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화 (22/186)


 

22

물약이 쭈욱 밀려 들어가면서 즉각 고통이 완화되고 에너지가 돌았다. 현실 세계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게 아쉬울 정도로 끝내주는 물약이었다. 

발목에 다시 힘이 들어가자 그녀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았다.

이제 남은 건 마지막 한 놈이다. 무너진 돌무더기에서 벗어난 날쌘 몸이 얼음이 깔린 계곡으로 예티를 유인했다.

하얀 털이 전신을 뒤덮은 곰 형상의 마수는 여전히 분노에 휩싸여 있었다.

괴물을 등 뒤로 매달고 쫓기듯 도망치는 달리기를 이어 가길 잠시, 자동차가 드리프트를 하듯 태리는 어느 지점에서 달리는 방향을 180도로 뒤바꿔 예티의 가랑이 밑으로 쭈욱 슬라이딩해 들어갔다.

그러곤 다리 사이를 미끄러져 지나가는 그 정확한 타이밍에 괴물의 무릎 뒤를 도끼로 힘껏 잘라 먹었다.

“끄아아아아!”

밀려 나간 몸을 일으켜 뒤를 돌아보니 이미 한쪽 무릎이 잘린 예티는 망가진 인형처럼 허물어지고 있었다.

심호흡을 한 태리는 그것조차도 그냥 두고 보지 않았다. 두 다리에 단단히 힘을 주고 서선 도끼의 날을 수직으로 세워 최후의 일격을 꽂아 버렸다.

촤악!

머리통이 두 쪽으로 갈리며 눈앞에서 붉은 액체가 폭포수처럼 솟았다가 잠시 후에야 가라앉았다.

“하아, 하아.”

그 상태로 거친 숨만을 몰아쉬고 있자니 곧 차가운 느낌이 발밑에 차올라 정신을 일깨웠다. 예티들 때문에 항상 얼어 있었던 계곡물이 빠른 속도로 녹고 있었다.

부츠가 더 질퍽해지기 전에 물가로 나오며 그녀는 방금 전의 전투를 머릿속으로 복기했다.

‘아직도 부족한 점이 많아.’

몬스터의 약점과 제압법을 미리 알고 있지 못했다면 더한 난관을 겪었을 게 눈에 선해서였다. 그녀는 매번 이 몸의 한계를 느꼈다. 클로드라면 이렇지 않았을 테니.

‘이래서야 내가 총독을 지켜 주기가 힘들어. 조금 더 무리해서라도…….’

아쉬웠던 전투를 곱씹으며 잠시 앉아 있으려니 곧 성마른 발소리가 들리며 덤불 속에서 키 큰 남자가 튀어나왔다.

“무사합니까!”

예상했던 대로 클로드였다. 오늘도 어김없이 그는 후드가 달린 시커멓고 긴 망토를 입은 채 등 뒤에 천으로 칭칭 감은 성검을 걸머지고 나타났다.

“혼자 다니지 말라고 내가 몇 번을……!”

씩씩대며 다가온 남자의 얼굴에서 코와 입을 덮은 복면을 그녀가 쑥 끌어 내리자, 선명한 이목구비가 드러난 그가 더 큰 소리로 꾸짖었다.

“기다려 주는 게 그렇게 힘듭니까?!”

“5분 기다렸어요.”

“전 공주님을 한 시간 가까이도 기다려 봤는데요. 상추 뽑고 당근 뽑으면서요.”

“그거야 뭐…….”

클로드는 이마를 짚으며 이미 상황이 끝난 현장을 둘러보았다. 꽤 많은 숫자의 예티 시체가 곳곳에서 굴러다니고 있었고 어떤 건 한곳에 모아 불로 지진 건지 잿더미의 흔적도 보였다.

엉덩이를 탈탈 털며 일어난 그녀가 어깨 너머로 고개를 쓱 내밀었다.

“잘했죠?”

은근히 칭찬을 바라는 듯한 우쭐한 표정에 클로드는 그런 격려 따위 자신이 해 줄 것 같냐는 듯한 엄격한 눈길을 되돌려 주었다.

“자기는 늦은 주제에.”

“늦은 건 제 불찰이 맞지만 10분만 기다려 주셨어도 혼자 보내지 않았을 겁니다.”

“10분을 왜 지각했는데요?”

꾹꾹 욱여넣듯이 대답하던 그는 그 말에 발끈했는지 참지 못하고 항변했다.

“도시락 싸느라고요.”

“도시락……?”

벌게진 얼굴로 주머니를 찢듯이 뒤진 그가 곧 아담한 크기의 철통을 증거물처럼 눈앞에 대고 흔들었다.

