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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화 (104/161)

104화

“새로 고용했다던 시녀입니까?”

갑작스레 들려온 이안의 목소리에 심장이 쿵 떨어졌다.

찻잔을 내려놓은 이안이 셀리나의 손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을 언급하자 우뚝 굳어 버린 손끝을.

“네. 맞아요. 아직 교육을 받고 계신데, 뭐든 곧잘 해내세요. 손재주가 워낙 좋으신가 봐요.”

당황한 내가 주절거렸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내 시중을 들어 주는 사람들은 가끔 인선이 바뀌었지만, 이안이 그때마다 일일이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 이렇게 노골적으로 관심 갖는 건 아예 처음인 것 같았다.

‘원작에서 이안은 확실히 셀린의 첫사랑이었어. 그런데…… 반대는 어땠지?’

이안에게 셀리나는 어떤 존재였더라?

머리를 굴려 보았지만 뚜렷이 떠오르는 건 없었다. 이안과 엘리엇은 확실히 사제 관계였지만, 셀리나와의 관계성은 그보다 훨씬 옅었다. 이안이 셀리나에게 어떤 감정선을 갖고 있다고 명확히 서술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셀리나는 여주인공이지.’

주인공이란 모든 등장인물의 관심과 이목을 흡수하는 존재다.

원작에 딱히 명시된 적은 없었지만, 이안 역시 셀리나에게 관심을 갖는 게 당연했다.

셀리나는 그만큼 매력적이고 존재감이 확실한 아이였다. 원작의 주인공이란 사실을 구태여 떠올릴 필요도 없이, 그냥 셀리나를 보기만 해도 그쯤은 알 수 있었다.

이안의 시선은 여전히 셀리나의 손끝에서 떠날 줄 몰랐다.

나 역시 셀리나의 손끝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진주를 바른 듯 하얗게 윤이 나는 그 예쁜 손끝을.

“손재주가 좋다라.”

이안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에 굳었던 셀리나의 손이 다시 떨리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찻주전자가 쟁반에 부딪히며 다갈색 찻물이 조금 흘렀다.

그 모습을 지켜본 이안이 다시금 찻잔을 입술로 가져가며 말했다.

“뜨거운 찻물은 다른 이에게 시중받는 게 좋겠군요.”

그의 목소리에선 특별한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문득, 내가 이안의 억양이나 표정을 필요 이상으로 세세히 살피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왜 이러지? 내가.’

물론 나는 평소에도 이안의 눈치를 많이 보는 편이긴 했다.

하지만 그건 이안이 내 목숨줄을 손에 쥐고 있는 존재였기 때문이다. 평화로운 티타임까지 이렇듯 이안의 눈치를 본 적은 없었다.

‘속은 또 왜 이렇게 메스껍지.’

이안의 시선이 셀리나를 향한 뒤부터 속이 어쩐지 좋지 않았다.

입맛 역시 떫어지고, 향긋하기만 하던 차도 무미건조하게 느껴졌다.

왜 이런 기분이 들게 되는 걸까?

‘꼭, 이안이 셀리나를 쳐다보는 게 싫은 것처럼…….’

그 생각을 하자마자 속이 또다시 메스꺼워졌다.

나는 딸깍, 찻잔을 내려놓았다. 이안과 셀리나의 시선이 동시에 나를 향했다.

“아이린?”

“아, 죄송해요.”

살짝 고개를 숙인 채 내가 말했다.

“속이 조금 안 좋아서.”

“괜찮으세요, 아이린 님?”

셀리나가 동그래진 눈으로 물었다. 눈을 크게 뜨자 한결 더 토끼와 닮아 보이는 그녀는 참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아, 괜찮아요. 차가 오늘 좀 안 받네요. 그만 마셔야겠다.”

“아침에 뭘 잘못 먹었습니까?”

나를 따라 찻잔을 내려놓은 이안이 물었다. 시비인지, 걱정인지 헷갈리는 말투였다.

“많이 불편하다면 검사를 받아 보죠.”

“네? 아뇨, 그럴 정돈 전혀 아니에요.”

나는 깜짝 놀라 손사래 쳤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뭐든 잘 먹는 그대가 고작 찻물을 못 넘기다니. 치유사를 부르겠습니다.”

