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0/161)

90화

이안은 한동안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한겨울처럼 얼어붙은 눈으로 나를 노려볼 뿐.

한참 같은 몇 초가 지난 뒤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알고 있다고?”

낮고 깊은, 얼음 동굴처럼 차가운 목소리.

순간 소름이 등골을 덮쳐 왔으나 나는 간신히 티를 내진 않았다.

담담한 표정을 꾸며 낸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고 있어요. 그때는 엘룬 신께서 선황 폐하의 유해가 묻힌 장소 외엔 알려 주시지 않았다고 했지만, 실은 더 많은 걸 보여 주셨거든요.”

“……하.”

이안이 비스듬히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습니까? 그대도 알고 있단 말이죠.”

성큼, 그가 한 발자국 내게로 다가왔다. 나는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 칠 뻔한 것을 꾹 참았다.

바로 앞까지 다가온 이안이, 내 귓가에 속삭임을 흘려 넣었다.

“내 형님이 살인자라는 걸.”

낮고 음험한 속삭임에 몸이 굳었다. 나는 고개 돌려 가까워진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가까운데도 이안의 눈을 전혀 읽어 낼 수 없었다. 잘 세공된 보석처럼 새파란 눈동자는 사람의 것 같지가 않았다.

“……네.”

나는 입을 열어, 애써 떨림을 걷어낸 목소리로 말했다.

“알고 있었어요.”

“처음부터?”

“처음부터.”

예의 그 무기질처럼 새파란 눈동자가 나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그간 잘도 숨겨 왔군요.”

“그래야 할 것 같았어요. 거기까지 알고 있다는 걸 들키면, 당신이 절 가만두지 않을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이안이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심경의 변화가 생긴 이유는? 잘 숨겨 오던 비밀을 왜 이제야 털어놓는 겁니까?”

“말했잖아요.”

나는 이안을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당신을 돕고 싶어졌다고.”

“나와 함께 반역이라도 해 보시겠다?”

이안이 헛웃음을 머금었다.

“우리가 그 정도로 막역한 사이는 아닐 텐데.”

“그래요. 그런 사이는 아니죠.”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안에게 나는 그저 만난 지 몇 달 된 계약 상대에 불과하겠지만, 사실 난 오랜 연재 기간 동안 그의 모습을 지켜봐 온 독자기도 했다.

그 사실을 모르는 이안으로서는 내 저의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겠지.

그러니 그에게 날 믿을 수 있는 근거를 심어 주어야 했다.

“아무 이득 없이 돕겠다는 건 물론 아니에요. 이안 님을 돕는 건 사실 제게 도움이 되는 일이기도 하거든요.”

“무슨 뜻입니까?”

“암흑 길드 나인에 대해서 알고 계시죠?”

이안이 굳은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말을 이었다.

“그 길드에 실은 제가 약점 잡힌 것이 있어요.”

교묘히 축소한 진실이지만, 그래도 진실은 진실이었다.

내가 나인의 노예인 것까지 밝힐 생각은 없었다. 그렇게 되면 처음 이안의 침대에 나타났던 것 역시 나인 길드원으로서 잠적했던 것임이 드러나게 될 테고, 내가 성녀가 아닌 것까지 들킬 확률이 높으니까.

이안이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약점?”

“거기부턴 개인적인 이야기라 굳이 설명하지 않을게요. 아무튼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전 나인이 몰락하길 누구보다 바라고 있는 사람 중 하나라는 거예요.”

살피는 듯한 눈길이 나를 훑었다.

잠시 뒤, 탐색을 마친 듯 이안이 입을 떼었다.

“나인에 약점이 잡혀 있다, 라.”

“…….”

“무슨 약점인지 몹시 궁금하지만…… 좋습니다. 일단은. 그래서, 그것과 이 이야기의 연관성은?”

“당신의 형님.”

나는 이안을 곧게 올려다보며 말했다.

“라시드 황제 폐하께서 나인과 손을 잡았어요.”

이안의 표정이 순간 굳었으나, 큰 동요가 드러나지는 않았다. 나는 넌지시 물었다.

“알고 계셨나 보군요?”

“어렴풋이는.”

이안이 미간을 좁혔다.

