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186)


 

26

* * *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욕조 속. 성대를 긁는 침음 소리와 함께 젖은 머리가 뒤로 넘어가면서 나른해진 등을 기댔다.

검은 머리카락에서부터 굵은 목덜미를 타고 벗은 어깨를 지나 물방울들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린다.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닦듯이 쓸어내린 클로드는 한동안 그 자세 그대로 눈을 감고 있었다.

피로가 누적된 숨결이 욕실의 습한 공기 속에서 천천히 들이쉬고 내쉬어졌다.

‘피곤하다.’

서펜트 사냥이 있었던 날로부터 어언 나흘째를 지나가는 아침. 그 후로 강제 휴식을 선언했으니 공주와는 사냥을 나간 적이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도 편안하고 한가로운 날들을 보냈어야 정상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게 보내지 못한 그였다.

공주가 오기 전에 그랬듯 그는 하루도 쉬지 않고 매일같이 새벽마다 숲으로 정찰을 나갔다.

거기에 더해 순찰의 경로는 전보다 더 넓어지고 깊어져서 태리와 사냥을 나갈 때는 접근하지 않았던 곳들까지 모조리 둘러보고 있는 중이다.

그래야만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제 선에서 빨리 해결 볼 수 있고, 또 그래야만 태리의 시선을 숲으로부터 떼어 낼 수 있을 테니까.

자기 몸을 아낄 줄 모르는 여자를 쉬게 하려니 역으로 그의 일감이 늘어난 셈이었지만 클로드는 전혀 관둘 생각이 없었다. 아무리 힘들고 아무리 피곤해도.

‘기사들의 편성을 바꿔야겠어. 인원을 줄이고 관할을 더 세밀하게 나눠야겠다. 조금 위험하더라도 그 편이 더 나아.’

뜨거운 물을 이완된 목 뒤에 몇 번 더 끼얹은 그가 찰박거리는 소리를 내며 벗은 몸 그대로 한 다리씩 욕조 밖으로 빠져나왔다.

수건으로 대충 몸의 물기를 닦고 머리를 탈탈 터는 뒷모습이 반대편에 선 거울 속으로 비쳐 보였다.

길고 강인한 두 다리며, 힘이 넘치는 허리, 섬세하게 움직이는 등과 어깨 근육들이 물에 젖어 유연하고도 매끄럽게 빛났다.

벽에 노골적으로 장식된 수사슴의 헌팅 트로피조차도 비할 바가 못 될 정도로 성적인 매력이 줄줄 흐르는 광경이었지만 정작 본인은 그딴 것엔 관심도 없고 귀에 들어간 물을 빼내느라 혼자 애를 먹고 있었다.

“이거 왜 안 빠져. 먹먹해 죽겠는데.”

누가 보면 귀족의 소양 같은 건 없는 게 아닌가 싶겠지만 그는 무려 황실의 사람이었다.

짜증을 낸 그가 젖은 몸에 뻑뻑한 옷을 걸쳐 대충 차림새를 갖췄을 무렵이었다. 똑똑하고 노크 소리가 울리며 문고리가 딸각 돌아갔다.

다 씻으면 알아서 나갈 텐데 뭐 하러 들어오나. 당연히 부관 제드인 줄 알고 클로드는 열린 틈으로 닦고 있던 수건을 홱 던졌다.

젖어서 무거워진 수건이 사람의 얼굴에 철푸덕 달라붙었고, 클로드는 가감 없이 핀잔을 주었다.

“노크는 알림용이 아니라 허락용이잖아.”

“대장, 그게 아니라요…….”

“인사가 격하시군요.”

예상대로 문을 연 것도 제드였고 문밖에도 제드가 서 있긴 했다. 대각선 코너 쪽에 안절부절못하는 표정으로.

그러나 정면에서 수건을 맞은 사람은 다른 인물이다.

스물 후반쯤 되어 보이는 귀족 남자가 축축한 천을 떼어 내며 인위적인 미소로 클로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발로란의 궁정 관리임을 뜻하는 푸른 배지가 남자의 재킷 목깃에 박혀서 자랑스러운 빛을 반사했다.

“오랜만입니다. 소공작.”

“……오거스 백작.”

“하하하, 제국의 젊은 영웅께서 저와 같은 일개 귀족을 기억해 주시는 건 정말 기분 좋은 일이군요!”

유쾌한 목소리가 욕실 벽에 부딪혀 울려 퍼진다. 그러나 클로드는 전혀 웃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아니, 이 발닦개 자식이 왜 여기에 있지?’

오거스 백작. 이른 나이에 작위를 승계받아 내무대신의 차관보에 이른, 소위 말해 출세의 탄탄대로를 달리고 있는 청년.

