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2화 (52/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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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도 귀여운 편이긴 했는데 노란 드레스를 입은 공주의 모습은 정말 너무…… 너무 귀여웠다. 

입 안쪽의 살을 깨물어 통증으로 이성을 깨운 클로드는 최대한 차분한 어투로 말했다.

“왜 내 말을 안 믿습니까. 공주 같다고 했잖습니까. 그게 무슨 뜻인지 모릅니까? 공주같이 예쁘고…… 잘 어울린다는 뜻이잖습니까.”

예쁘다고. 너 진짜 예쁘다고. 그냥 봐도 너무 예쁘다고. 너무 예쁘고 귀여워서 입고 나온 순간 병아리인 줄 알았다고.

차마 그 말까진 하지 못해서 그는 턱을 괴는 척 손으로 입을 가리고 목구멍까지 치솟는 말을 악착같이 참았다.

울어서 눈이랑 코끝을 빨갛게 물들인 노란 털 뭉치가 코 훌쩍이면서 나 어떻냐고 물으면 그건 누구라도 귀여워서 죽을 광경 아닌가?

귀엽다고 하고 싶어. 하지만 그런 말은 해선 안 돼. 솟아오르는 충동을 해소하기 위해 그는 종이 옆에 놓여 있던 철제 간식 통을 저도 모르게 주먹으로 뻑 쳐서 눌렀다.

‘아, 깜짝이야!’

무의식이 멋대로 저지른 일이다. 그러나 간식 통의 뚜껑은 펀치 한 방에 푹 찌그러져서 안으로 꺼졌다. 자기가 해 놓고 본인이 더 놀란 클로드는 벌떡 일어나서 해명을 했다.

“오, 오해하지 마!”

눈을 크게 벌리고 있는 태리가 혹시나 그걸 자신에게 문제가 있는 것으로 오해할까 봐. 오해를 막기 위해 거르지 않은 진심을 막 쏟아서 퍼부었다.

“이건, 이건 절대로 당신 때문에 부순 게 아니야. 아니, 당신 때문에 그런 게 맞기 한데. 귀여워서 부순 거야! 너무 귀여워서 부쉈다고! 힘을 풀 때가 필요해서…… 그러니까 내가 하려던 말은 지금 예뻐! 진짜 예뻐. 엄청 예쁘다고. 알겠어?”

뭔 소리인지 말을 하는 당사자도 혼돈이 왔지만 다행히 태리는 그 말에 눈에 띄게 얼굴색이 밝아졌다. 자신감도 조금 생겼는지 옷걸이째로 들고 나왔던 또 다른 드레스를 몸에 대 보며 물었다.

“그럼 이거는? 장식이 좀 밋밋한데 이런 것도 가서 입어도 되려나.”

“당연히 되지. 전부 수도에서 입는 양식들입니다. 왜 그런 걸 걱정해요.”

“그래도 유행 같은 게 있을 거 아니에요. 촌스럽다고 놀림받으면 얼마나 기분 나쁜데.”

하? 눈깔 병신이 아니고서야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작자가 있나. 클로드는 전혀 이해가 안 갔지만 그 부분에서조차 염려를 말살시켜 주었다.

“그런 자가 있으면 망설이지 말고 뺨을 쳐요.”

“그러면 안 되잖아요.”

“안 되긴 왜 안 돼. 거기 가면 위로는 황제 하나뿐입니다. 그것조차도 거슬리면 가기 전에 계승식이라도 치르면 되고. 그럼 왕위 후보자가 아닌 국왕의 지위로 황제를 만날 수 있습니다. 고모님은 격식에 대한 구분만큼은 확실하게 하는 편이니까요.”

애초에 그녀를 무시할 수 있는 인간 따위가 있을 수가 없다며 자신만만하게 보장하는 호언장담에 태리는 조그마하게 배시시 웃었다.

이것보다 더 화려하고 예쁜 옷이라면 지겹게도 많이 봐 왔을 거면서, 이 수수한 드레스조차도 공주 같다고 말해 주는 그의 다정함에 가슴속이 몽글몽글해졌다.

이렇게 다정하면 언젠가 헤어지기 싫은 날도 오겠지 싶어서 그녀는 처음으로 그의 손을 먼저 살며시 잡아 보았다. 살이 닿자마자 클로드가 흠칫하는 게 느껴졌지만 빼지는 않길래 조금 더 용기 있게 쥐고는 조르듯이 살짝 흔들었다.

