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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화 (102/161)

102화

몇 초간 침묵이 지속된 뒤 황제가 입을 열었다.

“저렇게 제정신이 아닌 자인 줄은 미처 몰랐다. 나 또한 속았구나.”

“그러셨습니까?”

차가운 비웃음을 매단 채 이안이 말했다.

황제는 부득 이를 갈았다. 이안은 자신에겐 단 한 번도 저런 표정을 보인 적이 없었다. 늘 순종적인 무표정만을 보여 왔을 뿐이었다.

“그자는 내 측에서 처리하겠다. 지하 심문실로 보낸다고 했지? 황궁으로 신병을 인계해다오.”

“아닙니다, 폐하.”

이안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대성당에서 일어난 일이니, 교단의 율법대로 처리하겠습니다.”

황제는 남몰래 초조하게 혀를 짓씹었다.

대성당의 지하 심문실은 엘룬 신이 보이는 자비와 달리 악랄하고 잔혹하기로 정평이 나 있었다. 그곳에 잡혀갔다간 에드워드 비첸이 자신의 정체를 술술 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놈이 나인 소속이라는 것이 까발려지면 안 되는데.’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안이 불쾌한 듯 덧붙여 말했다.

“제 부인의 명예를 더럽힌 자입니다. 내 손으로 직접 처단하지 않으면 분이 안 풀릴 겁니다. 그러니 그자에 관해선 신경 쓰지 마십시오, 폐하. 처음부터 세상에 없었던 자인 것처럼.”

마지막 말은 섬뜩하도록 차디찼다.

황제는 이안의 말에 더 이상 반박할 수 없었다. 에드워드가 아이린에게 무슨 짓을 했는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으니.

‘그 머저리 같은 놈.’

아마 에드워드를 다시 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이안 스스로가 장담했듯이.

황제는 새로운 계획을 짰다. 그렇다면 그 쓸모없는 목숨이 다하기 전에 괜히 입을 나불대지 않도록 먼저 이쪽에서 손을 쓰면 될 일이었다.

생각을 정리한 황제가 말했다.

“그래. 그쪽은 네게 맡기겠다. ……그리고, 오늘의 소란은.”

황제가 아수라장이 된 공중 정원과 집무실을 돌아보며 말했다.

집무실에선 아직도 포박당해 있는 귀족들이 영문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이쪽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쯧 혀를 찬 황제가 말했다.

“일단, 내 기사들을 시켜 마무리 짓도록 하겠다.”

“그러십시오.”

“기사들이여, 방해받은 손님들을 정중히 모시도록. ……오해가 없도록 내 기사들이 제대로 설명할 것이다.”

이안의 집무실에 모인 손님들은 하나같이 쟁쟁한 고위 인사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재갈까지 물려 꿇어앉혔으니 파장은 결코 작지 않으리라.

‘제기랄.’

황제는 욕을 뇌까렸다. 고위 인사들을 상대로 폭력을 쓴 것은 스스로가 생각해도 과한 처신이었다.

“부디 근위 기사들이 제대로 제 손님들을 설득시키길 바라겠습니다.”

황제를 돌아본 이안이 서늘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날, 황제의 기사들이 손님들의 포박을 하나하나 풀어 주며 사과와 함께 입막음 조의 뇌물도 전달했다.

하지만 원래 충격적인 소문일수록 새어 나가는 것을 막을 수 없는 법.

기사들의 입단속을 단단히 한 덕에 황제가 이안을 반역도로 의심했다는 소문까지는 나지 않았다.

하지만 황제가 제 동생이 부인과 은밀히 사랑을 나누던 장소를 박차고 들어가, 소스라치게 놀란 성녀를 울리고 말았다는 소문은 암암리에 퍼져 나갔다.

* * *

똑, 똑.

노크 소리가 들리자, 소파 깊숙이 파묻혀 있던 나는 황급히 일어나 이안 옆에 찰싹 달라붙었다.

“네, 들어와요.”