정치적으로는 뼛속부터 왕당파로 현재 황제의 끄나풀이자 앞잡이 역할을 도맡아 하고 있는 놈이었다.

이놈이 고모님 앞에서 꼬리 흔드는 걸 볼 때마다 같잖아서 몇 번이나 그 엉덩이를 발로 까 주고 싶었는데, 당연히 기억 못 할 리가 없지 않은가.

클로드는 이게 어찌 된 일인지 설명하라는 의미로 제드를 살벌하게 노려보았다.

황궁에서 알랑방귀나 뀌어 대며 애교나 피우고 있어야 할 놈이 어째서 이른 아침에 내 집 안방에 있는 건지.

제드는 억울함을 뜻하는 손짓과 입 모양으로 본인의 결백함을 주장했다.

‘예고도 없이 들이닥쳤단 소리로군.’

기껏해야 고모님의 딸랑이 주제에 감히 이런 짓을 해?

짜증이 팍 솟구치는 것을 클로드는 숨기지 않았다.

“지금 이 시간에 이런 곳에서 만나야 할 만한 사람이 아닌 것 같은데. 이게 욕실 문이란 걸 모르진 않았을 테고. 뭐, 훔쳐보는 취향이라도 있나?”

가시 돋친 말이었지만 백작은 넉살 좋게 받아쳤다.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렇게 하지 않으면 소공작을 뵙고 가기가 어려울 것 같아서 말입니다. 그간 이곳을 다녀갔던 관료들이 모두 입을 모아 똑같은 어려움을 토로하더군요. 공식적인 방문이었음에도 소공작께서 쉽게 만나 주지 않으셨다고요.”

“총독이다.”

고의적으로 어깨를 치고 나가며 클로드는 그의 말버릇에 대해 경고했다.

황제의 뒷배나 믿고 실실 쪼개며 설치는 놈. 정말 징글징글하다. 집무실의 소파에 털썩 파묻혀 앉으며 클로드가 날카로운 음성을 꽂았다.

“그래서 날 만나기 위해 이렇게 앞뒤 구분도 없이 찾아오셨다?”

“이곳에서 총독이 작정하고 도망가면 누가 잡을 수 있겠습니까? 격식엔 어긋났지만 비겁하다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동안 분기마다 수도에서 보낸 전령이 내려왔었고, 클로드는 그때마다 매번 그들을 바람맞혔었다.

오는 때에 맞춰 어딜 가 버리거나 그도 아니면 시찰을 핑계로 그들을 검은숲으로 끌고 들어간 다음 아무 몬스터의 주둥아리 앞에다가 떨궈 놓고 오는 식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질겁해서 수도로 내리 줄행랑을 쳤다.

황제에 대한 반항과 심술을 드러낸 것인데, 이번 상대는 전에 왔던 놈들보단 아주 약간 덜 멍청해서 제 딴에 나름 대비를 해서 온 것이었다.

참 애쓴다, 애써. 클로드가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었다.

“그렇다고 내가 다 벗고 있는데 들어올 필요까진 없었어.”

“물소리가 끊긴 걸 확인했는데요. 뭐, 어찌 되었든 같은 이유죠. 도망치실까 봐요. 이 먼 곳까지 와서 처량한 신세가 되긴 싫습니다.”

“그래서 용건이 어찌 되시나.”

“늘 그렇듯 정기적인 폐하의 전언입니다.”

백작은 두툼한 서류 가방에서 이자리스 총독에게 보내는 황제의 공문서부터 전달했다.

클로드는 받자마자 뜯어서 눈으로 쓱 훑었다.

평범한 내용이었고 별다른 것도 없었다. 언제나 그렇듯 조금 싫은 내용, 꽤나 싫은 내용, 그리고 지랄맞은 내용들이다.

종합하자면 충분히 그곳의 질서가 잡혔고 안정화도 된 듯한데 왜 아직도 해당 지역을 완전히 석권하지 못했냐는 힐책이었다.

‘질서? 안정화? 지금이 어떤 상황인데.’

뭘 모르면 그냥 가만히나 계실 것이지. 그가 종이를 내려놓으며 말했다.

“잘 받았고 다 읽었고 답변은 말로 한다. 듣고 가서 폐하께 전해 드리면 된다. 이곳의 상황은 ‘현상 유지만으로도 벅찬 매우 나쁨’이다. 못 믿겠으면 직접 검은숲에 들어가서 보면 되고 알아들었으면 그대로 일어나서 돌아가면 돼. 나한테 말도 없이 왔으니 갈 때도 배웅은 필요 없겠지.”

