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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화 (122/161)

122화

* * *

황궁 근위 기사 보리스는 눈 앞에 펼쳐진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바로 몇 초 전까지만 해도 잔해밖에 없었던 폐허에, 어째서 아름다운 궁전이 우뚝 서 있는 것일까?

‘내가 뭐에 홀렸나?’

그러나 주위 동료들을 보니, 홀린 건 자신만이 아닌 듯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조화일까. 당혹스럽기 그지없었으나 상황을 파악해 볼 여유가 없었다.

유령처럼 솟아오른 저 궁전 위에서 숨 가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폐하! 피하십시오!]

폐하라니.

우리 폐하는 여기 있는데?

보리스는 그새 제가 주군을 놓쳤나 해서 황급히 황제가 있던 곳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라시드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귀신을 맞닥뜨린 듯,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뜬 눈으로 궁전을 올려다보면서.

[쿨럭, 헉!]

[놈들이 독을 살포했다! 폐하부터 안전한 곳으로 모셔라!]

[독의 침투 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독?!

보리스는 황급히 코와 입을 가렸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이곳에서 독 같은 건 느껴지지 않았다. 입단할 때부터 독에 대한 내성 훈련을 받아 온 보리스가 그것을 구분하지 못할 리 없었다.

[허억, 헉…….]

[폐하! 괜찮으십니까!]

‘그보다, 저 폐하라는 사람은 대체 누구란 말이야!’

하늘 아래 두 황제가 있을 수는 없다.

라시드가 곁에 저리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 이상, 또 다른 ‘폐하’는 반역도에 불과했다.

하지만 방금까지 이안을 반역도 취급하며 역정 내던 황제는, 지금 눈을 부릅뜬 채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고 있었다.

‘폐하께서 고장 나셨다!’

그렇다면 황제의 수족인 자신들이 독단으로 결정을 내려야 하는 걸까?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지만, 상대가 반역도라면 결정을 내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반역도를 심판하는 것이야말로 황궁 기사들의 제1 임무였으니까.

동료 기사들 역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지, 서로 단호한 눈짓을 주고받았다.

보리스가 유령 궁전을 향해 검을 쥐고 뛰어들려던 그 순간이었다.

“서, 선. 선황 폐하?!”

근위 기사 중 가장 연로한 기사, 아더가 당혹한 목소리로 외쳤다.

선황 폐하?

보리스는 너무 놀라 유령 궁전을 올려다보았다.

안이 다 비쳐 들여다보이는 궁전의 이 층에서는, 기사들이 한 남성을 온몸으로 지키고 있는 광경이 보였다.

‘선황 폐하라니, 그게 무슨…… 어?’

보리스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러고 보니, 남성이 입고 있는 저 보랏빛 의복은 오직 레하트 제국에서 황제만이 입을 수 있는 의상이었다.

그때, 중년 남성이 뒤로 고개 돌리곤 격하게 기침을 뱉었다. 그 덕분에 보리스는 멀리서나마 남성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

거리 탓에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보리스는 남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어떻게 못 알아볼 수 있을까. 기사 선서를 위해 황궁에 입궁한 순간부터 마주한 얼굴인 것을.

역대 황제들의 초상화 속에서 말이다.

‘저, 저분은 선대 황제 폐하시잖아.’

보리스의 턱이 덜덜 떨렸다.

분명 죽었다고 알려진 선황이 어째서 저 유령 궁전 안에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폐하! ……커헉!]

그리고, 귓가 바로 옆에서 울리는 듯한 이 소리도 이상했다.

마치 누군가 인위적으로 커다랗게 확장해 놓은 소리 같았다.

이게 도대체 다 무슨 상황인 것일까. 황궁 기사로서 숱한 교육을 받으며 온갖 상황에 대비해 왔지만, 이런 사태에 대해서는 상상해 본 적도 없었다.

