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이안에게 붙잡힌 시선이 거미줄에 얽힌 나비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이안은 나와 마찬가지로 아무 말이 없었다. 마치 이 방 안에서만 시간이 멈춰 있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해.’
나는 다급히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이안에게 들켜 버리고 말 것이었다. 내가 지금 이 상황을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다는 걸.
할말도 없으면서 나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입술이 달싹인 순간이었다.
퍼엉!
커다란 폭발음이 고막을 울렸다.
“으앗!”
화들짝 놀란 나는 중심을 잃었다.
휘청이는 동안 저 멀리에서 사람들의 환호성이 들렸다.
‘아직 불꽃놀이가 안 끝났구나.’
마지막 불꽃을 아주 요란하게 터뜨린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방금 건 너무 심했…….’
속으로 투덜거리던 나는 순간 멈칫했다.
내 몸이 단단한 무언가에 기대어 있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은 것이다.
맙소사. 나는 경악했다.
중심을 잃고 휘청인 내 몸을 이안이 받아 안아준 모양이었다. 따스한 체온이 내 어깨를 감싸 안고 있었다.
“아…… 아.”
나는 바보 같은 소리를 내며 황급히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너무 서두른 탓에 오히려 중심이 더 삐끗하고 말았다.
“읏!”
미끄러지며 나는 이안의 가슴팍에 머리를 박았다. 뺨이 순식간에 새빨개졌다. 이안 앞에서 선보인 때아닌 슬랩스틱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괜찮으십니까?”
이안이 물었다. 진지한 걱정이 담긴 목소리에 더 부끄러워졌다.
“괘, 괜찮아요.”
“전부터 생각한 건데, 몸 가누는 일에는 재능이 없으신 것 같습니다.”
“……냉철한 말씀 고맙네요.”
퉁명스레 대답하던 나는 문득 무언가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이전에도 이안의 품속으로 넘어진 적이 몇 번 있었다.
‘이 정도면 일부러라고 의심받는 거 아니야?’
반대로 생각해도 나 역시 의심스러울 것 같았다. 나는 황급히 고개를 들었다.
“고의는 아니에요. 실수였어요! 이안 님 같은 분은 믿기지 않겠지만 세상엔 저 같은 몸치도 존재한다고요.”
내 입으로 스스로를 몸치라 칭하려니 수치스러웠지만, 솔직히 사실이었다. 나는 긴장하면 할수록 몸을 더 가누지 못하는 습성이 있었다.
고개를 든 바람에 이안과 다시 시선이 마주쳤다. 나를 빤히 내려다보던 이안이 입을 열었다.
“뭐 어떻습니까? 고의였다 해도.”
꿀처럼 진득거리는 목소리로 이안이 말했다.
“부부 아닙니까. 우린.”
가짜 부부잖아요.
그런 말은 입 밖으로 나가지 못했다. 시선이 마주친 순간 어째서인지 나는 다시금 거미에게 붙잡힌 먹잇감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이안의 입매가 슬며시 호선을 그렸다.
저렇게 웃을 줄도 알았던가?
나는 멍하니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이 순간의 그는 고매하신 성기사단장이 아니라 지옥에서 갓 올라온 악마로 보였다.
“그러고 보니 대답을 듣지 못했습니다.”
“…….”
대답? 무슨 대답?
이안의 미소에 홀려 마비된 머릿속을 느리게 더듬던 나는 곧 그의 말뜻을 깨달았다.
아. 설마.
‘그 고백?’
불과 한 시간 전, 이 남자로부터 나는 진지한 고백을 들었다. 이안에게서 들을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직설적인 고백을.
내게 사랑을 말하던 이안을 떠올리자 가슴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심장 소리가 열린 입술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은 아닐지 걱정하면서.
“……지금 당장 대답을 원하는 건 아니라면서요.”
“취소하겠습니다.”
“…….”
“지금 당장 듣고 싶습니다. 그대의 대답.”
고작 한 시간 전의 말을 이안이 순식간에 손바닥 뒤집듯 바꾸었다.
뻔뻔함에 기가 막혔지만 웃음은 나오지 않았다.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며, 이안이 어린아이를 꾀어내듯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대답, 안 해 주실 겁니까?”
나는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지금 당장 대답이 튀어 나갈 것 같았다. 나도 당신이 좋다고, 계속 함께 있고 싶다고 고백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안 돼. 참아.’
하지만 나는 어른이었다. 욕망에 휩쓸려 기분대로 구는 건 졸업할 나이가 되었다.
나는 간신히 그의 눈길을 피하며 말했다.
“……말씀드렸잖아요. 제 상황이 많이 복잡하다는 것.”
“그게 그대 대답을 듣지 못할 이유가 됩니까?”
“되죠.”
자석에 이끌리듯 자꾸만 시선이 이안의 것과 마주치려 했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이안 님과 저는 속한 세계가 다르잖아요.”
“말은 이렇게 통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지만…… 단순히 국적이나 언어가 다른 문제가 아니라는 거, 이안 님도 이제 이해하시잖아요.”
좋아하는 사람과 마음이 통했다고 단순하게 기뻐하기만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우리를 둘러싼 상황은 그러기엔 복잡한 요소가 산재해 있었다. 나와 이안의 관계는 미래가 불확실했다.
“솔직히 말하면, 네.”
나는 여전히 눈을 꼭 감은 채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
다시 한번 입을 열 때는 입술이 마치 천근처럼 느껴졌다.