“또 제대로 챙겨 먹지도 않고 나오실 게 뻔한 거 아닙니까? 비실비실한 체력으론 밤 사냥에서 못 버팁니다.”

“그러니까, 그 도시락이란 게…… 내 도시락?”

너 지금 내 간식 싸느라 늦었다고 얘기하는 거니? 세상에나, 그런 거야? 태리가 휘둥그레진 눈으로 재차 묻자 귀가 빨개진 클로드는 민망함을 몰아내려 더 큰 목청으로 따지듯이 말했다.

“그 호텔이 제정신인 밥만 해 줬으면 이런 쓸데없는 건……. 제대로 사람이 먹을 만한 걸 요리해 달라고 요구하십시오. 공주 아닙니까! 그게 뭐 어렵다고 말을 못 하시는 겁니까?”

공주가 머물고 있는 호텔의 식사는 몹시 끔찍하기로 도시에서 유명했다. 그리고 그는 그동안 공주와 같이 붙어 다니면서 본의 아니게 그녀가 그런 것들을 입에 넣는 걸 수도 없이 보아 온 참이었다.

맛없다며 반 이상을 남기고 허기를 채우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대충 씹고 삼키는 모습을.

몇 번이나 그냥 무시하고 못 본 척 넘어가 보려 했지만 어느 순간부터인지 도저히 신경이 쓰여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보기에 공주는 너무 말랐고 당장이라도 많이 먹여서 살을 찌워야 할 사람이었다.

그가 챙겨 온 도시락을 도로 집어넣으며 말했다.

“배가 고프면 말씀하십시오. 가지고 있을 테니까요.”

“아…… 고마워요. 근데 다음부턴 번거롭게 안 그래도 돼요. 어차피 배는 아무거나 먹어도 다 채워지는 거고. 오늘은 나도 뭐 좀 싸 왔거든요.”

고맙다면서 공주는 코트 앞주머니에서 먹다 남은 딱딱한 빵 덩어리를 꺼내 보여주었다. 나름 걱정 말라는 의미였는데 클로드는 그 꼴을 보고 더 속이 터졌다.

아니, 그딴 걸!

시간도 남으니 다음 사냥을 하러 가자며 앞장 서는 여자의 손목을 그가 꽉 붙잡았다.

“그 호텔 사람들 정말 짜증 납니다.”

“뭘 그렇게까지 짜증을 내요.”

“그러게 말입니다. 근데 짜증이 나는 걸 어떡합니까.”

솔직히 말해서 짜증이 아니라서 성질이 나 죽겠다. 빌어먹을 마법사 놈들은 저 여자가 맛없는 걸 찔끔찔끔 떼어 먹는 모습을 보고도 뭔가를 느끼는 게 없나? 그동안 얼마나 저질 같은 음식들을 먹여 왔으면 딱딱해서 씹히지도 않을 저딴 보리빵에 만족을 하는 건지.

그가 공주의 손목을 질질 끌어 억지로 넓적바위 위에 앉힌 뒤 가져온 도시락의 뚜껑을 열어 한입 크기의 샌드위치를 그녀의 입에 들이댔다.

“먹어요.”

“나중에.”

“입 벌려요.”

눈썹이 사선으로 치켜 선 것이 안 받아 먹으면 더 화를 낼 것 같아 태리는 결국 순순히 입을 열어 삼켰다. 그리고 몇 번 씹고는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이걸 만든 사람은 맛 고수인가. 너무 맛있어서 그다음 것도, 그 다다음 것도 거절하지 않고 모조리 받아먹었다.

정신없이 반 정도 먹어 치웠을 때에야 혼자만 먹는 것에 뻘쭘해진 그녀가 제가 싸 온 보리빵을 다시 꺼내 들었다. 아까까진 이걸 보여 주는 것에 부끄러움이 없었는데 이제야 뒤늦은 민망함이 느껴졌다.

“총독은 배 안 고파요? 나도 먹을 거 싸 왔는데…… 혹시 이거라도 괜찮다면 먹을래요?”

“절대 아니요.”

“역시 그렇겠죠.”

민망해진 그녀가 잽싸게 도로 넣으려고 하자 한숨을 쉰 클로드가 그것을 강제로 빼앗았다.

“데우면 좀 나을 겁니다. 구워 드리죠.”

그러더니 주변의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서 금세 작은 불을 피워 냈다. 불길에서 멀찍이 띄운 빵을 꼬챙이에 끼워 천천히 굽는 그의 곁으로 태리가 깨끗이 비운 도시락 통을 들고 다가와 앉았다. 냄새가 솔솔 나니 빨리 먹고 싶었다.

