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그러자 엘프는 ‘아, 그럴까?’ 하고 가볍게 운을 띄우더니 불이 꺼진 담뱃대에 빻은 약초를 넣어 다시 연기를 피워 올렸다. 아직 완전히 회복된 상태는 아니긴 한 모양이었다.
“별건 아냐. 네 말대로 뭘 하나 찾는데. 그래, 마술사를 하나 찾거든. 그날 숲에서 너 말고 다른 놈은 없었어? 내가 아주 기분 나쁜 마법에 당했는데 그게 뭔지, 어떤 녀석인지 얼굴을 못 봐서 그래. 인식하기도 전에 당했거든. 제대로 본 건 너 하나더라고.”
“그래서 날 의심하는 거야?”
“말귀 못 알아먹냐? 물어보는 거잖아.”
맞네. 의심하네. 습격을 당했다더니 그는 자신을 용의 선상에 올려 두고 있었다.
“나 말고 다른 사람은 없었어.”
“그래? 그럼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보고 떠오르면 말해.”
없는데 곰곰이 생각해 본다고 무언가가 떠오를 리가 없다. 아무리 봐도 그는 자신을 범인으로 거의 확정하고 있는 듯했다.
업보도 아니고 억울함이 스탯처럼 쌓이는 게 답답했다. 태리는 얕은 한숨을 쉬며 천장 쪽을 무심코 봤다가 그대로 멈칫했다. 천장 어딘가에서 빠져나온 널빤지 하나가 엘프의 머리 위에서 덜렁대고 있는 게 보였다.
저거 떨어질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든 순간 그것은 추락했고 태리는 강한 힘으로 몸을 던져 엘프를 다른 방향으로 넘어뜨렸다.
육중한 무게의 나뭇조각이 귀 옆으로 박히는 소리와 함께 그녀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막을 틈도 없이 눈앞으로 빨려 들어오는 광경에 그만 놀라 버렸다.
처음에는 지척에서 노려보는 서늘한 눈매에 쫄아서 시선을 아래로 도망쳤던 것인데, 가운이 그렇게까지 다 풀어 헤쳐져 있는 줄은 미처 몰랐다.
우아한 턱 아래에는 엘프의 맨 살결이 드러나 있었고, 백옥처럼 매끄럽고 뽀얀 가슴팍 위에 기괴하게 찍혀 있는 낙인이 보였다.
“……!”
저 징그러운 건 뭘까, 하는 상념이 파고들 짬은 없었다. 즉시 허리 쪽으로 뭉툭한 무언가가 살을 누를 정도로 강하게 압박해 왔고 치지직 하며 천이 타는 소리가 들렸다.
“너…… 봤구나?”
생명의 위협은 순식간이었다. 아래에 몸이 깔린 상태로 엘프는 눈을 희번덕하게 뜨며 담뱃대를 그녀의 옆구리에 지져 댔다. 어떠한 예고도 없이.
옷이 그을리며 피부로까지 열이 슬며시 옮겨 붙는 게 섬뜩할 정도였다.
“그냥 지금 죽을래?”
예쁜 입술로 지껄이는 말을 무시하고 태리는 그의 손목을 떼어 내 애써 이성적으로 일어났다.
“아무것도 못 봤는데.”
“어설퍼. 거짓말은 안 하기로 했잖아?”
그래, 어설프다. 이런 걸로는 저런 미친놈의 상대가 안 된다. 작정한 듯이 놈이 이번엔 얼굴 쪽으로 담뱃대를 들이대는 것을 다른 팔로 쳐 내며 태리는 조금 더 현명한 답안을 내놓았다.
“무슨 뜻인지는 몰라.”
그가 살인마처럼 씨익 웃었다.
“그걸 알아봤으면 당장 토막 냈을 거야. 에이, 한 번 봐줬다. 지금은 안 죽이고 살려 줄게. 다음에는 또 어떨지 모르겠지만.”
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죽인다는 건가. 그거 좀 봤다고? 하지만 놈이 살려 준다고 하면 뻗댈 생각 말고 당장 자리를 떠야 한다. 저거는 그냥 도른자니까. 태리는 그 점을 아주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곤 서둘러 물러나려 하자 미친놈이 야, 하고 붙잡았다.
“너, 앞으로는 나 보면 알은척해. 그리고 이름 내놓고 가. 언제고 죽일 녀석을 부를 게 없어서 생명의 보조자라고 부르고 싶진 않으니까.”
당장 살려 보내 주는 건 그 때문인 건가. 본인 생명을 어쨌든 한 번 보조해 줬으니까?