정말 사람을 부르려는 듯 이안이 고개를 돌렸다. 나는 황급히 그를 말렸다.

“됐어요!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니까요. 그리고, 뭐든 잘 먹다니. 저도 못 먹는 건 있어요. 가령, 전에 먹이셨던 용의 발톱이라든지.”

“그릇을 싹 비우셨던 걸로 압니다만.”

이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그야, 그랬지. 비싸고 몸에 좋은 거라고 하니까!

“발톱…….”

셀리나가 조그맣게 혼잣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얼굴이 빨개졌다. 졸지에 셀리나 앞에서 발톱까지 잘 먹는 여자가 되어 버린 나는 괜스레 이안을 흘겨보았다.

“티타임은 여기까지만 가져야겠어요. 저는 먼저 일어나 볼게요.”

“갑자기?”

이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직 시간 더 낼 수 있습니다만.”

이안은 티타임을 빙자한 이 모의 시간을 위해 업무 중간에 짬을 낸 상태였다. 그런데 내가 멋대로 돌아가겠다고 하니 언짢은 모양이었다.

“방금 막 떠오른 생각이 있어서, 좀 정리해 봐야 할 것 같아요. 밤에 다시 뵙죠.”

단순히 속이 이상해서 자리를 일찍 뜨는 것만은 아니었다.

조금 전 떠올려 낸 복원 마법이라는 가능성에 나는 마음이 많이 쏠린 상태였다. 그 가능성에 조용히 혼자 생각을 정리하며 골몰해 보고 싶었다.

그래. 머리가 복잡한 건 그 이유 때문인 듯했다.

“갑작스럽지만…… 뭐. 알겠습니다. 그대의 변덕이 하루 이틀 있는 일도 아니고.”

이안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며 그가 내게 덧붙였다.

“계속 불편하면 꼭 치유사를 부르십시오.”

“…….”

“아침에 과식하는 것 같기는 했습니다.”

과식 안 했다니까, 망할 이안.

두 번이나 치유사를 권유해 아주 살짝 감동받으려 했던 마음이 땡볕 아래 눈처럼 파스스 녹았다.

이안이 나간 방 안에서 혼자 소파에 늘어져 있는데, 이번엔 다른 시종이 문을 두드렸다.

“아이린 님, 편지가 왔습니다.”

“편지요?”

내 입으로 말하기는 조금 쑥스럽지만, 아이린 그레이스 앞으로는 편지가 꽤 많이 오는 편이었다.

그렇기에 편지가 올 때마다 일일이 보고받지는 않았다. 의아한 눈으로 시종을 쳐다보자, 그녀가 내게 속삭였다.

“마탑으로부터 온 편지입니다.”

마탑?

내가 잘못 들은 걸까.

나는 얼른 편지를 건네받았다. 발신인에는 리젤로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세상에.’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여태껏 리젤로와 편지를 주고받을 때는, 다양한 속임수가 곁들여져 있었다. 이렇게 대놓고 리젤로의 이름으로 편지를 받은 적은 없었다.

‘무슨 생각인 거야. 제정신인가?!’

이안이 없을 때라 다행이었다. 나는 황급히 봉인을 풀었다. 편지지는 몹시 고급스러워 무슨 예술 작품 같았지만 개의치 않고 북북 뜯었다.

안에 적힌 내용은 간단했다.

「천공섬 파티에 당신을 초대합니다.

하늘 위의 천국에서 환상적인 하루를 보내 보세요!」

그 밑에는 날짜와 장소가 적혀 있었다.

내용은 그게 전부였다.

“천공섬?”

나는 멍하니 편지를 내려다보았다.

‘천공섬이라면, 원작 외전 부근에서나 등장하는 이름인데?’

내 기억이 맞다면…….

잠시 머릿속을 되짚던 나는 곧 확신했다. 그래. 천공섬은 리젤로가 외전 즈음에 다다라서 성마석을 동력으로 발명해 낸 마탑의 걸작품이었다.

‘이게 벌써 등장한다고?’

도대체 성마석을 얼마나 빨리 개발한 거야?

리젤로와 마탑이 원작보다 훨씬 이르게 성마석을 손에 넣은 건 사실이었지만, 이 정도 속도는 가히 경이로울 정도였다.

‘그나저나, 정말 이게 천공섬 초대장이라면…….’

