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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1화 (141/161)

141화

“말해 주십시오.”

이안이 속삭이듯 말했다.

“어떻게 하면 그대 화가 풀릴지.”

“…….”

나는 입을 앙다문 채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솔직히 말하면, 이미 화는 반쯤 풀린 상태였다.

‘저런 눈으로 쳐다보는데 어떻게 계속 화를 내.’

젠장. 나는 꾹 눈을 감았다.

좋아하는 쪽이 언제나 약자라더니. 그 말이 꼭 맞았다.

‘제대로 화도 못 내고…… 이건 너무 불공평해.’

벌써 화가 눈처럼 녹아 버렸단 사실을 이안에게 들키고 싶진 않았다.

내가 눈 감은 채 아무런 말도 하지 않자, 이안이 다시금 말을 걸어왔다.

“아이린. 저 안 볼 겁니까.”

내 손목을 잡고 있던 이안의 손가락이 피부 위를 살짝 쓰다듬었다.

간지러움에 나도 모르게 눈을 뜬 순간, 나를 직시하는 푸른 눈동자와 정면으로 시선이 마주쳤다.

“다짜고짜 오해부터 한 것, 죄송합니다.”

태어나서 사과라곤 입에 담아 본 적도 없을 것 같은 남자가 서슴없이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어색한 상황에 내 입술이 저절로 달싹거렸다. 그걸 뭐라고 해석했는지 이안이 내 손목을 더 꼭 쥐었다.

“어떻게 하면 용서해 주실 겁니까?”

심해처럼 깊은 눈으로 이안이 나를 지그시 응시해 왔다.

망할.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하필이면 얼굴까지 잘난 사람을 좋아하게 될 건 뭐람.

안 그래도 첫사랑이라는 명목하에 이안에게 한없이 약해진 나인데, 얼굴 공격까지 당하니 맥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건 도무지 방법이 보이질 않았다. 별수 없이, 반항한 지 고작 오 분 만에 나는 항복을 선언했다.

“알겠어요. 하아.”

짙은 패배감을 느끼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은 특별히 봐 드릴게요. 뭐, 전혀 오해의 여지가 없는 상황은 아니었으니까요.”

“정말입니까?”

“네.”

“정말 용서해 주시기로 한 겁니다.”

“그렇다니까요.”

내가 다시금 고개를 끄덕인 순간이었다.

“그럼 이제 왜 여기까지 도망친 건지 이유를 들어 보죠.”

순식간의 일이었다. 용서를 얻어내자마자 이안의 태도가 돌변했다.

마치 상사가 부하에게 보고를 요구하듯, 이안이 딱딱하기 그지없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사기당했다.’

배신감에 몸을 떨며 나는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기에, 낮에만 해도 대화하자는 약속에 고개 끄덕인 사람이 몇 시간 만에 달아난 겁니까?”

“달아나다니요.”

“달아난 게 아니면 뭐라고 표현합니까.”

이안이 차디찬 목소리로 말했다.

“경로를 세탁까지 해 가며 도망 다니지 않았습니까?”

“세탁이라뇨? 제가 무슨 범죄라도 저지른 것 같네요!”

“묵기로 했던 호텔이 아니라 다른 곳에 계셨잖습니까.”

“무슨 말씀이세요? 호텔 리체에서 묵을 거라고 분명 떠나기 전에 적어 놓았…… 아.”

문득 떠오른 사실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만 번째 손님!’

그러고 보니, 그런 이벤트에 당첨되는 바람에 나는 현재 리체 호텔 1호점에 묵고 있지 않았다.

‘그것 때문에 엇갈렸구나.’

숙소가 바뀌었다고 성당에 연락을 취하는 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했다.

내 실수를 깨달은 나는 슬쩍 손가락을 꿈지럭거렸다.

이안이 그런 나를 서릿발처럼 차가운 눈초리로 내려다보았다.

어디 변명할 테면 해 보라는 듯.

‘아니, 태세 전환이 이렇게 순식간이어도 되는 거야?’

이럴 줄 알았으면 그렇게 쉽게 용서해 주지 말 걸 그랬다.

다시금 억울한 마음이 들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지금은 해명이 우선이었다.

“일부러 다른 호텔로 옮긴 게 아니에요. 만 번째 손님이라면서 지배인이 절…….”

나는 이안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주었다.

내 다급한 설명이 받아들여졌는지, 꽁꽁 언 서리 같던 눈매가 그제야 조금은 풀어졌다.

“하.”

이안이 기가 찬 헛웃음을 뱉었다.

“애초에 여행을 가고 싶다고 내게 먼저 이야기했다면 이런 일도 생기지 않았을 것 아닙니까. 그랬다면 스위트룸이고 뭐고 호텔을 통째로 빌릴 수도 있었을 텐데.”

