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1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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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왕 온 김에 한꺼번에 다 처리하고 가는 게 효율적인 거지.” 

“그러다가 몸 망가지는 게 멍청한 거지.”

“앞으로 며칠 못 온다고 생각하면 저런 걸 남기고 가는 게 더 아쉬운 거 아니야?”

“뭐가 아쉬워. 도대체 뭐가. 그냥 몇 마리 더 못 죽이는 것뿐이라고. 좀, 좀!”

“뭐, 뭐!”

“집에 가!”

“싫어!”

작정하고 한 마디를 안 지기로 하니 둘 다 후퇴가 없었다. 언제부터 존댓말이고 나발이고가 되었는지도 잘 모르겠다.

불만이 한껏 서린 눈빛을 보니 그도 존댓말 따위는 생각도 없나 본데 괜찮다, 상관없다. 몇 번을 말했지만 태리는 그런 거에 자존심 세울 정도로 공주 역할에 몰입하진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다는데 왜 못 하게 하는 건데? 피곤하면 혼자 가면 되잖아.”

“하! 어떻게 시꺼먼 숲속에 당신을 혼자 두고……! 그건 말이야 뭐야?!”

아나, 진짜 저 포대기 같은 기사도 정신 때문에 답답해 죽겠다. 난 포대기도 필요 없고 유모차도 필요 없다고 몇 번을 말해! 걸음마 배우는 애긴 줄 아나.

으으으, 하면서 속을 끓이고 있으려니 클로드가 끼고 있던 가죽 장갑을 입으로 잡아당겨서 바닥에 퉤 하고 뱉더니 제 손목시계를 손끝으로 탁탁 치며 보여 주었다.

“그리고 지금 몇 시야. 이러다가 여기서 날 샐지도 모른다는 생각 안 해 봤어?”

“일하다 보면 날 샐 수도 있지.”

“나랑 둘이 있잖아!”

“둘이건 셋이건 그게 무슨 상관이야.”

“둘이건 셋이건?”

문제가 될 만한 발언은 없다고 생각했는데 당최 어떤 단어가 그 순간 그의 정상적인 사고 회로를 끊어 먹은 건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태리는 그때 분명히 목격했다. 회색빛 눈동자 속의 순수하고 깨끗한 초점이 뭔가에 퍽 얻어맞고 휘청거리는 모습을.

……어디 조선 시대에서 오셨나.

때 하나 묻지 않은 세계관 최강자의 목소리가 경기를 일으키며 새된 비명을 질렀다.

몹시 작고 연약한 목소리였지만 틀림없이 비명이었다.

“어떻게 그런…… 당신 날라리입니까?”

* * *

‘어지러워.’

경주마에 올라탄 기분이 이럴까. 누가 지구를 양손으로 잡고 탈탈탈 흔드는 것처럼 시야가 출렁거리는 통에 태리는 밀려오는 어지럼증을 몰아내려 눈에 힘을 꽉 주었다.

억지로 초점을 맞춰 잡은 시야 속으로 호텔 정문의 마법등이 환하게 일렁거리는 게 보였다.

말도 안 돼. 이렇게 빨리 왔다고?

징그럽게도 빠른 속도에 그녀는 할 말을 잃었다. 얼음 계곡에서부터 여기까지 체감상으로는 한 10분 남짓이나 됐을까 싶었다.

‘내 참, 어이가 없어서. 그렇다고 사람을 납치를 해?’

과로로 밤새는 것쯤은 하찮게 여겼던 그녀는 ‘너 어떻게 그러니……? 너 날라리니?!’ 하고 극단적으로 비명을 지른 남자에 의해 강제로 현장으로부터 이송당했다.

그때 무언가 결심이 선 듯했던 그의 비장한 눈빛을 수상하게 여겼어야 했는데.

방심한 찰나에 양 허벅지가 단단한 팔에 감싸 안겨서 번쩍 들리더니 그대로 넓은 어깨에 빨래처럼 걸쳐져서 총알택시처럼 쌩하고 실려 나갔다.

너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땅이 뒤로 훅훅 밀려 나가고 있었다.

얼마나 빨리 달리던지. 속도라도 적당하면 도중에 탈주 시도라도 해 보겠는데 훌륭하게 단련된 남자의 두 다리는 도무지 지칠 줄을 몰랐다.

울퉁불퉁 튀어나온 나무뿌리와 바위들을 징검다리처럼 훌쩍훌쩍 뛰어넘고 거친 비탈길에서조차 흐트러지는 법 없이 육식 짐승처럼 마구 질주해 댔다.

