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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6화 (106/161)

106화

“수도 밖에 이런 공간이 있었나요? 정말 예쁘네요. 와아…… 가을 냄새 난다.”

나는 나도 모르게 환성을 일삼으며 두리번거렸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모두 나처럼 보이는 광경에 감탄 중인 게 보였다.

“대성당의 정원은.”

이안이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겨울에 가장 아름다운 편입니다.”

“네?”

갑자기?

나는 눈을 끔뻑이며 대답했다.

“그렇…… 군요? 음, 기대되네요. 그럼 겨울이 되면 직접 구경시켜 주실 거죠? 여보.”

일부러 크게 말하며 나는 이안의 팔짱을 더 세게 꼈다.

눈까지 반짝거리며 미소 짓자, 이안이 살짝 굳는 것이 보였다.

“타고난 건가…….”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뜻이지?

그나저나, 이안이 저렇게 굳어 있는 모습을 보자 머릿속에 경보음이 울렸다.

황제가 집무실을 쳐들어왔던 그 날 이후 우리는 딱히 스킨십 연습을 하지 않았다.

큰일이 지나고 나서 해이해졌다고 해도 할 말은 없었다. 사실 내 쪽에서 좀 피한 것도 있었다.

‘너무 자주 해도, 좀…… 그럴 것 같아서.’

아무리 연기라고는 해도, 나는 엄연히 유교 국가에서 태어나고 자란 몸이다.

무늬만 남편인 남자와 매일같이 아무렇지 않게 입술을 맞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요즘 연습을 못 하긴 했는데…… 그래서 퇴화한 건가?’

나는 부인과 팔짱을 끼고 있는 주제에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을 하고 있는 이안을 지그시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그동안 너무 편하게 놓아둔 건 맞는 모양이었다.

다시 기강을 잡을 필요가 있는 듯했다.

“보라색 초대장을 받으신 분들께서는 이쪽으로 올라오시면 됩니다!”

그때 마탑 직원이 안내하는 소리가 들렸다.

보라색 초대장이라면, 우리가 받은 거잖아?

나는 얼른 직원의 안내에 따라 이안을 데리고 움직였다.

잘 차려입은 몇몇 사람들이 우리처럼 정원 정중앙으로 모이는 게 보였다.

“왜 여기로 부른 걸까요? 이쪽이 더 정경이 예쁘긴 한데.”

나는 주위 풍경을 감상하며 의아해했다.

그나저나 천공섬은 어디 있는 걸까?

아무리 위를 올려다봐도, 하늘에 떠 있는 섬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구름 하나 보이지 않는 쾌청한 날씨였다.

“아이린 양?”

그때 익숙한 목소리가 내 귓가를 사로잡았다.

뒤를 돌아본 나는 화색을 띠었다.

“코델리아 님!”

코델리아 역시 보라색 초대장을 받은 모양이었다.

“아이린 양도 왔을 것 같았어요. 안녕하세요, 이안 님.”

내게 새침히 인사한 코델리아가 이안에게도 인사를 건넸다. 성기사단장과 성녀 사이에 꽤나 딱딱한 인사가 오갔다.

코델리아 외에도 몇몇 아는 얼굴을 만날 수 있었다. 대부분 고위 귀족들이어서, 보라색 초대장이 확실히 영향력 큰 사람들에게만 전달되었다는 사실이 실감 났다.

‘그렇다면, 혹시…….’

황족도 이 자리에 있을까?

그러나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황제나 황후는 보이지 않았다.

황제가 이안의 집무실에 쳐들어왔던 그 날 이후, 황제는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나인과의 커넥션은 유지되고 있는 건지도 알 수 없었다. 그나마 나와 연락하고 있던 에드워드가 그렇게 죽어 버렸으니, 내겐 더 이상 나인의 소식을 알 길이 없었다.

‘둘의 관계가 확실하게 박살 난 거면 좋을 텐데.’

나인과 황제가 가까워지면 좋을 게 없었다.

나쁜 놈들끼리 모여 봤자 뭘 하겠는가. 더 나쁜 짓이나 꾸미지.

‘황제가 분노해서 나인을 내치고, 나인이 이안을 노리고 준비하고 있던 사술까지 덩달아 무산되는 게 베스트 시나리온데.’

일이 정확히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상념은 머지않아 깨져 나갔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확성기를 튼 듯 커다란 목소리가 정원을 울렸다.

다들 깜짝 놀라 우왕좌왕했다.

“뭐, 뭐야.”

“어디지?”

“헉! 저기!”

누군가 정중앙에 있는 거대한 나무를 가리켰다.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남자가 커다란 나뭇가지 위에 앉아 있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리젤로였다.

‘세상에.’

민망하리만큼 화려한 등장에 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저 정도면 사람들의 이목을 받기 위해 태어난 인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천공섬 탄생 기념 파티에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첫 손님이십니다!”

나무 위에서 리젤로가 짝짝 손뼉을 쳤다.

다 큰 성인 남성이 얼굴엔 가면을 쓴 채 나뭇가지 위에서 박수나 치고 있는데도 꽤 그럴듯해 보이는 게 신기했다.

‘역시 난놈은 난놈이란 말이지.’

혀를 내두르며 나는 리젤로의 연설을 들었다.

“그럼 지금부터, 여기 모신 특별한 손님들께 첫 비행을 선사하겠습니다.”

첫 비행?

그게 무슨 뜻이지?

본능적인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이안의 소매를 붙잡았다.

‘저 사람,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우우웅, 땅이 깊게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꺅! 바닥이!”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렸다.

나 역시 바닥에서부터 느껴지는 진동에 당황했다.

“지, 지진일까요?”

“아이린.”

이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꽉 잡으십시오.”

