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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6화 (126/161)

126화

나는 숨죽인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귀신처럼 군사들의 동요를 눈치챈 황제가 다시금 외쳤다.

“조금이라도 망설이는 자는 삼대를 멸할 것이다! 제국 공적의 목을 당장 내 앞에 가져다 바쳐라!”

“공적이라.”

이안이 차가운 비웃음을 걸쳤다.

성기사들을 돌아본 그가 입을 열었다.

“들어라. 엘룬 신의 기사들이여.”

전투를 준비하던 와중에도 성기사들이 검을 받들었다.

“예, 단장님!”

“나, 이안 에스테반. 성기사단장이자 추기경 성하의 대리인으로서, 지금부터 라시드 레하트의 심판을 명한다.”

“받들겠습니다, 단장님!”

검을 치켜들며 맹세한 성기사들이 일제히 황제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곧장 황제의 군사들이 황제를 갑옷처럼 감쌌다.

그 한가운데에서 황제가 외쳤다.

“심판?! 감히 이 나라의 제왕을 심판할 수 있는 이가 이 제국에 있을 줄 아느냐!”

심판이라는 것은 이교도들에게나 내려지는 말이었다. 단순한 이교도도 아니고, 식인이나 살인도 서슴지 않을 정도로 타락한 이교도들에 대해서.

이 와중에도 황제는 자신이 그런 취급을 받는 것에 분개한 모양이었다.

“신 앞에서 만민은 평등한 법이죠. 형님. 황제라도 예외는 없습니다.”

서늘한 조소에 황제가 이를 악물었다.

이안은 방금 황제를 전 교단의 적으로 공표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황제의 제국 공적 선포에 대한 완벽한 맞받아침이었다.

그 말인즉, 황제를 상대하기 위해 온 성기사단의 병권과 강력한 성물의 힘까지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강력한 상비군을 지닌 황제라 해도 이는 결코 달가운 소식은 아닐 터였다.

이안 개인을 적으로 돌리는 것과 교단 전체를 적으로 돌리는 것은 그만큼 크나큰 차이였다.

“성기사단장에 불과한 네가 무슨 자격으로?”

“이곳으로 오기 전, 추기경 성하께서 제게 오늘에 한해 전권을 일임하셨습니다.”

“그게 무슨-”

“즉.”

이안이 싸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 시간부로 당신은 파문이란 소립니다. 폐하.”

“이놈이!”

“그토록 귀찮아하던 예배를 강제로 드릴 필요 없게 되어 잘됐군요.”

황제의 얼굴이 무섭도록 굳었다.

역대 황제 중 파문을 당하고도 제위를 지킨 황제는 아무도 없었다.

그만큼 제국에서 엘룬교의 위상은 막강했다.

교단의 세력이 거슬려 견제를 시도한 황제가 여럿 존재하기는 했지만, 아무도 성공한 적은 없었다. 현재 황실과 교단이 수도 내에서 암묵적인 불가침 조약을 맺고 있는 것은 그 오랜 힘겨루기의 결과였다.

황제를 감싸던 군사들마저 이안의 발언에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황제를 돌아보는 군사들의 얼굴에 혼란이 어렸다.

당연한 일이었다. 신에게서 버림받은 황제는, 영토 없는 황제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시선을 느낀 황제가 이를 갈았다.

“이런 버러지 같은 것들.”

분노한 황제가 혼잣말 같은 목소리를 씹어뱉었다.

“그래. 애초에 미개하고 미천한 네놈들은 믿지도 않았다. 내게 진정 충성을 바칠 존재들은, 비천하고 변덕 심한 미물들이 아니야.”

황제의 목소리에 점점 광소가 어렸다.

‘뭐지.’

기분이 이상했다.

내 예상대로라면, 황제는 지금쯤 연달아 맞은 뒤통수에 정신이 혼미한 상태여야 했다. 지닌 패는 모두 내놓았고, 계속해서 이쪽이 내미는 패에만 당하고 있으니 여유가 있을 리가 없었다.

자존심을 지킬 가짜 웃음조차도, 지을 수 없는 상태여야 할 텐데.

“하하하.”

황제가 킬킬 웃음을 흘렸다.

모든 것을 놓고 미쳐 버렸다기에는 석연치 않은 웃음이었다.

‘뭔가 이상해.’

나는 나도 모르게 입술을 잘근 씹었다.

여태까지는 시종일관 미리 생각해 둔 시나리오대로 양상이 흘러갔다.

그 때문에 내 감정이 고조된 적은 있어도, 여유를 완전히 잃은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 처음으로 등골에 소름이 끼쳤다.

본능적인 감각이 내게 경고하고 있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고.

“들어라, ……어둠 속 권속들이여.”

이젠 거의 들리지도 않을 크기로 황제가 웅얼거렸다.

나는 숨죽인 채 황제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을 지켜보았다.

“지금, 내 앞에 나타나, 계약을 이행하라.”

멀리 떨어진 탓에 그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말을 제대로 들을 순 없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부르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아마 고도로 훈련된 제 군사들보다도 강력한.

‘누구에게 하는 말이지?’

나는 황급히 머리를 굴렸다.

설마, 나인?

황제가 나인과 손을 잡았다는 것은 이미 내겐 기정사실이었으니 놀랄 것도 없었다.

‘지금부터 나인의 병력까지 추가로 상대해야 하는 걸지도 몰라.’