그렇게 눈 뜨고 코 베이듯 속수무책으로 당해 실려 오길 어언 15분 정도. 한적한 밤길에서 마주친 몇몇 행인들의 휘둥그레진 눈을 보고 태리는 널찍한 등판에 절망적으로 이마를 쿵 박았다.

이거 소문나겠네. 이건 소문날 거다. 틀림없이 소문나고야 만다.

고요한 도심에서 여자를 어깨에 얹고 뜀박질하는 남자의 조합이 어디 흔할까.

들키면 안 된다고 자기가 제일 신중하게 굴던 놈은 갑자기 그딴 조심성은 어디로 다 갖다가 버렸는지, 기어이 그녀를 이 상태로 짊어지고 가 호텔 코앞에다가 떨어트릴 모양이었다.

“놔줘, 이제. 다 왔잖아! 사람들이 쳐다본다고!”

“시끄러워.”

살짝 속도가 줄어든 틈을 타, 태리는 으! 하고 분이 터져 죽겠다는 기합을 넣으며 클로드의 등짝 한가운데를 주먹으로 퍽 후려쳤다.

정말 열받게도 때린 손이 더 아팠지만 굴하지 않고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더 퍽퍽 후려쳤다.

“이 더러운 납치범!”

처맞아라, 이놈아. 너는 더 맞아야 돼.

정당방위를 앞세워 그녀는 급기야 양손을 모두 이용해 분노한 고릴라처럼 쿵쾅쿵쾅 그의 어깨를 두드리기도 했다.

그래 봤자 간지러운 수준인지 클로드는 아픈 척도 하지 않았다. 아니면 호텔 말고는 눈에 뵈는 게 없는지 목적지만을 향해 뻗어 나가며 그는 다 왔어, 다 왔어, 하고 같은 말만을 내뱉었다.

“내려 달라고.”

“좀 참아.”

“내려, 당장!”

“아아, 아프잖아! 다 왔으니까 귀 잡아당기지 마!”

때리는 걸로는 분풀이가 부족해서 태리는 클로드의 귀가 빨개질 때까지 꽉꽉 잡아당기며 고문까지 했다. 맘 같아선 이로 아그작거리면서 깨물고 싶었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전에 목적지에 도착해서 겨우 땅을 밟을 수 있었다.

“기어코 이래야만 했어?”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야.”

“이렇게까지 해야 했냐고.”

“그것도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이고.”

클로드는 얼얼한 귀를 대충 문질러 보곤 인형 뽑기 기계의 집게발처럼 태리의 뒷덜미를 가뿐하게 들어 호텔 문 앞으로 밀어 냈다. 당장 들어가. 낮은 음성이 울렸다.

“가서 씻고 자, 얼른. 이불 잘 덮고 자기 전에 딴짓하지 말고. 발목은 내일 날 밝자마자 꼭 제대로 치료받아.”

“어휴, 잔소리야 뭐야, 진짜.”

“빨리 가.”

여기까지 와서도 행여나 그녀가 딴 길로 샐까 지독하게 감시하는 남자는 각 잡힌 턱짓으로 조속한 귀가를 재촉했다.

저런 지독한 자식. 그래, 간다, 가! 하는 심정으로 태리는 호텔 벽의 붉은 벽돌을 손으로 짚었다. 테라스 난간에 로프를 걸어서 한 번에 쭉 끌려 올라가려고 하는데 어깨가 급히 다시 뒤로 잡아당겨졌다.

“뭐 해!”

“뭘 뭐 해?”

“고집 그만 부리고 들어가라고 했잖아.”

“그래서 지금 들어가려고 하잖아.”

태리가 자신의 방이 있는 2층 테라스 창문을 손가락을 치켜들어 가리켰다.

“나올 때 저기로 나왔단 말이야.”

“어디로…… 나왔다고?”

그 순간 스치는 눈빛이란.

날라리를 넘어선 무슨 망아지, 개망나니, 양아치를 보는 듯한 시선이다.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냐고 따져 묻는 듯한 복장 터지는 그런 얼굴.

잠시 후 클로드가 하아, 하고 묵힌 한숨을 쉬더니 좀 전에 납치를 했을 때처럼 태리의 허벅지를 한 팔에 안아서 위로 번쩍 들어 올려 주었다.

들어 올려 줄 때 투덜대며 중얼거리는 소리가 다 들렸다. 개망나니라면서, 징글징글하게도 속 썩인다면서, 어디 이런 망아지가 있냐면서.

‘열심히 사는 선량한 사람한테 감히 이런 소릴 해?’