소리 높여 시종에게 말한 나는 접시에서 산딸기를 집어 이안의 입술로 가지고 갔다.

“이것도 드셔 보세요, 여보. 자, 아아.”

입술에 산딸기가 닿은 채 이안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가지가지 한다는 눈빛이었다.

뭐, 왜. 고작 이까짓 것 가지고.

연기를 위해 키스까지 한 마당에 산딸기 먹여 주는 것쯤은 별것도 아니었다. 겨우 이깟 일로 머뭇거린다면 날아간 내 입술의 순결이 울 거다.

시종이 새로운 과일을 테이블에 놓아준 뒤 방을 다시금 빠져나갔다.

나는 그제야 황급히 이안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하아아. 내 집에서도 편히 쉴 수가 없네.”

소파 깊숙이 늘어지며 투덜거리자 이안이 툭 던지듯 말했다.

“왜 못 쉽니까? 시종 앞이라고 굳이 가면 쓰지 마십시오.”

“다른 사람 앞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라고요?”

산딸기를 입안에 털어 넣던 나는 발끈해서 이안을 쏘아보았다.

“절대 안 되죠. 세간에 제 이미지가 어떻게 소문나 있는지 모르시는 거예요? 제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아이린 그레이스는 지금 수도에 우아하면서도 상냥한 성녀로 호평이 자자하다고요.”

“말하긴 좀 그렇다는 것치곤 술술 잘도 말하는군요.”

나는 이안의 얄미운 입술을 노려보았다.

입만 열면 미운 말만 골라 하는 입술이지만, 감촉은 의외로 거짓말처럼 말캉하고 매끈했…….

‘아니, 아니.’

나도 모르게 떠올린 생각에 뺨이 화드득 달아올랐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나.

입맞춤을 연습한 뒤부터 내겐 이상한 버릇이 생겼다.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상황인데도 시도 때도 없이 그때의 기억이 떠오르게 된 것이다.

‘고장이라도 났나. 이놈의 뇌가.’

역시 안 하던 짓을 했더니 탈이 나기는 한 모양이었다.

나는 이안의 입술을 다시금 쏘아보았다.

입맞춤 연기를 할 때마다 지금처럼 고장이 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래도 당분간 더 힘을 내서 저 입술에 익숙해질 필요가 있을 듯했다.

갑자기 말이 없어지자 이안이 의아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시선이 느껴지자 나는 괜히 홱 고개를 돌렸다.

“흠, 그나저나. 부검 결과는 아직 안 나왔나요?”

“안 그래도 오는 길에 보고받았습니다.”

이안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인은 독살이 맞고, 독은 시중에서 뒷골목에서 흔히 구할 수 있는 종류라 추적이 불가능하다고 하더군요.”

“……역시. 그렇군요.”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워드 비첸은 어제, 심문실에서 죽었다고 한다.

심문이 시작되기도 전의 일이었다. 포박당해 심문실로 끌려가던 와중 돌연 거품을 물고 쓰러지더니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에드워드 자신이 심문당하는 게 두려워서 자살을 택한 걸까? 아니면.’

나인이 꼬리를 자르기 위해 수를 쓴 걸까.

어느 쪽이든, 수뇌부라고 생각했던 에드워드 역시 나인이 얼마든지 잘라낼 수 있는 꼬리 중 하나였음은 확실했다.

징그러운 놈들.

나는 소파 깊숙이 몸을 기대며 혀를 찼다.

내 원래 목적은 에드워드와 나인이 황제의 진노를 사게 만들어, 황제 손으로 그들을 처단하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일이 이렇게 흘러가니 처단당한 건 에드워드 혼자뿐이게 되었다.

‘에드워드가 그렇게 된 건 꼴 좋긴 하지만…….’

아쉬운 결과인 건 어쩔 수 없었다.

뭐, 하는 수 없지.

최고의 결과가 나오지 않은 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안타까워하고만 있을 순 없었다.

나는 아까부터 끄적이고 있던 노트를 다시금 들여다보았다. 시종이 들어오기 전 나와 이안이 나누고 있던 이야기가 있었다.

