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침묵이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시간의 흐름이 아득하게 느껴질 정도로 기나길었던 몇 초 이후, 마침내 이안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이게, 오늘 당신께 드리려던 말씀입니다.”
“…….”
“가지 말아요.”
입을 틀어막힌 것처럼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바보처럼 입술만 더듬거리며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이안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내 대답을 기다리겠다는 듯.
‘떠나지, 말라고.’
간단한 부탁이었다.
그래서 더 가슴이 덜컥였다.
그 부탁엔 내가 떠나면 안 되는 이유가 조금도 들어 있지 않았으니까.
내가 사라지면 이안의 입지가 흔들린다거나, 내가 남아서 성녀로서 영향력을 발휘해 줄 필요가 있다거나.
이외에도 이안에게 아이린 그레이스라는 인물이 필요한 이유는 얼마든지 존재했다. 내가 그의 곁에 머문 시간만큼 그것들은 계속해서 늘어났으니까.
하지만, 그런 납득 가능한 이유들을 이안은 전혀 늘어놓지 않았다.
마치 특정한 이유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는 것처럼.
“…….”
심장이 펌프질당한 것처럼 빠르게 달음박질쳤다.
한참 동안 머뭇거리던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어째서요?”
그렇게나 오래 뜸 들인 것치고는 참 형편없는 대답이었다.
목소리마저 염소처럼 떨렸다.
창피해서 얼굴이 붉어질 지경이었지만, 나는 애써 피하지 않고 이안의 시선을 마주했다.
나를 지그시 내려다보던 이안이 대답했다. 나지막한 목소리가 그의 입술 사이로부터 흘러나왔다.
“아이린.”
한숨을 토하듯 그가 내 이름을 불렀다.
가슴이 제어 불가능할 만큼 뛰어댔다.
이다음 말을 듣는 건 위험하다. 본능이 그런 경고를 해 왔다.
하지만 나는 못박인 것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선 채 하염없이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당신이 좋습니다.”
내 눈이 천천히 커다래졌다.
단순한 일곱 글자짜리 말이 귓가에 제대로 들어오지 않았다.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이안이 이어 말했다.
“그대를 생각하면 가슴이 뜁니다. 시야에서 사라지면 옆에 붙잡아 놓아야 할 것 같고, 그대가 슬픈 표정을 지으면 나 역시 아파집니다.”
멈추지 않고 이어지는 실토에 숨이 가빠왔다.
한참 이야기하던 이안이, 미간을 살짝 좁힌 채 심각해 보이는 표정으로 말했다.
“이런 기분을 세간에서는, 사랑이라고 하던데.”
마치 그 말을 처음 배운 사람처럼 이안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발음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 그대도 내 감정을 이해해 주시겠습니까?”
나는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내가 듣고 있는 모든 말이, 이 상황 자체가 현실감이 없었다.
‘사랑?’
불꽃에 정통으로 얻어맞은 것처럼 그 단어가 나를 강타했다.
‘이안이 나를 사랑한다고?’
기억 속 이안의 모습들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다.
나를 구하기 위해 달려오던 모습.
밤새도록 나를 간호해 주던 모습.
숨도 쉬기 힘들 만큼 깊이 키스해 오던 모습.
증거 자료가 제시되듯 장면들이 하나하나 머릿속을 밝혔다가 사라졌다.
그런데도 나는 여전히,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말도 안 돼.’
부정에는 아무런 논리도 없었다.
다만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그 역시 나를 사랑한다는 사실이.
‘꿈, 일까?’
나는 영혼을 잃어버린 사람처럼 멍한 눈으로 이안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이안의 푸른 눈은 아무런 재촉 없이 그저 나를 마주 보았다.
그가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어떤 식으로든 이제 반응을 보여야 한다는 것도.
하지만, 지금의 나는 손가락 하나조차 움직이고 싶지 않았다.
그랬다간 환상에서 깨어나듯 이 순간을 잃어버릴까 봐.
내 침묵을 무어라고 해석한 걸까.
나를 지그시 응시하던 이안이 이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지금 당장 대답을 원하는 건 아닙니다. 갑작스러운 말에 그대도 놀라셨을 테니.”
스스로를 납득시키듯 이안이 느리게 말을 이었다.
나는 그제야 정신이 들었다. 언제까지고 넋을 놓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대답을, 해야 해.’
할 수 있는 말은 간단했다. 내 마음을 이미 명확히 알고 있었으니까.
‘나도 당신을 좋아해요. 마음이 같다니 기쁘네요.’ 하고 단순히 외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나는 당장이라도 이안에게 닿고 싶어 하는 손가락을 애써 억누르며 입을 열었다.
그 전에 나는 이 사람에게 반드시 해야만 하는 말이 있었다.
“이안 님.”
이안의 눈이 살짝 커졌다.
나는 살며시 심호흡을 한 뒤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제가 돌아가려고 하는 곳이 어디인지, 모르시죠.”
“그대의 고향 말입니까?”
이안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네. 모릅니다.”
“알아봐도 실마리가 될 만한 게 없었을 거고요.”
“예.”
내 뒷조사를 했다는 말을 이안이 당당히 했다. 우리의 첫 만남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알려 드릴게요.”
나는 크게 숨을 뱉고는 선언하듯 말했다.