태리는 혼자서도 능숙히 올라갈 수 있었지만 그런 괘씸한 마음이 들어서 사양하지 않고 그의 팔에 의지해 두 손으로 힘겨운 척 난간을 붙잡았다. 그러곤 높이가 부족하다는 핑계를 대 그의 어깨까지 처참하게 두 발로 짓밟고 올라서 버렸다.

‘오, 좋은데?’

그런데 웬걸. 소소한 복수 정도로 벌인 일이 막상 밟고 나니 안정감이 저 세상 수준으로 아늑했다.

편안한 데다 흔들림도 없고 튼튼하기까지.

그래서 그만 올라가지 않고 그 자리에서 제자리걸음 하듯 몇 번을 더 밟아 버렸다.

꾹꾹. 꾹꾹.

꾹꾹. 꾹꾹.

“……뭐 합니까. 당신이 고양입니까? 거기서 왜 내 어깨에 대고 꾹꾹이를 해요?!”

이건 또 어디서 배워 먹은 꾹꾹이야!

클로드가 아래에 깔린 채로 빽 소리쳤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나도 모르게 그만……. 너무 편하고 좋아서. 사람 어깨가 원래 이러나? 어떻게 이렇게 안정감 있지?”

살면서 언제 또 한 번 주인공을 이토록 처참히 짓밟아 보겠나 싶어서 신나고 빠르게 몇 번을 더 눌러 줬더니 돌연 아래가 조용해진다.

불안함을 감지한 태리가 황급히 정신을 차리고 올라가려고 했지만 간발의 차로 늦으면서 몸이 구멍 속으로 빠지듯이 쑤욱 밑으로 하강했다.

이대로 곤두박질치나 싶었는데 그 전에 클로드가 양팔로 받아 내며 신속한 동작으로 자신의 한쪽 어깨에 그녀를 휙 걸쳐 올렸다.

납치 전과자답게 두 번째 시도하는 그의 자세는 한층 더 균형적으로 발전해서, 그녀를 걸머진 상태로도 그는 반동을 이용해 벽을 툭툭 차 뛰어오르더니 단숨에 난간을 잡고 2층까지 뛰어 올라왔다.

아니, 이 피지컬 차이는 대체 뭐지. 주인공 혼자서만 다른 종족인가?

순간 이동을 한 것처럼 눈 깜짝할 새에 테라스 안으로 내려 준다. 태리는 꾸물꾸물 그의 품에서 기어 내려와 잠기지 않은 방의 창문을 위로 밀어 올려 잽싸게 안으로 들어갔다.

방의 불을 켜고 뒤를 돌아보니 아직 떠나지 않은 그가 날개를 접은 독수리처럼 난간의 긴 바에 걸터앉아 있었다. 직접 들여놓으니 한결 안심한 듯한 표정이었다. 잔잔한 밤바람에 그의 짙은 로브가 살랑거렸다.

“들어가서 푹 주무십시오. 한동안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쉬고. 괜히 일 벌일 생각 말고 여기 얌전히 있어요. 불시에 검사하러 올 겁니다.”

이렇게나 빼어난 외모에 그렇지 못한 말투라니. 설정값이라지만 참 아깝다. 태리는 불쑥 그런 아쉬움이 들어서 말했다.

“총독이 지금보다 조금만 더 상냥하면 여자들이 엄청나게 걸려들면서 단숨에 1등 신랑감이 될 텐데. 혹시 바꿔 볼 의향은?”

“쓸데없는 소리.”

귀담아듣는 시늉도 없이 칼같이 무시한 그는 이만 들어가라는 눈짓을 하더니, 몸을 돌려 어떠한 준비 동작도 없이 바닥으로 휙 떨어져 내렸다.

후다닥 좇아서 내려다보니 벌써 저만치나 멀어져 가고 있는 커다란 등이 보였다.

길에 아무도 없는지 살핀 뒤 태리가 손을 모아 작게 소리쳤다.

“후드 쓰고 가야죠!”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길래 이번에도 무시할 줄 알았더니 클로드는 그 말에 잠깐 멈칫하더니 손으로 후드를 푹 눌러 덮었다.

“저 꽈배기. 투덜대도 결국 다 할 거면서.”

등에 꼭 툴툴이라고 쓰여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그건 착각일까.

어둠 속으로 파묻히는 등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창가에서 지켜보던 태리는 그날 밤, 누가 시킨 대로 딴짓 한 번 하지 않고 깨끗이 씻고 이불을 잘 덮고 푹 잤다.

작은 뒤척거림 한 번 없었던 깊고 편안한 잠자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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