“그럼 이제 기본적인 예절 같은 거 알려 줘요. 속성 강의로.”

그런 건 공부할 필요가 없다며 버티던 그는 계속해서 졸라 대는 태리를 이기지 못하고 떠오르는 대로 몇 가지를 일러 주었다.

뭘 하지 마라, 이거는 해선 안 된다. 이런 종류는 하나도 없고 무엇을 조심해라, 어떤 걸 멀리해라, 어느 부류와는 말을 섞지 마라. 주로 이런 식의 주의 사항뿐이었다.

“황궁에서는 다들 느끼하고 재수 없는 말 따위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입니다. 공주님께는 아마 더하겠죠. 에스코트를 하겠다는 놈들이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에스코트?”

클로드는 찡그린 눈썹으로 끄덕이더니 파렴치한 놈들이 자주 쓰는 수법이라면서 그녀의 등 뒤로 큰 손바닥을 휘감아 끌어당겼다.

“이런 식으로 접근해서 치근덕……거리는……”

그런데 등이 파여 있던 드레스라 하필이면 손바닥이 옷감이 아닌 맨살 부근에 닿아 버렸다. 피를 빨아들이듯이 순식간에 그 안으로 열기가 몰리더니 손바닥이 익는 것처럼 활활 타기 시작했다.

바로 떼면 좋았을 텐데 의지를 배반한 손은 거꾸로 손가락 마디마디, 손끝에까지 힘이 잔뜩 들어가 버린다. 움켜쥐는 듯한 모양새로 버티던 그는 결국 태리의 하얀 살 위에 붉은 손자국을 내고 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

그 적나라한 자국을 보고 나니 순간 참을 수 없는 욕망이 느껴져서.

타인에 대해 난생 처음으로 욕구란 것을 느껴 본 그는 뻣뻣하게 굳는 몸을 자각하곤 소스라치게 놀라 버렸다. 어떻게든 가라앉혀 보려고 노력했는데 몸이 전혀 말을 들어 먹지를 않는다.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숨이 잘 안 쉬어져서 급한 대로 그녀로부터 황급히 물러섰다.

의아한 눈이 좇아왔지만 죄의식이 느껴져서 제대로 마주 보지도 못하고 그는 문으로 달려가 덜컹덜컹 문고리를 흔들었다.

뒤에서 태리가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지만 남아 있는 한 자락의 이성이 외치는 소리란 지금 당장 여기서 나가야 한다는 일념뿐.

자꾸만 미끄러지는 손을 조종해 그가 마침내 걸쇠를 풀고 문을 열었을 때였다.

“여기서 무슨 짓을 벌이고 있는 거죠?!”

더러운 생각을 품은 놈은 절대 곱게 나갈 수 없다는 듯, 분노를 활활 태우는 마녀가 입구를 떡하니 지키고 서 있었다.

* * *

분노가 임박한 눈으로 태리에게 당장 옷을 갈아입고 오도록 들여보낸 안시는 클로드와 단둘이 남자 곧장 무시무시한 기세를 뿜어내며 그를 벽으로 몰아붙였다.

공격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든 순간 잉크병에 꽂혀 있던 두 개의 펜촉이 비수처럼 날아왔다. 하나는 환술이고 하나는 진짜. 환술의 마녀답게 참 거짓을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양쪽 모두 정교한 솜씨였지만 클로드는 고민 없이 검을 들어 두 가지 모두를 다 베어 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벽에 걸려 있던 태피스트리를 손등을 쾅쾅 두드려 안에 있는 동물들을 모조리 끄집어내 공격을 감행해 온다.

맹금류 같은 날카로운 발톱을 가진 날짐승의 환영이 동시에 덮쳐들었고 전과 마찬가지로 클로드는 성실하게 그 환영들을 일일이 상대하고 방어해 무찔러 냈다. 검에 찔려 마법이 깨진 동물들은 깃털이 되어 그의 발치로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하, 뭘 하는 거죠?”

어이가 없어진 안시가 허리에 손을 올리곤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냈다.

“내겐 환술을 구분할 능력이 없다. 그러니 모든 것을 진짜라고 생각하고 없앤 것인데.”

