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2화 (62/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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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손을 꼭 모은 그녀가 씩씩한 목소리로 그리 다짐하자, 마법사들은 하나같이 그녀를 대견해하고 자랑스러워하느라 야단들이 났다. 

그런 그들이 모여 있는 그림만으로도 구경꾼들에게는 끈끈한 유대감이 느껴져 관전의 색다른 흥미로움을 주었다.

“가만 보자. 이거 전설적인 대결 구도가 되겠는데. 이게 말로만 듣던 마법사와 기사의 대전인가?”

그도 그럴 것이 이미 두 집단은 국가 간의 대립으로 처음부터 앙숙인 사이였으니까.

한쪽은 대륙 최강의 군대였고 다른 한쪽은 얼마 되지 않는 머릿수로 바락바락 대들며 그런 군대에 끝까지 저항하고 있는 저항 군단이지 않았나.

겨우 도시 하나 크기밖에 안 되는 자그마한 왕국에서, 평범한 국가였으면 진작에 흡수되었어도 남았을 시간임에도 꿋꿋이 버티며 황제의 신경을 긁을 수 있었던 건 마법사라는 단일 개체 하나하나가 모두 범인 이상으로 강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후계자인 공주가 귀환했으니 두 집단 간의 대립은 가파르게 섰다. 아니, 그렇게 섰어야 정상이었다.

“그동안 별일 없이 평화로웠던 게 이상한 거지. 드디어 정면 승부를 낼 때가 온 거야.”

“근데 총독과 공주가 사이가 미묘하게 가깝다는 얘기가 있던데.”

“허풍이겠지. 소문이 돈다고 그걸 다 믿어?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발로란의 성기사단이 대륙의 평원을 제압한 수사자라면 이자리스의 마법 군단은 고공비행을 하며 그들을 역습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독수리 떼다.

어느 한쪽도 무시할 수 없는 상대지만 평원에는 하나의 우두머리만이 존재할 수 있다. 오늘의 우승자에게 그 자리가 주어질 것이란 판단에 이목이 집중되었다.

무대처럼 마련된 정중앙의 공터로 나아가며 태리는 얼굴이 익은 기사들에게 일일이 눈인사를 한다.

성의에 가까운 흰 망토를 두르고 온 클로드는 그런 그녀를 애타는 눈으로 좇다가 제드에게 옆구리를 꼬집히고 말았다.

마침내 키 높은 너럭바위를 밟고 올라선 그녀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언데드 사냥을 위해 은으로 도금해 온 사람들의 무기가 무대를 비추는 조명처럼 그녀를 반짝거리게 만들었다.

“저어, 모두 안녕하세요. 지난밤은 편안히들 주무셨나요?”

이번 토벌을 기획한 장본인. 무모한 계획을 자신 있게 주장한 숲의 파수꾼. 사람들은 저 대담한 공주가 어떤 방식의 출정 선언을 할지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귀를 세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령관들이 그렇듯, 사기를 끌어 올리는 미사여구를 가져왔을 거란 기대와 달리 간단한 인사 후에 그녀가 입에 올린 것은 앞으로 벌어질 일에 대한 가장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주의 사항이었다.

“정원에는 여러 종류의 언데드가 있어요. 들어가면 바로 맞닥뜨리게 될 지상층, 그러니까 정원에는 상대적으로 약한 언데드가 출몰하죠. 구울, 스켈레톤, 스펙터, 와이트, 밴시 같은 것들요. 하늘에는 조금 까다로운 본 드레이크가 날아다니지만 다행히 숫자는 많지 않아요.”

태리는 몸소 겪어 체험한 바 있는 게임의 비밀들을 공유하기 시작했고 어디서도 얻지 못했던 정보에 모두 전과는 다른 의미로 귀를 최대한 쫑긋했다.

“지상을 깨끗이 정리한 뒤에 정원의 심장부에 위치한 왕묘 진입이 최종 목표입니다. 입구가 신전처럼 생긴 공간인데 들어가면 지하로 연결돼요. 그곳엔 상대하기 아주 어려운 언데드가 밀집되어 있죠. 듀라한과 데스나이트, 운이 나쁘면…… 지옥의 수문장인 케르벨로스나 사신까지도. 역대 국왕들의 시신이 보관된 곳이기 때문이에요.”

