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들켜선 안 될 걸 들킨 것처럼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하지만 이안이 눈치챈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미 그에게 돌아갈 곳이 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은 뒤였으니까.
“네. 그랬어요”
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다시금 물어 왔다.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까. 그분께서.”
나는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느릿한 끄덕임에 이안이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그의 입술이 열리고, 그 사이에서 속삭임이 흘러나왔다.
“가지 않으면, 안 됩니까?”
“…….”
나는 눈을 크게 뜨고 이안을 바라보았다.
이안이 입매를 휘었다. 미소를 짓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잘되지 않아 일그러졌다.
“이기적이라는 건 압니다.”
만들어지다 만 미소를 지은 채 그가 말했다.
“이런 식으로 그대에게 부담을 주면 안 된다는 것도. 하지만.”
가짜 미소는 순식간에 흐려졌다. 지친 눈길을 이안이 아래로 내리깔았다.
“이곳에 남아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대가.”
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이안의 부탁은 담담했고, 꾸밈도 없었다. 감정 과잉 역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 감정의 편린으로 나를 무겁게 하지 않겠다는 것처럼.
그 정적인 부탁이 오히려 더 마음을 조여 왔다.
돌아가고 싶은 이유는 수백 가지도 넘었다. 하지만 여기 남고 싶은 이유 역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중 가장 큰 이유는, 물론 이안이었다.
나는 멍하니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내 세계로 돌아가면, 이안을 더는 만날 수 없다. 책 위에 그려진 활자로만 그를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이안이 아니었다. 내 눈 앞에 있는 이 사람만이 진짜 이안이었다.
이안에게 달라붙은 시선을 떼어내듯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제겐 돌아가야 할 이유들이 있어요.”
“압니다.”
“일단, 그곳이 제가 평생 나고 자라 온 세계이고.”
“…….”
“그곳에서 함께해 온 친구도 있고, 이 세계엔 존재하지 않는 것들도 그쪽엔 많이 있어요.”
“예를 들면, 어떤 것?”
“설명해도 모르실걸요.”
“알 수도 있지 않습니까.”
“모르실 텐데…….”
“말해 보지도 않으시고 어떻게 압니까?”
나는 곤혹스러운 기분으로 눈을 떴다.
지구의 현대 과학이 만들어 낸 기술들은, 개념 자체가 이안에겐 생소할 터였다.
물론 나 역시 이쪽 세계만이 간직한 마법이나 성스러운 권능 같은 것들에 많이 놀라긴 했었지만.
대답 없는 내가 애타는 듯 이안이 재차 말했다.
“말씀해 보십시오. 무엇이 제일 그립습니까?”
“글쎄요. 음. SNS……?”
생각지도 못한 재촉에 나는 얼떨결에 대답했다.
엉뚱한 대답이었다. 나는 SNS를 그렇게까지 열심히 하는 편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그 대답에 이안은 심하게 당황한 것 같았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약자…… 아니에요. 이안 님은 이해하지 못하실 거예요.”
“아뇨.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안이 강경한 태도로 나왔다.
‘이해 못 할 거면서.’
완전히 이해하려면 인터넷이라는 개념부터 알아야 할 텐데. 난감함에 빠진 나는 아주 축소해 설명하기로 했다.
“간단히 말하자면, 사람들과 언제든지 대화하며 놀 수 있게 만들어 주는 기능이에요.”
“살롱에 늘 사람들을 초대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이안의 말에 후후, 나도 모르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역시 이해하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저 대륙 끝에 있는 사람과도 통신할 수 있어야 하는데요?”
“마탑의 전서구 서비스를 이용한다면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그 통신이 전 대륙에 있는 사람들끼리 실시간으로 이루어져야 해요.”
“…….”
이안이 처음으로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정말 가능하냐는 듯, 의구심 어린 눈빛도 함께였다.
“실시간으로, 다 함께 통신을 한다는 말씀이십니까?”
“네.”
나는 당당한 표정으로 이안을 마주 보았다. 설마 내가 거짓말을 하겠냐고 눈으로 말하자 이안의 표정이 시시각각 당황으로 굳어 갔다.
잠시 뒤, 이안이 체념한 듯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고뇌에 잠긴 목소리가 들려왔다.
“마탑주에게…… 후원해 보겠습니다.”
풋.
나도 모르게 잇새로 웃음이 흘러나왔다.
당혹에 잠긴 표정을 짓고 있던 이안이 웃음소리에 나를 바라보았다. 내 웃음소리는 잦아들 줄 모르고 점점 더 커졌다.
결국 아하하, 노골적으로 웃어 버리자 이안의 표정이 몹시 기묘해졌다.
나는 눈꼬리를 훔치며 놀리듯 말했다.
“후원으로 되는 게 아닐걸요? 아무리 마탑주님이라고 해도 단번에 만들어 내는 건 불가능할 거예요.”
“그렇게 대단합니까, 그 기술이?”
“으음, 대단하죠. 대단하긴 해요.”
나는 그렇게 대답하며, 그리운 지구의 현대기술이 아닌 이안에 대해 생각했다.
나를 위해 서슴없이 종일 살롱을 열겠다느니, 그렇게 싫어하는 리젤로에게 후원을 하겠다느니 약속하던 이안에 대해서.