예상하지 못한 부분은 아니었다.

다만 그놈들의 전력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가 없기에 긴장이 되기는 했다.

‘괜찮아.’

작전을 짜던 도중, 나인의 병력을 걱정하던 내게 이안이 그렇게 말했었다. 걱정하지 말라고, 그 집단의 존재 자체를 모르던 때면 몰라도 지금은 당할 리 없다고.

돌이켜보면 그때의 이안은 필요보다 조금 더 힘주어 말한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그놈들에게 약점이 잡혀 있다고 말했던 내게 그 나름대로 안심을 시켜 주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이안은 설령 위로를 위해서라도 빈말을 할 사람은 아니었다.

그러니 괜찮아. 이안은 쉽게 당하지 않을 거다.

나도 모르게 나인의 노예 낙인이 찍혀 있던 허벅지를 움켜쥐며, 나는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그 순간 새빨간 빛이 시야를 가로질렀다.

“윽!”

“크읏, 이게 무슨!”

빛에 시야를 방해받은 기사들이 여기저기서 당황한 소리를 냈다.

나는 혼란을 내리누르며 주변을 살폈다. 붉은빛이 이곳저곳에서 땅 위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이건.”

내 곁을 지키고 있던 리젤로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나는 다급히 물었다.

“탑주님! 알고 계세요? 이 빛이 뭔지!”

“……마법진이 발동했음을 알리는 빛입니다. 이건.”

“말도 안 돼. 저도 마법진이 완성되는 순간은 여럿 봤어요! 그 빛이 이렇게 강하다고요?”

“가능하죠.”

리젤로가 어딘가를 쏘아보며 말했다.

“마법진이 그만큼 거대하다면.”

“무슨-”

나는 말을 잇지 못했다.

리젤로가 가리킨 아래를 내려다본 내 입이 멍하니 굳었다.

지하 무도회장에서 보았던 마법진은 약과였다.

그 몇 배는 더 거대한 마법진이 지금 이 궁전 전체를 뒤덮고 있었다.

‘아니, 이 정도면 궁전 하나 정도가 아니라…….’

황궁의 반은 마법진에 먹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았다.

상상하지 못한 규모에 오한이 솟았다. 대체, 이 마법진은 무엇을 위해 그려진 것일까?

“안 되겠군요. 일단 더 멀리 도망치죠.”

리젤로가 말했다.

오늘 그에게서 처음으로 듣는, 여유가 사라진 목소리였다.

“여기서 더는 안 돼요. 이안 님과 너무 멀리 떨어지고 싶진 않아요!”

심지어 이런 수상한 빛이 사방을 가로지르는 와중에 그를 혼자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전투에선 아무것도 도움이 되지 않는 나지만, 이 이상 현상에 대해서는 내 머릿속의 원작 지식으로 도움을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책 속에서 이렇게 상식 이상으로 거대한 마법진 이야기를 읽은 적은 없는 것 같았다.

리젤로가 나를 설득했다.

“아니, 지금 당장 여기서 멀어져야 해요. 이안 님도 그걸 가장 원할 것-”

거기까지 말한 순간이었다.

우웅, 구우웅.

붉게 달아오른 마법진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이게 뭐지!”

“으…… 으아아!”

빛 때문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시야.

지진이라도 난 듯 마구 흔들리는 땅.

마치 종말 직전의 세상 같았다.

시각적인 충격 탓일까. 여태 평정을 유지하던 기사들도 눈에 띄게 우왕좌왕하기 시작했다. 몇 명은 공포에 질려 달아나기를 시도했다.

“시작됐군요.”

리젤로의 탄식 섞인 목소리에 나는 다급히 물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죠?”

“……제가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곧장 알게 되실 테니.”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이야.

답답함에 리젤로를 닦달하려던 순간이었다.

“끄악!”

도망치던 기사 한 명이 돌부리에 발이 걸린 듯 넘어졌다.

돌부리가 순식간에 솟아오르더니 거대한 곰이 되어 포효했다.

‘아니, 저건 곰이 아니라.’

나는 커다랗게 뜨인 눈으로 그것을 목도했다.

그것이 등에 웅크려 있던 날개를 커다랗게 펼쳤다.

곰처럼 커다란 체구, 박쥐 같은 날개와, 머리에 솟아난 염소 모양의 뿔.

‘맙소사.’

손끝이 차게 식었다.

저 모습을 이런 곳에서 또 한 번 보게 될 줄은 몰랐다.

리칼리온에서 이안의 옆구리에 끼인 채 전장을 질주해야 했던 악몽이 다시금 되살아났다.

‘왜 발록이 여기에?’

섬뜩한 감각이 등골을 내달렸다.

나는 황급히 황제를 돌아보았다.

여기저기서 솟아 나오는 발록과 비명 지르는 기사들로 아비규환인 땅 위에서, 황제만이 홀로 고요히 두 다리로 서 있었다.

그 모습에 나는 찬물을 끼얹은 듯 깨달음을 얻었다.

‘저 미친놈.’

황제에 대해 남은 기대치는 아무것도 없다 생각했었는데도, 지금만큼은 뒤통수가 얼얼했다.

‘그때도, 그리고 지금도…… 저 자식의 소행이었구나.’

설마 제국의 황제라는 놈이 제 땅에 두 번이나 마물을 소환할 줄은 몰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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