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화
“네. 잘 구경했어요.”
“언제든지 또 들러 주세요! 말씀드렸듯 단장님께서 성녀님께는 모든 서적 열람을 허가하라고 특별히 당부하셨으니까요.”
“네, 감사해요.”
희미하게 웃은 뒤 나는 도서관을 나섰다.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걷는 내게 마주치는 사람들의 시선이 쏟아졌지만, 이번에는 그들의 수군거림에 신경이 미치지 않았다. 그럴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아이린 님! 이제 돌아오세요?”
방으로 돌아가자 아네트가 반가이 나를 맞아 주었다.
나는 입가에 가벼운 미소를 짓고, 여기까지 오는 내내 결심한 것을 말했다.
“아네트 양, 아무래도 바람을 좀 쐬고 와야겠어요.”
“아, 그러시겠어요? 아직 해가 저물지는 않았으니까 가볍게 피크닉을 다녀올까요? 도시락을 싸 달라고 주방장님께 부탁할게요!”
“도시락은 괜찮아요.”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나 혼자 다녀올게요. 한, 으음. 사나흘 정도?”
“네?!”
아네트의 눈이 동그래졌다.
“사나흘이나요? 그건 피크닉이 아니네요?”
“그렇죠. 가벼운 여행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겠네요.”
“여행…… 이요?”
갑작스러운 듯 아네트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좀 필요해서요.”
“아…… 네. 그렇죠. 충분히 필요하실 만해요.”
아네트가 크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최근 겪은 큰일들을 떠올리는 듯했다.
“그러시면, 근교로 가벼운 여행을 다녀오시는 것도 좋겠네요!”
“추천하는 곳이 있나요?”
“음, 메이우드는 어떠신가요? 지금이면 한창 단풍으로 도시가 통째로 예쁘게 물들어 있을 거예요.”
메이우드라면, 내가 기억하기로 수도 바로 옆에 있는 도시였다. 수도에 오가는 사람들을 상대로 먹고사는 관광 도시로, 도시 전체가 아기자기하고 아늑히 꾸며져 있기로 유명했다.
“좋아 보이네요. 거기로 다녀올까 봐요.”
“잘 생각하셨어요. 저도 작년 휴가 때 메이우드를 다녀왔는데, 엄청 즐거웠거든요! 곧바로 떠나실 건가요?”
“네. 곧장.”
나는 단호히 대답했다.
말 그대로 지금 당장 떠나고 싶었다. 시계를 돌아본 나는 살짝 초조한 기분을 느꼈다. 벌써 해가 저물어 가는 시점이었다. 언제 이안이 돌아올지 몰랐다.
죄를 지은 것도 없는데 왜 도망치는 죄수 같은 심정이 드는 걸까. 나는 쓰게 웃었다. 소연이가 그랬었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다는 건 곧 멍청해진다는 것과 같은 말이라고.
진지하게 대답하는 내게서 무언가를 느꼈는지, 아네트가 사명감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준비할게요, 아이린 님. 가벼운 드레스들이랑, 여행 물품들을 챙겨 드릴 테니 꼭 가져가세요!”
“고마워요. 아네트 양.”
아네트가 분주히 준비해 주는 동안, 나는 협탁 속에서 편지지를 꺼냈다.
고급스러운 순백색 편지지 제일 위에는 이안의 이름을 썼다.
「이안 님께.」
그런 서두로 시작하며 나는 펜을 끄적거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상태로 이안의 얼굴을 마주하는 건 무리였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언제나 약자라고 했다. 지금 이안과 이야기하면 틀림없이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한 채 바보처럼 횡설수설할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흘이나 성당을 떠나 있을 건데 인사 하나 두고 가지 않을 순 없었다.
「갑작스러운 편지 죄송해요.
저는 최근 겪었던 여러 가지 일들로 인해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껴, 성당을 떠나 있으려 합니다.
오늘 밤 만나기로 했던 약속 지키지 못하는 점, 다시 한번 사과드립니다.」
“이런, 만년필이…….”