빠른 걸음으로 입구까지 도달한 태리는 그와 자신 사이에 넉넉히 벌어진 안전 거리를 확인하곤 고개를 돌려 엘프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소름 끼치는 미모였고 잘만 하면 사람 하나쯤은 우습게 잡아먹겠다 싶었지만 충분한 거리가 있어서인지 아까보다는 덜 위축이 되었다.
마치 저장하기를 누르면 30초간은 무적 상태의 마음가짐이 되는 플레이어처럼.
그녀는 눌러 왔던 심술을 슬그머니 끄집어 올렸다. 중요한 인물이고 무서운 놈인 건 알겠지만 놈에게 오늘 당했다고 해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당해서는 안 된다는 걸 안다. 그녀의 목표는 언제나 귀향과 생존이었다.
“아무도 이름 못 불러. 다들 공주님이라고 하는데.”
“하하, 지랄 났네.”
지옥의 주둥아리를 가진 사이코는 비웃으며 욕도 서슴없이 했다.
“살아서 안 나가고 싶냐?”
“……태리 어쩌고저쩌고. 그쪽은?”
“율겐 지아니아시모프 샤이어 바다르소벡.”
“바깥에는 그렇게 안 쓰여 있던데.”
“이즈리얼이라고 썼지.”
“어떻게 그렇게 줄여지는 거야?”
“그냥 새로 만들었어. 진짜 이름은 긴 게 좋거든. 그래야 아무도 쉽게 못 부르고 외우지도 못해.”
그랬던 건가. 진짜 이름이 따로 있는 줄은 몰랐다.
‘남이 자기 이름 부르는 걸 싫어한다라.’
태리는 얼른 문을 열어 바깥으로의 탈출로를 확보한 뒤 혹시나 놈이 공격을 하진 않는지 힐끔거렸다. 그리고 나가기 바로 직전에 신속하게 두뇌를 돌렸다.
짧고 굵으며 비참하지 않은 담백한 퇴장에 대하여.
“그럼 이만 가 볼게. 몸 잘 챙기고. 율겐 지아니아시모프 샤이어 바다르소벡.”
그러고는 최대한 힘을 줘서 문을 쾅 닫고 나왔다. 부디 어설프게 고쳐 놓은 경첩이 다시 똑 떨어지기를 바라며.
등 뒤로 엄청난 양의 욕 소리가 들리는 것을 무시하며 그녀가 빠른 속도로 뛰어 도망쳤다.
* * *
창가에 앉은 부엉이의 노란 눈을 바라보며 태리는 한 겹, 두 겹씩 무장했다.
스툴에 발을 올려놓고 워커의 끈을 꼼꼼하게 조여 묶은 뒤, 심장 부근을 보호하기 위해 경량식 쇠사슬 조끼를 착용한다.
코트 안쪽에는 힐링 포션 주사기와 붕대 뭉치를 최대한 많이 쑤셔 넣은 다음 왼쪽에는 총, 오른쪽에는 도끼를 허리 좌우에 꽂아 넣었다.
마지막으로 쇠고랑이 걸린 밧줄을 쏠 수 있는 로프 발사 장치까지 손목에 착용하면 모든 세팅은 완료.
먹다 남은 건조한 빵을 천에 둘둘 말아 주머니에 챙긴 후 창문을 위로 밀고 훌쩍 뛰어내렸다.
역마차를 타고 숲의 입구인 장벽 앞까지 도달한 태리는 시계탑의 초침을 확인하며 잠시 그 앞에서 서성거렸다.
‘왜 안 오지.’
오늘 밤의 사냥 목표는 빙하 계곡에 서식하는 예티 집단이다. 파트너는 언제나와 같이 클로드로 둘이서 5, 6인분의 양을 해치우며 현재 기록적인 스피드로 숲 곳곳을 섬멸해 나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오늘은 약속한 시간이 지나도 그의 모습이 보이지가 않았다.
‘누구한테 걸렸나?’
비밀 계약인 만큼 협동 사냥은 둘만 아는 일이었다. 그래도 속 편한 태리야 대충 밤길에 묻어서 오는 편이었지만 클로드는 부하들이 많아 그러기가 쉽지 않은지 남들의 눈을 극도로 피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8시 5분. 딱 5분을 더 기다린 태리는 먼저 계곡을 향해 들어갔다.
최근의 그녀는 숲 정화에 상당히 진심이 되어 전력투구하고 있는 편이었다.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픽션이라고 이 꼴을 두 눈으로 보면 누구라도 그러지 않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악몽에 나올 법한 기이한 형태의 나무줄기들이 사방으로 뻗어져 있고, 꽃은커녕 푸른 이파리 하나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괴사된 숲이었다.