그녀의 발치에서 꼬마 마법사 릴리와 마치가 설명에 따라 지팡이를 잡고 허공에 상세한 지도를 야무지게도 그렸다. 예상보다 더욱 험준한 환경에 다들 침을 꿀꺽 삼켰다.

지상은 공동묘지이긴 해도 보통의 정원과 다를 바 없이 꾸며져 있지만 왕묘의 지하는 사정이 많이 다르다. 대마법사였던 왕들의 시신과 그들을 수호하는 죽음의 기사들이 지키고 있는 구역이다.

하지만 그곳을 뚫어야만 폐성의 지하 수로로 통하는 지름길을 확보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선 성으로 들어가는 시간과 길이를 최대로 단축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언데드에 의해 목숨을 잃고 정해진 장례 의식을 치르지 못하면 여러분도 똑같이 언데드가 돼요. 돌이킬 수 없죠. 그러니 체력이 떨어졌다거나 생명에 지장이 갈 정도로 큰 부상을 입었다면 즉시 전투에서 물러나도록 하세요.”

더불어 그녀는 냉정한 경고 또한 서슴없이 남기기도 했다. 누군가의 짐이 될 바엔 빠져 주는 게 도리라고.

역시 마법사란 피도 눈물도 없다는 쪽으로 모두의 편견이 쏠릴 즈음이었다. 모든 설명을 마치고 눈을 내리깐 공주가 돌연 가슴 앞에서 두 손을 모았다. 빛이 쏟아지는 햇살 아래에서 차분하고 간절한 목소리의 위로가 전해졌다.

“모두 다치는 곳 없이 무사하기를 바랍니다. 저에게는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해요. 제가 가장 앞에 서서 길을 내고 모두를 지키겠다고 약속해요. 어려운 길을 지나게 될 때 누군가가 앞서서 한 발자국씩 먼저 걸어 주고 있다고 생각하면 용기가 날 거예요.”

한편으로 이것은 그녀 자신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다.

고향을 돌려주겠다는 무겁고도 부담스러운 짐.

그러나 한 번 해 봤던 일이라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해질 것이다. 그녀는 손을 모은 채로 되뇌고 또 되뇌었다.

난 할 수 있어. 난 이미 이 길을 뚫고 성공했던 적이 있어. 이건 내가 한 번 견뎌 냈던 시간이고, 일찍이 이겨 낸 적이 있는 싸움이야.

누구 하나 견제하는 바 없이, 모두의 무사 안정을 빌어 주는 공주의 진심이 공터를 메워 한동안 깊은 침묵에 잠기게 했다.

다들 놀란 것 같았다. 정신을 차린 후엔 얼떨떨한 기분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중얼거리게 될 정도로.

마법사는 보통 저런 성격이 아니지 않나? 우리가 지금까지 오해를 하고 있었나? 와, 근데 공주 정말 엄청 예쁘고 엄청 착하고……

“요정 같다.”

“저런 게 공주구나. 진짜 공주……. 나 사실 태어나서 공주 처음 봐. 공주는 원래 성 안에만 있잖아.”

“근데 여기 공주는 숲에 있어.”

또한 우습게도 그들 중 가장 감동을 받은 건 그녀의 적이라고 구분 지어진 성기사단.

“아아, 이런 울림이 담긴 염원의 기도를 들은 지가 얼마 만인지.”

기사라 해도 근본적으로는 신앙심이 높은 성직자들이라 그들의 눈가는 진작에 찡해진 상태였다. 자신들의 단장은 성기사이면서도 출정 전에 저런 기도를 한 번도, 정말 단 한 번도 해 준 적이 없었다.

“단장도 좀.”

“뭐!”

“에휴.”

너도 좀 멋진 모습을 보여 달라고 부하들이 눈치를 줬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클로드는 신경이 바늘처럼 예민해졌다.

태리가 점점 더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이고 점점 더 많은 이들의 호감을 받는 게 불편하고 신경 쓰여 죽겠다.

그런 와중에 어디선가 은발을 휘날리는 엘프가 예고 없이 휙 그녀의 뒤로 합세하면서 예민함의 정점을 찍게 했다.

“……저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났어.”