만년필이 삐끗거리는 것을 느끼며 나는 당황했다.
그도 그럴 것이, 샤프와 연필이라는 문물만 써 온 내겐 만년필이란 도구를 써 본 경험이 전무했다.
이 세계로 온 이후로도 글을 쓸 일이라고는 초대장에 간단히 답장할 때밖엔 없었다.
처음으로 긴 편지를 쓰려니 만년필에 익숙하지 못한 손이 자꾸만 삐뚤거렸다.
“손 아파…….”
투덜거리면서도 나는 열심히 편지를 마저 작성했다.
「조안 경과 함께 갈 테니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위험한 곳은 가지 않을 거니까요.」
“아이린 님! 나들이 드레스는 이쪽이 좋으세요? 아니면 이 옷이 더 편하실- 어머나!”
창가를 바라본 아네트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비가 오네요? 소나기인가?”
“비?”
고개 들어 창 너머를 바라보자, 과연 보슬비가 내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아네트가 호들갑 떨며 이쪽으로 다가왔다.
“어휴, 빗방울 튄 것 좀 봐. 얼른 창문 닫아야지. 그럼 우비도 함께 준비할게요, 아이린 님!”
“고마워요. ……아. 이런.”
나는 편지지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편지지에 작은 물방울 자국이 생겨 있었다. 그새 비가 한 방울 튄 모양이었다.
다행히 만년필이 지나간 곳은 아니어서, 글자가 번지지는 않았다.
나는 빤히 편지지를 바라보았다.
적어 내고 싶은 마음이 많았다. 아무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감정을 속으로만 갈무리하려니 가슴이 많이 답답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에겐 다 털어놓아도, 차마 이안에겐 털어놓을 수 없는 감정이었다.
나는 만년필을 꾹꾹 눌러쓰며, 괜한 감상적인 이야기 대신 농담을 적기로 했다.
「저희 계약에 대해서는 물론 잊지 않으셨겠죠? 확실히 이행해 주시길 바라요.」
장난삼아 독촉하는 빚쟁이 같은 멘트를 써 보았지만, 사실 지금의 이안에겐 농담조차 되지 않을지도 모른다.
제국의 주인이 된 사람에게 그까짓 천만 마르스 따위, 푼돈에 불과할 테니까.
“하아.”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안이 황제가 되리라는 사실을 실감할 때마다, 어쩐지 가슴 한구석이 허전했다.
원래도 멀디멀었지만, 이제는 정말 나와는 아주 먼 사람이 될 거라는 생각 때문일까.
‘참 한심하네. 나도.’
자조하듯 웃은 나는, 이제 슬슬 편지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마지막 말은 뭐라고 적을까.
고민하던 나는 괜한 말 없이 담백한 인사로 끝맺는 것을 선택했다.
「그럼 이만. 몸 건강히 잘 지내요.」
……담백한가?
마지막 문장의 ‘몸 건강히’가 조금 마음에 걸렸다. 요즘 너무 과로하는 것 같아 걱정스러운 마음이 나도 모르게 저 문구에 배어 나와 있었다.
‘에이. 모르겠다.’
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적은 것, 어쩔 수 없었다.
편지지를 잘 접어 협탁 위에 올려놓은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아네트 양. 이안 님이 돌아오시면 이 편지를 건네주- 응? 어디 갔지?”
“아이린 님!”
나는 아네트의 목소리가 들린 방향을 쳐다보았다가, 입을 떡 벌렸다.
“세상에.”
“역시 예쁜 추억을 남기시려면 예쁜 옷이 많이 필요하겠죠?”
“그 옷들 모두 내려놔요. 그걸 다 가져갈 순 없어요!”
“하지만, 모처럼의 여행인데……!”
“여행이고 뭐고, 그걸 다 가져갔다간 조안 경과 내 허리가 부러질 거라고요!”
나는 황급히 아네트를 말리기 위해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 * *
“와아.”