“저도, 이안 님이, 좋아요.”
간신히 속엣말을 뱉어 낸 나는 크게 숨을 내쉬었다.
고작 몇 글자짜리 말을 토해 낸 것뿐인데, 아주 커다란 것을 내뱉은 것처럼 가슴이 울렁거렸다.
“정말입니까?”
뒷말을 잇기도 전, 이안이 득달같이 물어 왔다.
나는 떨림을 억누르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진심이에요.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에요. 말씀드렸듯-”
“한 번만 더.”
내 말을 끊고 이안이 말했다.
간결한 부탁에는 갈급함이 묻어 있었다.
“다시 한번 더, 말해 주십시오.”
뒷말이 더 중요한데.
나 역시 당신을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단순히 마음이 이어졌다고 기뻐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려 꺼낸 이야긴데.
이안은 내 속도 모르고 고백을 되풀이하기를 요구했다.
나는 휩쓸리지 않기로 마음먹고 거절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순간 속삭임이 들려왔다.
“한 번이면 됩니다. 서연.”
……이름을 부르는 건 반칙이었다.
나는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내 손으로 이안에게 이서연 제어 스위치를 넘겨준 기분이었다. 내 이름이라는 스위치를.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부드러운 손가락이 아랫입술을 쓰다듬어 왔기 때문이다.
엄지로 깨물린 아랫입술을 풀어 준 이안이, 지옥에서 올라온 악마처럼 속삭였다.
“서연?”
‘이건 정말 반칙이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속절없이 입술을 열었다.
뇌의 명령은 이제 더 이상 신체에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좋아, 한다고요.”
두 번째로 고백하려나 뺨이 절로 화끈거려왔다.
“좋아하고 있다고 말씀드렸어요.”
“누구를?”
이렇게 힘들게 되풀이했건만, 이안은 뻔뻔하게도 계속해서 물어 왔다. 갈증 어린 목소리에 나는 이번에도 별수 없이 입을 열었다.
“당신을요. 당신. 이안 에스테반. 당신이 좋다고요! 또 말해 달라고 하면-”
나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뜨거운 열기가 내 입술을 덮쳐 왔다.
순식간에 호흡이 곤란해져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다. 그러자 타인의 살덩이가 숨 막히도록 감겨들어 왔다.
“흐, 읍.”
델 것 같은 열기에 머릿속이 녹아들었다.
말캉거리는 것이 내 입천장을 쓸고 혀끝을 감아올렸다. 다리에 힘이 풀리는 순간 이안의 팔이 내 허리를 안아 들었다.
“흣…….”
순식간에 호흡을 모두 뺏겨 버린 나는 이안의 어깨를 두들겼다.
그러나 그는 물러나기는커녕 더 깊숙이 나를 끌어안았다.
밀착된 이안의 체온이 너무하도록 뜨거웠다. 열병에 잠식된 것처럼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머릿속에선 그저 아까 보았던 불꽃만이 펑펑 터져 나갔다.
“아이린.”
살짝 떨어진 입술 사이로 이안이 속삭였다.
“아이린. 아이린. ……서연.”
그가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안쪽 깊은 곳이 만져진 것처럼 몸이 떨렸다.
이안의 입술이 탐욕스럽게 내 숨을 앗아갔다. 그의 손바닥이 내 어깨선과 등을 쓸어내렸다. 어깨가 나도 모르게 흠칫흠칫 튀어 올랐다.
“기분이, 안 좋으면.”
잠깐 입맞춤이 멈춘 사이 이안이 말했다. 속삭임에 입술이 간질거렸다.
“언제든 말씀하셔야 합니다.”
말의 내용과 달리 목소리에는 여유가 사라져 있었다.
이런 목소리도 낼 줄 아는구나. 당신은.
이번에 나를 뒤덮은 건 몸이 아닌 정신적인 쾌감이었다. 아무도, 전장에서 함께 싸운 동료들조차도 이안의 이런 목소리는 들어 본 적 없을 것이다.
나는 눈을 떠 이안의 얼굴을 시야에 담았다. 붉게 달아오른 눈가나 살짝 부은 입술이 예뻤다. 이런 모습을 아는 건 나뿐이었다. 오직 나.
“약속할게요.”
나는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기분이 안 좋아질 일은 없을 것 같았지만, 대답하지 않으면 이안이 계속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제가 그런 말을 할 일이 없도록…….”
나는 이안의 팔을 끌어당기며 말했다.
“부드럽고, 상냥하셔야 해요. ……알겠죠?”
허락의 말을 내뱉자마자, 작게 헐떡이는 소리와 함께 단단한 몸이 나를 끌어안았다. 다시금 입술이 겹쳐지며 정신을 온통 혼미하게 하는 입맞춤이 이어졌다.
“읏!”
키스에 열중해 있던 나는 어느 순간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몸이 붕, 허공으로 떠올라 있었다. 정신 차린 나는 이안이 내 몸을 안아 들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놀란 눈을 들자 이안과 시선이 마주쳤다. 이안의 입술이 부드럽게 움직였다.
“혹여 제가 선을 많이 넘으면…….”
목소리 끝에서 설탕을 녹인 듯한 달콤함이 뚝뚝 떨어졌다.
“약속대로 말려 주셔야 합니다. 부인.”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기분으로 멍하니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짙은 남빛으로 가라앉아 있는 눈동자를 들여다보자 오싹 소름이 끼쳤다.
“내가 내 욕심대로만 하지 않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