로에게 집중하느라 진작에 귀가 멀고 눈이 흐려졌다.

느낄 수 있는 건 혀끝으로 달라붙은 짜릿한 감각뿐이었다. 이 순간의 그 어떤 것도 더는 되돌리거나 돌이킬 수 없다.

태리는 넓은 등에 팔을 올려 끌어안았고 클로드는 그녀의 입술을 집요하게 핥아 올리고 깨물며 괴롭혔다.

그로써 장르는 완전히 바뀌었다. 더는 추리물 같지 않았다. 누가 봐도 로맨스였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