얼른 썩 꺼져라. 이 꼴도 보기 싫은 발닦개야. 당장 사라지라는 의미로 그가 출입구를 가리켰다.

그러나 백작은 전혀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도리어 꺼림칙한 분위기로 혼자 싱글벙글 웃더니 사소한 물음으로 클로드의 신경 줄을 건드렸다. 대화의 문맥과는 전혀 관련 없는 말이었다.

“그런데 총독.”

“왜.”

“어째 여기 공주와는 잘 지내시는 모양입니다. 모두가 염려했었는데 말이죠.”

클로드가 멈칫했다.

“누가. 내가?”

“다른 사람이 또 있습니까?”

“……나 아닌데.”

“하하하! 자기 자신을 모르시나 본데. 그러지 마십시오. 총독은 거짓말하는 데에 재능이 없습니다.”

호탕하게 웃으며 압박하는 수준이 과연 황제의 대리인답게 얄밉기 짝이 없다. 순간 주먹이 마려웠지만 클로드는 꾹 참아 냈다.

“백작이야말로 한참 모르는 것 같은데. 공주와는 주로 싸우는 사이다.”

“그래요?”

“그래.”

가장 최근의 일만 떠올려 봐도 그렇다.

어찌나 싸워 댔던지. 손가락을 물렸지, 귀를 잡아 뜯겼지, 어깨에 꾹꾹이까지 당했지…….

“우린 만나면 미친 듯이 싸운다. 장난 아니게 싸운다고.”

그러니까 안 친해. 잘 못 지내. 클로드는 그 점을 강조해서 말했다.

하지만 언행 불일치라고 내뱉은 말은 그런데 공주를 떠올린 순간 드러난 그의 표정은 어디서 신나게 우당탕탕 모험기라도 치르고 온 소년처럼 살짝 들뜨고 만다.

서서 지켜보던 제드는 입이 바짝바짝 타서 미칠 것 같았다.

‘으아아, 제발 표정 관리 좀 해요. 뭐가 그렇게 좋아, 인간아!’

백작이 후후, 소리 내어 웃었다.

“그렇습니까.”

“근데 백작이 왜 나한테 그런 얘길 하지? 그게 왜 궁금해. 누가 내 사생활을 그쪽에 찔러 넣어 주기라도 하나?”

“대제국의 황제 폐하께선 모든 곳에 눈과 귀가 있습니다. 무엇이든 알고 계신 건 당연할 일 아닐는지요.”

“그러니까 기분 나쁘게 내 뒷조사를 했다는 거 아니야?”

“들려오는 사실을 그저 들은 것뿐. 그것을 가지고 뒷조사라 말하기에는 어폐가 있는 듯합니다. 총독이 왕녀와 화친을 택했다는 이야기를 소문으로 접했을 뿐입니다.”

“소문?”

무슨 여기 소식이 제국의 수도에까지 소문이 다 난다고. 클로드는 개소리하지 말란 얼굴로 미간을 찌푸렸지만 옆에 있던 제드는 듣고 머릿속이 아찔해졌다.

‘일 났군. 폐하께서 알고 계신 건가?’

섬세하지 못한 그의 대장이야 관심이 없었겠지만 최근 그와 공주를 둘러싸고 여러 이야기들이 많이 나기는 했다.

개중에 압권은 공주를 어깨에 짊어지고 야밤에 도심을 뛰어다녔다던 총독에 대한 목격설.

추문이 퍼지는 걸 황급히 손을 써서 막았는데 소문에는 보이지 않는 발이 달리는 법이라고, 그런 사소한 이야기들이 틈틈이 퍼지고 퍼져 황제의 눈이 이곳으로 이동한 것이다.

그제야 왜 오거스 백작 같은 내각의 핵심 인물이 여기까지 사령으로 내려왔는지 이해가 가기 시작했다. 이게 본 목적이었다.

“무슨 말이 어떻게 퍼졌는진 모르겠지만 공주와 난 불필요한 소모전을 벌이지 않는 것뿐이다. 필요에 의해서 합의한 사항이고 서로서로 좋은 일이야.”

“서로서로 좋은 일이라. 그러기엔 들려오는 공주의 활약이 지나치던데요. 협곡 웨어울프 떼 격파, 지하 던전 탐색과 파훼, 오우거 습격 제압……. 당장 떠오른 것만 해도 이 정도군요. 공주의 용맹이 수도까지 명성을 떨치는 덕분에 폐하께서 불편해하십니다.”

“그래서?”

“서로에게 좋은 일이라면 왜 그런 업적들이 총독의 공으로 돌아가지 않는 겁니까?”

그것들이 다 내 공으로 돌아갔어야 했다고?

클로드는 어이가 없어서 하, 하고 짧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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