“실력이 좋다고 자랑하는 건가요?”

“아니.”

클로드가 검을 회수하며 묻지 않은 대답을 내려놓았다.

“수도로 가는 일 때문에 공주님께 도움을 드리려고 온 거다. 지배인이 우려하는 불미스러운 일은…… 없었다.”

없었다, 에서 살짝 목소리가 흔들렸다는 것을 포착해 낸 안시는 무람없이 그를 훑어보았다.

과연 객관적으로 훌륭한 남자이긴 했다. 굉장한 외모에 출중한 능력, 그에 뒤지지 않을 입이 떡 벌어지는 배경까지 모조리 다 가진 남자였다. 매력 또한 충분하고. 그녀가 모시는 공주님의 곁에 세워 둔다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그림이 될 거라고도 단연 믿어 의심치도 않는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안시가 펼쳤던 환술을 싹 거둬들이더니 냉랭한 목소리로 뱉어 냈다.

“우리 공주님은 안 됩니다.”

“뭘…….”

뭘 밑도 끝도 없이 안 돼?

하지만 그게 무슨 뜻인지는 본능적으로 그도 알고 있고 안시도 알고 있었다.

왜. 왜 다들……. 클로드는 검의 손잡이에 얹어 두었던 손을 꽈악 오므려 쥐었다.

제드도 저렇게 얘기했었지. 귀가 따가울 정도로 말했다. 대장, 안 됩니다. 그분은 안 됩니다. 그 공주님은 안 돼요, 라고.

왜.

“왜 안 돼.”

짐승이 이를 갈며 으르렁거리듯 그가 눈빛을 시꺼멓게 물들였다.

내가 그녀와 뭘 했나. 뭔가라도 했다면 이렇게 화도 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아무것도 안 했다. 아무것도 못 했단 말이다.

“왜 안 되냐니. 그걸 몰라서 묻는 건가요?”

클로드의 반항에 안시는 눈썹이 거의 90도 각도로 서더니 연거푸 기가 찬다는 내색을 내비쳤다.

이젠 아예 대놓고 이러네? 하는 느낌으로.

이놈이 초반엔 제 감정 부정하는 못난이처럼 까칠하게 구는 척이라도 하더니만, 요즘 하는 꼴을 보면 공주님 뒤를 졸졸 따라다니다 못해 좋아 죽겠다고 얼굴에 써 놓고 다니고 있었다.

얼마 전에는 호텔 식당을 반파시키면서까지 격한 감정마저 드러냈었고. 참다 참다 오늘 따끔하게 경고를 주니 이빨을 드러내기까지 한다.

염치도 없지, 염치도 없어!

그녀가 최후의 통첩을 날리듯 통보했다.

“저는, 아니 우리는 공주님을 결단코 아무 남자에게나 내어 드리지 않을 겁니다. 꿈 깨시죠.”

난…… 아무 남자가 아니야. 클로드는 곧장 그 말이 턱밑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뱉어 내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왜.

지배인의 말이 객관적으로 맞고 또한 옳았기 때문에.

공주를 아무에게나 허락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 그렇게 놔둬서는 안 될 일이다. 그런 면에서 지배인의 주장은 정당했고 방어적인 행동 역시 훌륭한 귀감이 될 일이었다.

“그건…… 부정할 수가 없군.”

“아주 염치가 없는 분은 아니라 그나마 다행이군요. 제 간섭을 주제넘은 것으로 여기지 마시고 현재 자신의 위치를 자각을 좀 하세요.”

“내 위치가 뭐가 어때서.”

“총독이라는 감투는 장식입니까?”

“그딴 건 내가 원한 게 아니야. 줘도 안 가진다. 그냥 줘도 안 가진다고.”

“지금에 와서야 통하지 않는 변명이죠!”

그 한마디로 클로드를 완패시켜 입을 꾹 닫게 한 안시는 고개를 팩 하고 돌렸다.

저 정도 말귀라도 알아먹어서 다행이지. 만약 그가 또 한 번 반박했더라면 당장에 귀신처럼 머리채를 푸르고 지옥의 염화를 외치는 마녀를 보여 줬을 테다.

끼익.

일상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태리가 문 사이로 빼꼼 얼굴을 내밀며 쭈뼛쭈뼛 걸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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