“왜 멀리서 약한 불로 구워요? 강불로 지지면 금방 익잖아요.”

그걸 말이라고……. 클로드는 할 말이 무척이나 많은 답답한 표정으로 오랫동안 그녈 바라보더니 심술맞은 대꾸를 내놓았다.

“추울 때 왜 애써서 난로를 피울까요. 그냥 공주님의 몸에 불을 붙이면 금방 따뜻해질 텐데요.”

“그럼 내가 화상을 입으니까 안 돼죠.”

“왜요, 대신 빨리 따뜻해지잖습니까.”

“미안해요. 내 생각이 많이 짧았네요.”

“자꾸 제 머리를 골치 아프게 하지 마십시오.”

말하는 것을 보니 어째서 지금껏 그런 끔찍한 음식들을 먹고도 불만이 없었는지 알 것만 같았지만 클로드는 정말이지 더는 속이 터지고 싶지 않았다.

태리가 또 꿈질꿈질 불 앞으로 이동해 손을 쬐며 말했다.

“그런데 총독 보기랑 다르게 다정한 편인 거 알아요?”

“저 말입니까?”

“응, 몰랐어요?”

“금시초문인데요.”

“이상하네. 왜 그걸 몰랐지? 이제까지 아무도 말을 안 해 줬나 봐요. 너무하네.”

“너무하지도 않고 아쉽지도 않습니다. 전 쌀쌀맞은 성격인 게 좋습니다. 그래야만 다들 절 어렵게 생각한단 말입니다.”

“그치만 그 작전은 실패한 것 같은데요. 말했잖아요, 총독은 다정한 편이라고. 너무 친절하길래 난 솔직히 잠깐이지만 나한테 관심이 있는 줄 알았다니까요.”

“악, 뜨거워!”

잘 굽던 꼬챙이에 클로드가 손을 덴 건 그때였다. 멍청하게 넋을 놓고 한 자리에서 오랫동안 있는가 싶더니 아차 하는 사이, 그는 달궈진 막대기에 약한 화상을 입었다.

그런데도 식힐 생각을 하긴커녕 멍한 표정이라 태리가 대신 벌떡 일어나 두 손 안에 퍼 온 강물을 그의 손등 위에 뿌렸다.

“괜찮아요?!”

“그건 인류애입니다.”

“얼마나 데었는지 좀 봐요.”

“인류애라고요.”

“인류가 뭐라고요?”

“좀 다정한 건 인류애란 말입니다!”

뭐라는 거야. 뜨겁고 따가워서 죽을 텐데 뭔 헛소리야.

“가서 빨리 피부나 식혀요.”

태리가 꼬챙이를 뺏어 그를 불길에서 먼 바깥으로 확 밀어 냈다. 살짝 따끔거리기 시작한 손등을 클로드가 아련하게 문질렀다.

* * *

클로드가 먹고 남은 뒷정리를 하는 사이 태리는 어느새 제법 녹아 흐르기 시작하는 계곡의 물가로 내려갔다.

부츠와 양말을 벗고 발목을 살펴보니 눈에 보이는 외상은 다 아문 상태였다.

꾹 눌렀을 때 약간의 통증이 남아 있긴 했지만 뛰거나 걷는 데에 못 참을 정도로 아픈 건 아니니 돌아가서 간단한 치유 마법을 받으면 완쾌가 될 것 같았다.

그런 세상 편한 마음으로 발목에 물을 끼얹고 있을 때였다. 왠지 옆이 스산하다 했더니 얼굴이 싸하게 굳은 클로드가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치료는 다 된 거고 찝찝해서 피만 닦아 두려는 거예요. 금방 할게요.”

또 혼날 것 같아서 행동을 빠릿빠릿하게 바꾸며 그렇게 얘기했지만 묵묵히 굳어 있는 그의 표정은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거기에 더 뜨끔한 태리는 손길을 더욱 바삐 하며 굳어 있는 피딱지를 떼어 내는 데 열중했다.

그녀가 허둥지둥 고개를 돌리고 나서야 클로드는 느릿하게 입술을 말아 물었다. 오랫동안 깜짝이지 않았던 눈이 시려 오는 것도 그제야 느낄 수 있었다.

왜. 놀라서?

그래, 놀라서였다.

태어나 한 번도 접해 보지 못한 순간이었으니까.

왕족이, 그것도 젊은 공주가 타인의 앞에서 살을 드러내고 제 손으로 피를 닦는 모습을 어디서 보게 될 거라고 상상이나 해 봤을까.

찬물에 섞여 사라지는 탁한 핏물을 보며 그는 말없이 복잡한 생각들을 짓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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