이 사람의 이런 면이 좋았다.
처음 만났을 때는 대관절 존재하는지조차 몰랐던, 그의 다정한 면들.
함께한 일 년 내내 나는 그 다정에 조금씩 스며들어 갔다. 도무지 생색내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라 처음엔 눈치조차 채지 못했지만, 조금씩 조금씩, 가랑비에 옷이 젖듯 익숙해지고 말았다.
“하지만, 이곳에만 있는 기술들도 있기는 해요.”
“그렇습니까?”
이안의 눈빛에 생기가 돌아왔다.
나는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쪽에는 마법도 없고, 성력도 없거든요. 이 세계 치유사들이 주문 한 번 읊어서 상처를 낫게 하는 걸 보면, 우리 세계 의사들은 기절해 버릴걸요?”
“엘룬 교단의 치유사들은 대륙 최고의 치유 능력을 정평이 나 있기는 합니다.”
이안이 진지한 얼굴로 맞장구쳤다.
“죽어 가던 사람도 치유사들의 손길이 닿으면 살아날 수 있죠.”
“그렇다고들 하더군요. 말씀드렸듯 마법 역시 저쪽에는 없어요. 천공섬을 봤을 땐 정말 깜짝 놀랐죠.”
천공섬은 정말 걸리버 여행기 속 삽화에서나 보았던 광경이었다. 나중에 과학이 더욱더 발달되면 어떻게 될지 모르겠으나,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기술인 게 맞았다.
이안이 눈을 빛냈다.
“그럼, 그대 세계에서는 하늘을 나는 게 불가능합니까?”
“아뇨. 그건 아니에요.”
나는 정색하며 대답했다.
“하늘은 날죠. 수백 명이 한 고철 덩어리 안에 갇혀서, 대륙 끝에서 끝을 반나절 만에 주파하기도 해요.”
“…….”
이안의 눈매가 가볍게 일그러졌다. 도무지 아리송하다는 듯한 눈빛에 나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이곳에만 존재하는 신기한 것들도 많은 건 사실이에요. 호화로운 성이나, 성녀들의 신비한 권능 같은 것들이요.”
그리고, 당신이.
이곳에는 당신이 있지.
나는 그 말은 속으로만 삼켰다. 내겐 제일 큰 이유지만, 입 밖으로 내기에는 아직 부끄러워서.
“……신께서는.”
잠깐의 공백 뒤 나는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붉은 달이 뜨는 날, 저를 저쪽 세계로 데려다줄 수 있다고 말씀하셨어요.”
이안은 아무런 말 없이,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으로 속이 울렁거렸다.
나는 지금 이안이 나를 더 붙잡기를 바라는지, 그러지 않기를 바라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무엇도 확실하지 않았다. 머릿속이 얽히고설킨 실타래처럼 복잡하고 어지러웠다.
기묘한 정적이 한동안 우리 사이를 메웠다.
그러던 어느 순간,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단장님. 단장님!”
얼굴을 본 적 있는 기사가 허겁지겁 치유실 앞으로 달려 들어왔다. 나를 발견한 기사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성녀님, 그리고 단장님. 급히 전할 말씀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무슨 일이지.”
이안의 차가운 목소리에 기사가 황급히 외쳤다.
“성하께서, 추기경 승하께서 승하하셨습니다.”
“…….”
이안의 눈이 서서히 커졌다.
“지금 바로 가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 * *
뎅, 뎅, 뎅.
깊고 무거운 종소리가 성당을 울렸다.
나는 검은 옷을 입은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장례복을 입은 사람들의 행렬이 저 아래로 이어지고 있었다. 하나같이 슬픔에 잠긴 얼굴들이었다.
“흐윽, 흐으윽.”
아네트는 거의 우느라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참으려 해도 도무지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런 것은 아네트뿐만이 아니었다.
아네트를 비롯한 내 다른 하녀들도, 성기사들이나 다른 성당 식구들도. 모두 깊은 수심에 잠겨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그분을 얼마 뵙지 못했지만.’
내가 이 세계에 온 시점부터 추기경 성하는 이미 병석에 앓아누운 상태였다.
그 탓에 대면한 적이 없다시피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달랐다.
병색이 깊어지기 전 추기경 성하는 성당을 구석구석 돌보았었다고 한다. 소외되는 식구 한 명 없도록.
추기경의 죽음은 교단뿐만이 아닌 전 대륙의 슬픔이기도 했다. 젊은 시절 그녀의 무력에 은혜를 입은 지역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으니.
“아이린.”
이안이 나를 불렀다.
단둘만 있을 때는 이제 스스럼없이 서연이라는 이름이 입에 붙은 이안이었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여전히 나를 아이린이라 불렀다.
“위험합니다.”
이안이 그렇게 말하며 나를 부드럽게 끌어당겼다. 내가 난간에 너무 바짝 달라붙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며 나는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지금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추기경은 이안이 소년이었을 시절부터 그를 보살펴 준 사람이었다. 친형에게 아버지를 잃은 이안을 받아 주고 키워 준 사람이었다. 그녀가 없었다면 지금의 이안은 없었을지도 몰랐다.
이안의 얼굴은 언뜻, 평상시와 다름없어 보였다.
하지만 나는 그의 눈 밑에 드리운 옅은 그림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