“네, 네?”

“아무래도 마탑주가 무식한 이벤트를 기획한 것 같으니.”

그게 무슨 소리지?

이안은 뭔가를 짐작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머리를 바쁘게 굴려 보았다.

이곳은 천공섬을 기념하는 파티. 그리고 리젤로가 말한 ‘첫 비행’.

설마, 하고 나는 이안의 소매를 더 세게 붙잡았다. 그때였다.

“으아아악!”

우리가 서 있던 거대한 정원이 통째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천천히, 그리고 부드럽게 지상으로부터 분리된 정원이 하늘로 두둥실 떠올랐다.

“떠, 떠오른다!”

“꺄악!”

정원 밖에 있던 사람들은 서서히 날아오르는 우리에게 손가락질을 했고, 정원 안의 사람들은 멀어지는 지상을 향해 손가락질했다.

그야말로 혼란의 도가니였다.

“비행이 이런 뜻이었냐고!”

이안의 소매를 아주 뜯어 버릴 듯 붙잡으며 나는 외쳤다.

정원 가장자리에 하얗고 커다란 울타리가 돋아났다. 그 와중에도 정원은 점점 더 높이 하늘을 오르고 또 올랐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우릴 올려다보는 땅 위 사람들이 엄지 손가락만하게 보일 때쯤, 정원이 드디어 멈췄다.

“많이 놀라셨나요? 하하.”

여전히 나무 위에 오른 채로 리젤로가 뻔뻔히 말했다.

“이곳이 바로, 마탑이 새로이 자랑하게 될 랜드마크, 천공섬입니다.”

관광 가이드 같은 리젤로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천공섬이라고?”

“여기가?”

적응이 빠른 몇몇 사람이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울타리 너머 저 아래를 내려다본 누군가가 탄성을 질렀다.

“이야……!”

나는 저 멀리 지평선을 내려다보았다.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오후의 지평선은, 평화로우면서도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정말 하늘로 섬이 떠올랐어.”

“말 그대로 공중 정원이군요!”

“맙소사…… 아름다워요.”

충격에서 벗어난 사람들이 하나둘 주위를 구경하며 감탄에 젖기 시작했다.

방금 겪었던 혼란 탓에 모두 더 솔직히 감정을 표현하게 된 듯했다. 여기저기서 환성이 터져 나왔다.

‘쇼맨십 하나는 인정해야겠네.’

나는 리젤로에게 마지못해 감탄하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가, 엘리엇이 셀리나에게 평생의 사랑을 약속했던 그 장소구나.

감상에 젖은 나는 천천히 정원을 거닐기 시작했다.

“이안 님, 저쪽으로도 가 봐요.”

하트 모양 정원수를 발견한 나는 눈을 반짝였다.

바로 저기였다. 엘리엇이 셀리나 앞에 무릎 꿇고 눈물겨운 고백을 바쳤던 그 장소가.

“와아, 진짜 하트 모양이네.”

나는 머리 위 펼쳐진 나무의 잎사귀를 구경하며 탄성을 흘렸다.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국경 근처에선 흔히 볼 수 있는 품종이군요.”

뭐지? 묘하게 아까부터 삐딱한 태도인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때 등 뒤에서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어머, 저길 좀 봐요.”

“두 분도 참. 이런 곳에서도 두 분 만의 세계에 빠져 계시군요.”

“한창이시니까요. 후후, 어쩜. 두 분 눈동자에 사랑이 가득하네요.”

우리 눈동자에?

나는 가늘게 뜨고 있던 눈을 얼른 풀었다. 사람들의 착각처럼 사랑 가득한 눈동자를 해 보려 노력했으나,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이 잘되지 않았다.

“어머. 두 분이 서로를 뚫어져라 바라보시네요!”

“닳겠어요, 닳겠어.”

“뜨겁기도 해라.”

귀부인들이 열렬히 속닥거렸다. 우리에게 다 들리고 있다는 건 모르는 듯했다.

이렇게 대놓고 관람당하고 있자니, 아무리 나라고 해도 얼굴이 조금 뜨거워졌다.

‘에라. 모르겠다.’

기왕 귀부인들의 먹잇감이 되었으니, 화끈한 먹잇감 한번 제공해 볼까.

“이안 님.”

결심한 나는 이안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복습이요.”

그렇게 말한 나는 두 눈을 꼭 감았다.

맞은편에서 작게, 숨을 멈추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키스 연습을 하지 않은 지도 꽤 시간이 지났다. 그새 이안이 나갔던 진도를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스치는 동안, 입술에는 아무것도 와 닿는 감촉이 없었다.

‘뭐야. 설마 정말 잊어버린 걸까.’

슬며시 눈 뜬 나는, 문득 그대로 굳어 버렸다.

어느새 이안의 입술이 바로 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은색 속눈썹과, 푸른 눈동자. 그 안에 비친 나.

낯설지만 이제 조금은 익숙해진 요소들이 파도처럼 나를 덮쳤다. 밀물에 잠긴 듯 꼼짝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

이안의 입술이 바로 앞에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숨을 쉴 수 없었다.

그저 그의 시선에 머릿속을 꿰뚫린 것처럼 아무 생각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제껏 이렇게 바보가 된 기분이 든 적은 없었는데.

왜 이럴까, 내가.

왜 이러지, 도대체.

그런 의문만이 메아리처럼 뇌리를 맴돌 때였다.

살짝, 몸이 뒤로 밀려났다.

‘어?’

나는 한 박자 느리게, 이안이 내 어깨를 밀어낸 것임을 깨달았다.

결코 세게 밀려난 게 아님에도, 머릿속이 휘청거렸다.

나는 커다래진 눈으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이안이, 나와의 입맞춤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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