“무슨…… 됐어요. 그런 사치를 부리려고 떠난 여행이 아니란 말이에요.”

이안의 무시무시한 말에 나는 식은땀을 흘렸다.

날 때부터 황족이었기 때문인지, 과연 씀씀이가 범상치 않은 인간이었다.

“아무튼, 해명은 충분히 되었겠죠? 일부러 제 행적을 감추려고 다른 호텔에 묵은 게 아니에요.”

“이해됐습니다. 그 부분은.”

“…다른 부분도 있나요?”

“아직 근본적인 물음엔 대답해 주지 않지 않으셨습니까.”

근본적인 물음?

의아한 눈으로 이안을 올려다보자, 그가 나직이 한숨을 내쉬곤 말했다.

“애초에 왜 성당을 떠나야겠다고 마음먹었던 건지.”

“아.”

나는 멍하니 입술을 벌렸다.

……그 이유에 대해선, 방금처럼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없었다.

‘널 좋아하게 됐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너무 놀라 도망쳐 온 거라고, 어떻게 말해.’

이 세계로 온 뒤 아무리 뻔뻔함이 늘었다지만, 그런 말을 좋아하는 사람 면전에 다짜고짜 늘어놓을 순 없었다.

내가 말이 없자 이안의 눈빛이 어두워졌다.

“대답해 주지 않을 겁니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어요.”

나는 숨을 토하며 대답했다.

“생각할 게 많았거든요. 큰일도 마무리된 시점이고, ……무엇보다, 저희 계약도 이제 곧 끝나 가니까.”

이안이 몇 초 동안 아무런 말 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 이유 때문입니까.”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안의 부하들이 손써 준 덕에, 지금 우리 곁엔 사람이 남아 있지 않았다. 덕분에 제삼자에게 대화가 들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이안 님의 목적은 이제 달성되었지만, 제 목적은 지금부터 시작이에요.”

“그대의 목적?”

“이안 님만큼은 아니겠지만, 제 목적도 꽤 골치 아픈 종류거든요. 이룰 수 있을지 고민이 많았어요.”

“무슨 목적이기에.”

“그건, 지금은 말씀드릴 수 없어요.”

아니, 어쩌면 앞으로도 영영 말할 수 없을지 모르지만.

이안이 복잡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런 고민이 있다고 내게 말한 적 없지 않습니까.”

“바쁘셨잖아요.”

생각하기도 전 말이 먼저 나갔다.

나는 변명하듯 덧붙였다.

“제가 잠든 뒤에나 침실에 겨우 돌아올 만큼 바쁘셨으면서.”

이게 아닌데.

이렇게 투정이라도 부리듯 말하려던 것이 아니었다.

이안이 요즘 바쁜 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고, 난 거기 불만을 가질 만한 관계가 아니었으니까.

‘입이 왜 멋대로 움직이지.’

곤혹스러워진 나는 방금 말을 취소하려 했다.

그러나 이안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바빴죠.”

“…….”

깔끔한 인정에 할 말이 없어져 버렸다.

이안이 나를 쌀쌀히 내려다보며 이어 말했다.

“그 와중에 시간을 내자마자 사라진 사람은 그대 아닙니까. 계약 기간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이안의 말속에는 가시가 단단히 박혀 있었다.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지만, 솔직히 말하면 그렇게 보일 여지가 충분했기 때문에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제 불찰이긴 합니다. 부인께선 본인이 감시가 필요한 타입이라고 확실히 말씀하셨는데. 그래도 제가 시간을 내지 못하게 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사라져 버리실 줄이야.”

“……이안 님이 바빠지기만을 기다렸던 건, 정말로 아니에요. 그저 말씀드렸던 제 오랜 고민 때문에 마음이 복잡해졌던 것뿐이에요.”

“대체 무엇입니까? 부인께서 계속 말씀하시는 그 고민이.”

더 이상 참기 힘든 듯 이안이 물어 왔다.

나는 푹 고개를 숙였다.

“……말씀드릴 수, 없어요.”

뭐라고 말을 할까.

내가 실은 여기가 아닌 다른 세계 출신이라고?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은데, 여기 사람들과 정이 너무 많이 들어 버려서. 그리고 무엇보다 당신을 좋아하게 되어 버려서, 헤어질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고? 그렇게 과연 말할 수 있을까?

“털어놓을 수 없는 겁니까, 내겐.”

이안이 어두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래. 좋습니다. 말하지 않겠다는 걸 억지로 들어낼 수는 없겠지요.”