나는 차창에 코를 박다시피 가까이 한 채 바깥을 구경했다.
메이우드는 정말로 사랑스러운 도시였다.
소담한 가로수들과, 아늑한 벽돌집들. 잘 차려입은 사람들.
“예약해 둔 호텔이 이 근처에 있습니다.”
조안 경의 목소리에 나는 그녀를 돌아보았다.
“다시 한번 미안해요, 경. 나 때문에 갑자기 수도를 떠나게 되었네요.”
“아니오, 아이린 님. 덕분에 함께 휴가 나온 기분이라 저는 즐겁습니다.”
조안 경이 희미하게 웃더니, 곧 어두운 표정을 지었다.
“아이린 님께는 항상 죄송한 마음뿐이기에…… 이런 기회에라도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조안 경, 경 탓이 아니라고 했잖아요.”
조안 경은 황제가 죽던 날, 나를 지키지 못한 것에 큰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조안 경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마터면 이안마저 다칠 뻔했을 정도로 큰 사건이었는데, 조안 경이 어떻게 나를 털끝 하나 다치지 않도록 지킬 수 있었을까.
그렇게 몇 번이나 위로했지만, 조안 경에겐 와닿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럴수록 그녀는 나를 더 투철히 지키겠다는 사명감만 불태울 뿐이었다.
“이곳이군요.”
마차가 한 건물 앞에서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나는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아…….”
우리가 묵기로 한 호텔은, 대신 예약해 준 아네트 양의 말로는 이 도시에서 풍광이 좋기로 가장 유명한 곳이라고 했다. 창문으로 도시의 정경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그것만으로도 메이우드에 여행 온 보람을 전부 느낄 수 있을 정도라나.
“가장 좋은 방을 예약하지 못한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리는군요.”
나를 에스코트해 호텔로 향하며 조안 경이 한숨 쉬듯 말했다. 나는 손사래를 쳤다.
“에이. 전 그렇게까지 좋은 방, 전혀 안 필요하다니까요. 그 유명하다는 메이우드 야경만 보인다면 어느 방이든 상관없어요.”
“아이린 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조금이나마 마음이 놓입니다.”
호텔 앞으로 다가가자, 문지기들이 정중히 문을 열어 주었다.
소담스러운 외관과 달리 안은 상당히 화려하고 고급스러웠다. 휘황찬란한 데스크에서 지배인이 우리를 맞이하러 나왔다.
“어서 오십시오, 샬롯 님! 저희 호텔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샬롯은 이곳에서만 임시로 쓰게 된 내 가명이었다. 괜히 내 정체를 알리고 다니면, 생각을 정리할 새도 없이 사람들에게 시달릴 터였다. 나는 분홍 머리를 가리기 위한 망토를 더 눌러쓰며 어색하게 웃었다.
“안녕하세요.”
“샬롯 님, 정말 운이 좋으시군요.”
“네?”
지배인이 짝짝, 손뼉을 쳤다.
“샬롯 님께서는 저희 호텔의 만 번째 손님이십니다!”
“네?”
“그런고로, 샬롯 님께 저희가 이번에 새로 오픈한 2호점의 스위트룸을 헌정하고 싶은데요. 괜찮으시겠습니까?”
“네에? 정말요?”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조안 경에겐 좋은 방 따위 필요 없다고 손사래 쳤지만, 대한민국 출신 소시민으로서 ‘스위트룸’이라는 단어에 가슴이 설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내게 이런 행운이!’
좋아하면 안 될 사람을 좋아하게 된 처지를 위로라도 해 주는 걸까.
뜻밖에 굴러들어 온 행운 덕분에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해 주시면 저는 너무 기쁘죠. 감사히 받아들일게요!”
“기뻐해 주시니 저희도 몹시 기쁩니다!”
나와 지배인은 당장 샴페인이라도 터뜨릴 듯 함께 신나 했다.
“정말 잘됐군요, 샬롯 님.”
조안 경도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