“어떻게든 증거를 찾아야 해요.”

펜 끝으로 종이를 초조하게 두드리며 내가 말했다.

“황제가 선황 폐하를 시해했다는 증거를요.”

황제를 정당하게 황위에서 끌어내려면 그 방법밖엔 없었다.

“십 년도 훌쩍 더 지난 일입니다.”

이안이 무표정으로 말했다.

“그자가 아직까지 증거를 남겨 두었을 리 없지요.”

“뭔가 방법이 있을 거예요.”

나는 노트를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십 년도 더 지난 옛 범죄의 증거를 찾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그런데도 나는 어째서인지 희망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놓기 싫다는 것이 맞는 말이었다.

“반드시 정당한 절차와 방법 같은 걸 찾을 필욘 없습니다.”

이안이 말했다.

“세상엔 무력이라는 방법도 존재하니까.”

“그 이야긴 이미 결론 냈잖아요.”

나는 차갑게 이안의 말을 끊었다.

원작처럼 이안이 성기사단을 끌고 황궁으로 쳐들어가는 일은 막을 것이다. 그러기로 이미 마음먹었었다.

이안은 내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무심히 허공을 내려다보는 옆얼굴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을 정도로 불투명했다.

하지만 나는 그의 머릿속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만약 내가 제대로 된 방법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그는 원래 계획을 강행할 것이다. 이안 에스테반은 남이 좀 설득한다고 오래도록 수립해 온 계획을 뒤엎을 정도로 물렁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럴듯한 방법을 생각해 내야 해. 그럴듯한 방법을…….’

이안을 완벽히 설득할 수 있을 만큼 그럴듯한 방법을 떠올려야 했다.

한참 동안 노트를 노려보며 고민하는데, 문득 뇌리에 한가지 생각이 스쳤다.

“황제가 선황 폐하를 시해했던 장소.”

무언가에 홀린 듯 내가 중얼거렸다.

“그 장소가 어디죠?”

“폐궁 말입니까.”

이안의 말에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폐궁이요?”

“선황 폐하께서 기거하시던 그 궁은 선황 폐하 서거 이후 폐쇄된 지 오랩니다. 지금은 누구도 들어갈 수 없도록 늘 기사가 지키고 있죠.”

“늘 지키고 있다고요? 아직까지도?”

수상한 냄새가 났다. 아주 미심쩍은 냄새가.

나는 심장이 쿵쿵 뛰는 것을 억누르며 이안을 살살 캐 보았다.

“지금까지 지키고 있을 정도면, 그 안에 시해 당시의 증거가 남아 있는 게 아닐까요?”

“복원 마법을 사용해 볼 순 있겠죠.”

이안이 말했다.

제 부모의 복수를 위한 계획을 말하면서도 그의 목소리는 무감하기 그지없었다. 이미 수십 번, 수백 번 생각해 온 것을 되풀이하는 것이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복원 마법?’

심장이 더 거세게 뛰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이미 그 마법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어디서 들었더라…… 아. 그래.’

곧 기억의 실마리가 잡혔다.

당연했다. 복원 마법은 원작의 후반부, 엔딩 직전에 결코 잊기 힘든 존재감을 지니고 등장했었으니까.

‘특정 장소가 지닌 기억을 되풀이할 수 있는 복원 마법이라면, 시해 당시의 장면도 재생해 볼 수 있는 거잖아?’

나는 흥분으로 반짝이는 눈을 한 채 이안을 돌아보았다.

“그럼 사용해 볼 가치가 있는 거 아닐까요? 기사가 지키고 있다고는 하나, 당신이나 조안 경이라면 제압하지 못할 것도 없잖아요!”

“억지로 들어가 마법을 시전해 봤자 얻는 건 없을 겁니다.”

이안이 신문을 읽듯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안은 이미 불과 독으로 싹 망가져 버렸으니까.”

“…….”

“과거의 편린 하나조차 그 안에선 찾아볼 수 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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