억눌린 듯 건조한 목소리로 이안이 말했다. 나는 말없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냥 이것만 묻겠습니다. 그 정체 모를 고민에 대해 이 도시에서 혼자 골몰하다, 결론이 나면 홀연히 떠나 버릴 계획이었습니까?”

“…….”

나는 여전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어쩌면 이안의 말이 맞을지도 몰랐다.

나는 이안과 달리 평범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고, 그만큼 겁도 많았다.

내가 과연 마지막으로 이안을 보고 작별 인사를 고할 용기를 낼 수 있었을까? 확답할 수 없었다.

내가 계속해서 대답하지 않자, 이안이 짧게 헛웃음을 토했다.

“그래. 그럴 생각이었습니까.”

“…….”

“그렇다면 그때는 그나마 편지 한 통조차 없이 당신을 잃어버려야 했겠군. 맞습니까?”

나는 입 안쪽 살을 씹으며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대답할 말이 없었다.

침묵하는 내게 이안이 계속해서 말했다.

“대충 대답은 알아낸 것 같지만, 그래도 그대 입으로 듣고 싶군요.”

“…….”

“정말 그렇게 떠나 버릴 계획이었던 게 맞습니까?”

이안이 뚫어져라 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마치, 아니라고 대답해 주길 바라는 듯한 눈으로.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생각이 전혀 정리되지 않았지만, 언제까지고 침묵만 지킬 수는 없었다. 이제는 어떻게든 대답을 돌려주어야 했다.

“……잠시. 잠시만요. 잠깐 생각을 좀 정리할게요.”

나는 도망치듯 이안에게서 물러났다.

이안의 팔이 닿지 않을 만큼 훌쩍 멀어진 나는 심호흡을 했다. 이안이 그런 나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솔직해져야 할까.’

저렇듯 단도직입적으로 묻는 이안에게 거짓말은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어디까지 솔직해져야 할까. 어디까지 그럴 수 있을까.

간절히 고민하던 때였다.

“아이린 님!”

난데없이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본 나는 반대편 뒷문으로 들이닥치고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루시안 씨?”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루시안이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내 앞에 도착했다.

“여기, 헉, 계셨군요. 후욱, 세상에, 성녀님을 어찌나 찾았는지요!”

“괜, 괜찮으세요? 물이라도 좀…….”

“아닙니다. 이제라도 성녀님을 찾았으니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성녀님, 대체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그렇게 훌쩍 떠나 버리셔서 다들 얼마나 걱정했는지요!”

루시안의 눈이 일렁거렸다. 상처받은 강아지 같은 눈빛에 절로 가슴이 찔려 왔다.

“죄송해요. 난 다들 그렇게까지 걱정할 줄은 모르고.”

“단장님께 화가 나신 게 있으셨던 거지요, 성녀님?”

“아, 아닌데요.”

“솔직히 말씀해 주세요. 그게 아니라면 단장님께 눈물 젖은 편지를 남기셨을 리 없지 않습니까!”

아니, 도대체 이안도 그렇고 왜 다들 내가 울면서 편지를 썼다고 생각하는 걸까?

얼토당토않은 오해에 기가 막혀 말을 잊자, 루시안이 계속해서 말했다.

“단장님께서 그 편지를 보고 어찌나 넋이 나가셨는지요! 그 뒤로는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루시안이 난데없이 하소연을 시작했다.

“모든 걸 내팽개치고 성당을 박차고 나간 단장님은 이 도시를 말 그대로 쥐잡듯 뒤지고 다니셨다고요! 성녀님이 리체 호텔에 없다는 걸 안 순간부터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셨죠.”

숨이 달리는지 거세게 심호흡한 루시안이 이어 말했다.

“그때 그분을 성녀님께서 보셨어야 하는데…… 단장님께서 무슨 잘못을 하신 건진 모르지만, 아마 그분도 단단히 후회하고 계실 겁니다. 아이린 님!”

루시안이 돌연 비장히 외쳤다.

“단장님께서 빌어서라도 성녀님을 데려오라고 하셨습니다. 최대한 애원해 보라고…… 지금 명령을 이행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한 루시안이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맙소사.’

내가 지금 뭘 보고 있는 거지.

나는 넋이 나가 입을 벌린 채로 루시안을 내려다보았다.

“이, 일어나세요!”

“다시 생각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아이린 님? 단장님은 지금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십니다. 그간의 정을 봐서라도 이상해지신 그분을-”

“루시안.”

악마처럼 음산한 목소리에 루시안이 펄쩍 뛰었다.

그제야 주점 조명이 닿지 않는 어두운 곳에 서 있던 이안을 발견한 모양이었다.

“다, 단장님?!”

루시안이 넋 나간 목소리로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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