뭔 일이 있었던 건지 한동안 입을 꾹 다물고 진료소에 틀어박혀 살길래 좋았었는데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재수 없는 자식이 불쑥 나타났다.

선 고운 이목구비에, 한 떨기 꽃 같은 외모로 시선 몰이를 한 엘프는 말없이 활줄을 튕겨 보며 당연한 자기 자리처럼 태리의 옆에 섰다.

“이즈……?”

“그래.”

“뭐, 뭐야? 너 어디 가?”

“내가 가긴 어딜 가. 여기 오는 길 아냐. 숟가락 얹으려고 왔다. 오늘부터 며칠간 통 크게 싸운다며.”

늙지 않는 우아한 외모로 나무처럼 긴 수명을 가진 전설의 활잡이 종족. 그 대단한 존재가 공주에게 합류했다는 것만으로도 분위기는 상승 기류를 탔다.

와, 살아생전에 하이엘프와 같은 전장에서 싸워 보다니? 신출귀몰한 궁술을 볼 수 있는 건가 싶어서 기사들조차 진귀한 경험이라고 신기해했다.

좀 전과 마찬가지로 기분이 나쁜 건 클로드 혼자다. 검 손잡이를 잡은 손등에 핏줄이 불거지는 모습을 보곤 제드가 나름 위로를 해 주었다.

“대장, 엘프가 저쪽으로 붙었나 본데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화력에서 밀리겠습니까. 수가 몇 밴데요. 최후의 승자는 대장이 될 겁니다.”

“입 닥쳐, 제드.”

“멀리 내다봤을 때 그게 더 이득이라니까요.”

잠깐의 보상보다 최후의 승리자가 되는 것이 공주님의 진정한 관심을 받을 수 있는 길이라는 제드의 성숙한 위로였다. 하지만 성숙이고 나발이고 간에 자신의 감정을 막 깨달은 남자의 귀엔 너무나 아득한 이야기일 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곁을 내주고도 여유를 부릴 수 있을 만큼 그의 처지는 조금도 유리하지 않았다.

독기가 가득 오른 얼굴로 클로드가 진군 명령을 발동했다.

“전원 대열 정비! 기사단이 선두에 선다!”

아…… 시작부터 그런 용맹함을. 제드가 입맛을 쩝 다시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현명한 판단이신데 부디 그것이 사랑에 빠진 남자의 객기에서 나온 생각은 아니길 바란다. 그가 가슴 앞에서 정의의 여신 아가사를 기리는 성호를 그으며 검을 높이 뽑아 들었다.

* * *

끼에에엑!

산 자의 기운을 접하고 달려온 밴시의 비명으로 묘지에서의 전투는 서막을 올렸다.

사람의 마음속에 절망을 심는 울음소리와 한기를 뱉어 내는 것이 밴시의 특기. 물리적인 공격은 하지 않지만 심리적으로 상대를 무너뜨리는 기술을 구사한다.

“3급 방어 경계를 갖춘다!”

진입부터 체계적이었던 기사단은 밴시들의 습격에도 당황하지 않고 대규모의 방어 전술을 펼쳤다.

지휘가 떨어지자 거북이 등딱지처럼 순식간에 간격을 좁혀선 기사들이 가슴 앞에서 칼을 반듯하게 세운다. 광휘를 뿜어내며 타오른 검들이 좌우로 넓게 펼쳐지며 즉각 성스러운 방패를 소환해 냈다. 축복의 빛을 정통으로 맞은 괴물들은 영락없이 가루가 되어 파스스 부서져 나갔다.

“정방향으로 산개!”

진입로를 장악하고 아군이 대형을 갖출 만한 충분한 공간을 점령한 뒤에는 밀집형이었던 전선을 다시 순식간에 손바닥 모양으로 넓혔다.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사방으로 검을 세운 칼들이 펴져 나갔다.

“와…….”

처음 접해 보는 몬스터를 상대로 초반부터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집단이 몇이나 될까.

과연 대륙의 절반을 다 복속시킨 무적의 군대다웠다. 기본 실력도 출중한데 연습까지 철저히 해 왔으니 시작부터 우습게 압살하고 들어간다. 저런 기세라면 몇백 마리가 몰려와도 제압할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난전의 중심에 선 클로드는 일찍부터 가공할 만한 전투력으로 구덩이에서 나오는 구울들을 도륙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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