멀리서 괴조가 까악대며 지나가는 소리에 재빨리 등불을 꺼트렸다.
옷에서 단추 하나를 떼어 내 주문과 함께 부서트리자 허공에 은근한 빛 무리가 생겼다. 한동안 이 빛이 유성 꼬리처럼 제 뒤를 쫓아올 것이다. 안시에게서 배운 오래된 주술의 일종으로 뒤따라올 클로드를 위해 흔적을 남겨줘야 했다.
블링크 마법을 적절히 버무려 숲길을 돌파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계곡 근처에서 예티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숨을 죽였다. 사방팔방으로 번져 있는 걸 보니 최소 한 군락 이상으로 판단되었다.
오늘 밤은 이걸 통째로 날릴 작정.
‘예티는 냉기를 뿜어서 움직임을 둔화시키는 특수 능력이 있었지. 여러 마리가 동시에 덤벼들면 냉동돼서 아무것도 못 해. 그 전에 깡그리 태워 버려야겠어.’
사람들은 거침없이 마수를 소탕해 나가는 공주를 보고 대업적을 세워 간다고 추앙했지만 그녀는 단지 알고 있는 지식을 이용해 철저한 계산을 할 뿐이었다.
사냥감의 숫자가 대략 몇이고 주변 지형은 어떠하며 접근할 수 있는 가장 안전한 경로가 어디이니 그러므로 가장 적합한 사냥 방법이 무엇일지.
불을 질러 머릿수의 평형을 맞춘 후 살아 나오는 놈을 하나씩 저격해서 처치한다, 라는 작전이 결정되자 로프가 바람처럼 나뭇가지 위로 쏘아 올려지면서 얇은 몸이 단숨에 끌려 올라갔다.
나무와 나무 사이를 뛰어넘으며 안쪽까지 이동한 태리는 적절한 위치에서 다시 매처럼 고속 하강해 정찰병처럼 보이는 놈을 위에서부터 도끼로 찍어 암살 처치했다.
그러고는 차분하게 서서 불의 고리를 소환하는 마법식을 허공에 그렸다.
타고난 유전자가 최고라는 말이 맞을 정도로 그녀의 몸속에 농축된 마나는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다. 그래도 아직은 경험이 미숙해 캐스팅을 하려면 이처럼 시전어나 시전 동작이 필요한 단계.
‘됐나?’
손가락으로 마법진을 그리고 완성된 수인을 맺자 고열의 불길이 예티의 거주지를 뱅 둘러싸며 솟구쳤다.
“꾸어어억!”
고통스러워하는 신음 소리와 살이 지글지글 타는 연기가 얼음 계곡을 방어선 삼아 한동안 살벌하게 피어올랐다.
한 번에 손쉽게 숯불 구이가 되는지 지켜보길 얼마쯤, 잠시 후 살아남은 예티 몇몇이 불이 붙은 채로 뛰어나와 태리가 있는 방향으로 힘껏 덮쳐들기 시작했다.
탕탕탕!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샷건을 뽑아내 여러 개의 총알을 부채꼴 모양으로 난사시켰다.
총알이 만든 방어벽에 부딪친 놈들이 주춤하며 돌진을 멈춘 사이 계곡 주변의 울퉁불퉁한 바위로 닌자처럼 뛰어올라 묘기하듯 달린다. 그러면서도 침착하게 한 발, 한 발씩 예티들의 미간과 심장에 마나탄을 명중시켜 나갔다.
마력으로 뭉쳐진 탄환이 거대한 예티의 두개골을 후벼 파고 뇌수를 뽑아내고, 늑골을 파괴하고 들어가 심장을 꿰뚫고 빠져나갔다.
“우어억!”
“아……!”
내려오지 않고 위에서 저격하듯이 쏘아 대는 게 약 올랐는지 마지막 남은 예티가 괴성을 지르며 그녀가 타고 있던 바위를 주먹으로 휘둘러 쳐 부쉈다.
서둘러 피신하려 했지만 순간적으로 디딜 공간을 잃은 하체가 버티지 못하고 아래로 쭉 미끄러졌다.
돌무더기에 발목이 부딪히면서 욱신거리는 통증과 함께 호흡이 턱 하고 막혔다.
‘블링크 마법을 써서 회피했으면 좋았을걸.’
잠시 임기응변이 부족했던 자신에게 혀를 찼지만 태리는 당황하지 않고 코트 안쪽에서 힐링 포션 주사기를 꺼내 허벅지에 퍽 소리가 나도록 내리꽂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