두근두근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천공섬은 주인공 커플이 원작에서 환상적인 신혼여행을 보내는 장소였다.

그 장소를 내 눈으로 직접 보게 된다는 생각이 어쩔 수 없이 원작 팬의 마음에 불을 지폈다.

그때 옆에서 셀리나가 상기된 얼굴로 말을 걸었다.

“앗, 혹시 아이린 님도 천공섬에 초대되신 건가요?”

“응? 어떻게 알았어요, 셀리나 양?”

“아까 심부름 다녀오는 길에 우연히 들었거든요!”

셀리나가 눈을 반짝거렸다.

“지금 귀족분들 저택에 모두 마탑으로부터 초대장이 배달되었대요. 엄청 거대한 파티가 될 예정인가 봐요!”

“그래요?”

나한테만 온 초대장은 아니었구나.

어쩐지, 대놓고 리젤로의 이름으로 편지를 보냈다 싶었다.

아무튼. 당황이 가시고 나자 이건 꽤 좋은 기회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대놓고 찾아온 행운이었다.

‘복원 마법을 떠올리자마자 이런 초대장이 도착하다니.’

역시 리젤로도 양반은 못 되는 모양이다.

나는 천천히 카드를 반으로 접었다.

“새 편지지를 가져다주세요.”

슬며시 미소 지으며 나는 시종을 돌아보았다.

“참석하겠다는 답장을 써야겠어요.”

* * *

찻주전자 담긴 트레이를 밀고 이안과 아이린의 침실 문을 연 순간, 셀리나는 기절할 듯 놀랐다.

‘으, 은색 머리.’

아이린만 있을 줄 알았던 방에는, 달빛 같은 머리 색깔을 한 남자가 한 명 더 있었다.

고작 한 명이 더 늘어난 것뿐인데도 방이 꽉 찬 것 같았다. 그만큼 남자의 존재감은 대단했다.

아이린의 침실에 버젓이 앉아 있을 만한 은발 남자라면, 이 제국에 단 한 명뿐이었다.

‘단, 단장님이시구나.’

셀리나는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느꼈다.

아이린의 직속 시녀가 되었지만, 교육을 받느라 그녀의 남편인 이안을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엄청 무섭고 칼 같으시다던데…….’

이안에 대한 명성을 숱하게 들어온 셀리나는 절로 긴장했다. 트레이를 미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이안과 아이린에게로 가까이 간 셀리나는 순간 저도 모르게 둘을 흘긋거렸다.

아이린은 오늘도 생기발랄한 모습이었다. 깊이 생각에 잠겨 있는지 미간에 주름이 잡혀 있었는데, 그 모습이 색달랐다.

다음으로 이안을 돌아본 셀리나는 살짝 입을 벌렸다. 미남이란 소리는 들었지만, 이 정도일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었다.

‘이렇게까지 잘생기니까 오히려 와닿지가 않네…….’

셀리나도 당연히 미남을 좋아했다. 하지만 기준치 이상의 얼굴을 보니 오히려 미를 판단하는 뇌의 기관이 무감각해지는 것 같았다.

아니, 이런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셀리나는 얼른 찻잔에 차를 다랐다.

‘찻물 한 방울이라도 흘렸다가 역정 내시는 거 아냐……?’

칼 같은 성기사단장 앞이라고 생각하니 더 떨렸다.

마침 셀리나는 방금까지 이안에 대한 소문을 듣고 온 참이었다. 그와 함께 지하 심문실에 들어간 포로는 절대 살아서 나오지 않았다는 둥, 지하에서 비명이 끊이지 않는다는 둥, 그런 악명들을.

그 소문의 주인공이 바로 앞에 있다고 생각하니 절로 손이 와달달 떨렸다.

“새로 고용했다던 시녀입니까?”

이안이 자신의 존재를 지적하자 떨림은 더 심해졌다.

“네. 맞아요. 아직 교육을 받고 계신데, 뭐든 곧잘 해내세요. 손재주가 워낙 좋으신가 봐요.”

“손재주가 좋다라.”

셀리나는 이안의 시선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는 제 손끝에 와 닿고 있음을 느꼈다.

아이린의 쟁반에 찻물을 흘리자마자 이안의 시선은 더 날카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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