이안의 눈이 조금 더 커졌다.
“정말입니까?”
“네. 제 고향은 말이죠.”
이안이 내 입술만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괜히 입술이 간지러워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말을 꺼냈다.
“다른 별이에요.”
“…….”
이안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자기를 놀리는 게 아닌지 가늠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하긴. 믿기 힘든 이야기겠지. 나는 한숨과 함께 덧붙였다.
“아니지. 다른 별인지 어딘지도 모르겠어요. 아예 다른 우주일 수도 있고.”
“……아이린. 미안하지만 그대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전혀 모르겠습니다.”
“으으. 대체 이걸 어디부터 설명해야 하지.”
나는 이마를 거세게 문지르며 끙 앓은 뒤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지금부터 제가 무슨 말을 하든, 절대 헛소리 취급은 하시면 안 돼요.”
그제야 내가 농담 중이 아니라는 것을 확신한 건지, 이안이 덜컥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네. 알겠습니다.”
“절대로.”
“절대로.”
“하아…… 좋아요.”
나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이 세계로 온 뒤, 이곳 사람에게 나의 진실을 털어놓게 될 날이 올 줄은 몰랐었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꽃놀이가 끝나면 다시금 주점에 사람들이 들어찰지도 몰랐다.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기고 싶어요.”
“……가시죠.”
이안이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 * *
호텔 리체 2호점의 스위트룸에 들어선 이안은, 등 뒤로 문을 닫자마자 참았던 숨을 토하듯 물어 왔다.
“이제 말해 줄 수 있습니까? 아이린.”
“……사실은, 이름부터 틀렸어요.”
“예?”
이안이 눈살을 찌푸리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
“반쯤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대의 본명이 아니리라는 것 정도는.”
“진짜 이름, 알려 드릴까요?”
“네.”
간결한 대답과 달리 이안의 눈빛은 꽤나 진득했다.
나는 몹시 어색한 기분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이서연.”
내 이름 석 자를 입 밖으로 발음해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이서…….”
이안의 표정이 멍해졌다. 누가 뒤통수를 한 대 때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표정에 나는 어울리지 않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풋 웃음을 터뜨렸다.
“발음이 생소하죠?”
“다시 한번 말해 주십시오. 이번엔 기억하겠습니다.”
진지한 얼굴로 이안이 말했다.
글쎄. 두 번 말한다고 단번에 기억할까 싶다.
나는 별 기대 없이 다시 내 이름을 말해 주었다.
“이서연, 이요. 이름이 서연이고 성이 이, 예요. 이쪽 이름과는 순서가 반대죠?”
“이서연.”
나는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안의 발음이 기대보다 훨씬 더 정확했다.
“……다시, 다시 말해 보세요.”
“틀렸습니까?”
이안이 긴장한 표정으로 말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런 거 아니니까, 다시요.”
“이서, 연.”
이안이 곤혹스레 미간을 좁히며 생소할 발음을 다시 한번 입에 담았다.
“성이, 이…… 이름은 서연.”
세상에서 처음 듣는 수학 공식을 외듯 이안이 신중히 내 이름을 되뇌었다.
“서연.”
그렇게 말하며 이안이 나를 마주 보았다.
순간 심장이 쿵, 바닥까지 내려앉았다.
‘진정해.’
진정하자, 이서연.
고작 이름을 불린 것뿐이었다.
그런데 가슴이 그 어느 때와 비교되지 않을 만큼 빠르게 박동했다.
‘발음을 왜 저렇게 잘하는 거야!’
너무 완벽하게 내 이름을 부르니까, 각오했던 것보다 더 심장이 놀라고 말았다.
‘구강 구조까지 사기인 인간 같으니라고.’
“확실히 독특한 이름이기는 하군요. 서연. 서연.”
연구에 골몰한 학자처럼 이안이 천천히 내 이름을 되풀이했다. 그때마다 내 몸이 움찔움찔 굳었다.
“그, 이름은…… 그만 불러요.”
나는 곤혹스레 중얼거렸다.
고작 이름을 불리는 게 이렇게 설레는 일인 줄 미처 몰랐었다.
“발음이 이상합니까?”
이안이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렇다고 했다간 이름을 안 부르는 게 아니라, 연습하겠답시고 더 부를 것 같아서 나는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아뇨. 완벽해요.”
“그런데 왜.”
그러게.
이름을 불리는 것 따위로 이렇게까지 동요하는 걸 보면, 내가 이안을 많이 좋아하고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말해 줄 수는 없었다. 아무튼, 지금 당장은.
그래서 나는 얼버무리듯 말을 돌렸다.
“이름이 이렇게 특이한데, 어디 출신인지 궁금하지 않나요?”
“궁금합니다.”
이안이 득달같이 대답해 왔다. 진지한 눈빛은 마치 학구열 넘치는 우등생 같았다.
나는 천천히 머리를 쓸어넘기며 어디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가늠해 보았다.
“좋아요. 무엇부터 설명해야 할지 감이 안 오긴 하지만…….”
“천천히 말씀하시죠. 시간은 많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안은 밤을 새우자고 해도 흔쾌히 동의할 기세였다.
나는 끄응, 앓듯이 신음하곤 이야기를 시작했다.
“제 고향은 말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