혼란에 빠진 보리스는 멍하니 유령 궁전 위만을 올려다보았다. 그동안에도 거기서는 급박한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막심! 폐하를 부탁, 한다……!]

독에 당한 듯 기사들이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했다.

‘폐하’라는 단어에 보리스의 심장이 본능적으로 반응했다. 당장이라도 역대 황제의 초상화 속에서만 본 저 위의 존재를 구하러 가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날카로운 목소리가 보리스의 뒷덜미를 잡아챘다.

“뭣들 하고 있나!”

황제의 사나운 포효에 보리스를 비롯한 황궁 기사들이 움찔했다.

“반역도들을 섬멸하라! 놈들이 삿된 공작을 펼치고 있질 않느냐!”

황제의 얼굴은 무섭도록 하얗게 굳어 있었다.

원래 레하트 황가의 핏줄이 하얀 피부로 유명하기는 했으나 이렇게 유령처럼 새하얗지는 않았다.

위화감을 느꼈으나 보리스는 일단 황제의 명령을 받들기 위해 유령 궁전으로 달려들었다.

“윽!”

제일 먼저 달려들었던 기사가, 계단을 오르려다가 휘청거리며 쓰러졌다.

볼썽사납게 바닥에 엎어진 기사가 당혹한 얼굴로 계단을 더듬거렸다.

기사의 손은 계단에 닿지 않고 그대로 허공을 휘저었다.

“아, 아무것도 만져지지 않습니다!”

“뭐?!”

뒤따라 달려간 기사들이 계단을 올라가길 시도했으나, 마찬가지로 허공을 밟은 듯 허우적댈 뿐이었다.

궁전을 더듬거린 그들은 몇 초 뒤 믿기 힘든 결론을 내렸다.

“이 궁전, 실체가 없습니다!”

갑작스레 솟아오른 유령 궁전.

그 안에서 만질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보리스는 귀신에 홀린 기분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그렇다면, 설마 이 모든 것이…….

“환상 마법이다!”

“적들이 우릴 교란하고 있다!”

이렇게 거대한 환상 마법이 세상에 존재한다고?

보리스는 믿을 수 없는 기분으로 검을 고쳐 쥐었다. 그러나 도대체 어디를 공격해야 하는 것인지조차도 알 수 없었다.

“잠깐! 위를 봐!”

한 기사의 외침에 모두 위를 올려다보았다.

반투명한 궁전은 위를 그대로 들여다볼 수 있었다.

[어이쿠, 황제 폐하가 아니십니까.]

방독면을 쓴 자들이 이죽거리며 이 층의 방 안으로 들어섰다.

독에 당한 기사들이 비틀거리며 그들을 막으려 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기사들이 쓰러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방독면 괴한들이 낄낄거렸다.

[암영대조차 꼼짝 못 하는 독이라니! 아주 제조가 잘됐군. 돈이 어마어마하게 들기는 했지만, 뭐. 월척을 낚으려면 이 정도는 투자해야 하지 않겠어?]

[네놈들은, 누구냐……! 감히 폐하를 능멸하는 죄, 결코 달게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단단히 독에 당해 놓고도 입은 아직 잘 놀리는구만! 과연 단련을 좀 열심히 한 게 아닌가 보군?]

[그럼 뭐 해. 결국 제 주인 하나 못 지키고 깡그리 여기서 죽을 운명인데!]

방독면 괴한들이 저들끼리 낄낄거렸다.

이게 도대체 무슨 대화지. 보리스는 머릿속이 혼미했다.

지금 보이는 것이 환영이라면, 승하한 지 오래인 선황의 모습이 보이는 건 이해가 되었다.

그렇지만, 이 환영이 왜 그들에게 과거의 일을 보여 주는 것처럼 보이는 걸까.

‘하지만…… 말도 안 돼. 이게 과거라고?’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정말 이 환영이 과거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 맞다면.

그럼 선황께서는, 지병으로 승하하신 게 아니라…….

보리스가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이었다.

“당장 이 짓거리를 멈추지 못하겠느냐! 넋 놓고 있는 자는 목이 달아날 줄 알아라!”

황제의 노성이 귓가를 찔렀다. 보리스는 화들짝 놀라 다시금 검을 고쳐 쥐었다.

“돌격하라!”

근위대장의 명령에 기사들이 다시 한번 이 층으로의 돌격을 시도했다.

물론 이번 역시 실체 없는 궁전 속에서 무참히 허우적거릴 뿐이었다.

이럴 게 아니라 환영 마법을 시전 중인 범인을 찾아야 한다. 보리스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품위 없게 왜들 이러십니까. 환영이라니까요? 환영. 허공엔 검이 안 통하죠.”

우스워 죽겠다는 듯 킥킥대는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목소리가 들린 방향으로 고개 돌린 보리스는, 웬 연극적인 가면을 쓴 남자를 발견했다.

수상하기 짝이 없는 차림새를 한 남자는 누가 봐도 이 괴이쩍은 사태의 원흉으로 보였다.

‘잠깐. 저 괴상한 가면에, 이만한 환영 마법을 시전할 수 있는 인재라면…….’

설마 마탑주?

보리스가 한껏 당황해선 가면 쓴 남자를 노려보았다. 근위대장 역시 당혹한 목소리로 외쳤다.

“마탑주?! 어째서 반역을 돕고 있는 것이지!”

보리스 역시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정말 마탑주가 반역도 무리에 가담하기로 한 거라면, 그는 몹시 위협적인 적이 될 터였다. 지금 근위 기사들을 순식간에 교란했듯이.

하지만 지금은 그런 골치 아픈 것을 생각할 때가 아니었다.

“당장 저자를 내 앞에 데려와 무릎 꿇려라!”

황제의 명령에 기사들이 일제히 마탑주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탑주는 빙글빙글 웃는 얼굴 그대로 피하지 않았다.

근위대장의 검이 마탑주의 몸을 통과했다.

“설마 나는 실제라고 생각한 건 아니겠죠? 그 대단하다는 근위 기사들의 수준이 생각보다 낮군요. 검은 잘 쓰겠지만, 아무래도 여기가 좀…….”

마탑주가 제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기사들을 조롱했다. 울컥한 몇몇 기사들이 검 손잡이를 꽉 쥐었다.

그 와중에도 이 층의 환영은 계속해서 재생되었다.

[숨통은 확실하게 끊어 놔.]

방독면 괴한들이 독에 당해 저항하지 못하는 기사들에게 검을 찔러넣었다. 강대했을 기사들이 무력하게 절명했다.

[쿨럭, 쿨럭……!]

선황이 바닥에 보랏빛 액체를 토하며 격렬히 기침했다.

그를 향해 괴한들이 뚜벅뚜벅 다가갔다.

[나 참, 제국의 태양께 손을 쓰는 날이 오게 될 줄이야.]

[역시 돈이 최고라니까!]

[아니지, 인맥이 최고지. 생각해 봐. 그 아들이 직접 사주한 게 아니라면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언감생심 황제를 해칠 계획을 짤 수 있었겠어?]

그 말에 선황이 힘겹게 괴한들을 돌아보았다. 선황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확장된 것이 보였다.

눈이 마주치자 괴한 중 한 명이 씩 웃었다.

[그럼, 폐하. 실례하겠습니다. 의뢰주께서 증거물로 꼭 좀 부탁한 것이 있어서.]

선황에게 다가가며 괴한이 단도를 꺼내 들었다. 단도 날이 옴짝달싹 못 하는 선황의 목을 향해 가까워졌다.

“이안!”

그때, 가느다란 목소리가 보리스의 귓가를 사로잡았다.

저도 모르게 그쪽을 돌아본 보리스는 눈을 크게 떴다.

잇따른 충격에 잠시 잊고 있던 성녀님이, 성기사단장의 팔목을 다급히 잡아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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