“형님은 뒷세계를 장악하기 위해 무던한 애를 쓰고 있습니다. 지하 무도회를 내버려 두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고. 나인과 연줄이 닿아 있다 해도 놀랄 일은 아니죠.”

“폐하는 고작 그런 이유 때문에 나인과 손을 잡은 게 아니에요.”

“무슨 뜻입니까?”

“그 사람은 당신을 손에 넣고 싶어 해요.”

라시드는 이안에게 지독한 열등감을 품고 있으면서도, 꼭 그만큼 그를 필요로 했다.

이안은 겉으로 보기에는 황제에게 충성하는 부하이자 혈육이었다. 그의 존재 자체가 라시드의 황권에 큰 보탬이 되었다.

라시드는 절대 성군이라고는 말할 수 없었다. 원작이 꽤 진행된 후반에는 폭정도 여럿 펼쳤다. 그럼에도 그의 황권이 견고한 것에는 이안의 공이 컸다.

그러니 라시드는 이안이 아무리 눈엣가시여도 그를 제거할 수 없었다.

만약 이안을 자아 없는 인형으로 만들어 조종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면, 라시드는 무슨 수를 써서든 그 방법을 손에 넣으려 할 것이다.

그게 바로 나인이 라시드를 꼬드긴 수법이었다.

“금지된 사술을 부려서라도, 말이에요.”

“사술?”

이안이 헛웃음을 머금었다.

“형님이 나인과 손을 잡고 내게 사술을 걸고 있단 이야깁니까?”

“네. 허황되게 들리나요?”

“사람의 정신을 지배해 꼭두각시로 만들 수 있는 사술이 존재한다고는 들었습니다만.”

잠깐 생각에 잠긴 이안이 고개를 내저었다.

“형님이 그 정도로 멍청하진 않을 텐데요. 난 단련된 몸입니다. 그까짓 얄팍한 잔재주에 정신을 지배당할 거라곤 생각지 않는데.”

그래. 나도 그렇게 여겼었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안은 사상 최강이라 일컬어지는 기사다. 사술 따위에 쉽게 당할 만큼 나약한 존재가 아니었다. 섣불리 사술을 시도했다간 도리어 시술자가 당할 확률이 높겠지.

나인도 라시드도 그렇게까지 바보는 아니었다. 그래서 그들은 아주 공들여 이 계획을 준비했다.

“솔직히 말할게요.”

문제는, 나도 그들의 계획에 대해 정확히 알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었다. 안타깝게도 원작에서 거기까지 서술되지는 않았다.

“저도 나인이 당신에게 사술을 걸기 위해 정확히 어떤 계획을 꾸미고 있는지는 몰라요. 하지만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분명 어떠한 계획이 진행되고 있다는 거예요.”

거기까지 말한 나는, 한번 심호흡하곤 힘주어 말했다.

“그리고 이대로라면, 그들은 반드시 성공할 테고요.”

이안이 묘한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반드시? 부인께선 나를 너무 과소평가하는군요.”

“아뇨. 전 이 제국 누구보다도 당신의 힘을 믿고 있어요. 그건 장담할게요.”

아무렴, 잘 알고말고.

이안은 정예 성기사부대를 이끌고 황궁을 탈취해 반역에 성공했으며, 사술에 물든 뒤에는 제도를 반파 내 끔찍한 아수라장으로 만든 인물이다.

그걸 모조리 알고 있는 내가 이안을 감히 과소평가할 리 없었다.

내 확신 어린 어조에 이안이 의아한 듯 눈가를 찡그렸다.

“가끔 생각하는 건데. 그대는 마치 나를 예전부터 잘 알고 있던 사람처럼 말할 때가 있습니다.”

“…….”

귀신 같은 인간.

날카로운 지적에 소름이 끼쳤지만,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말했다.

“중요한 건 이거예요. 이안 님을 사술에 빠뜨리고자 하는 음모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 무려 황제와 나인이 가담 중인 거대한 음모라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자들이 실패하도록 제가 당신을 도우리라는 것.”

가만히 내 말을 듣던 이안이 한쪽 눈썹을 치켜 올렸다.

“이유는?”

“나인이 길드의 명운을 걸고 진행 중인 음모예요. 이걸 실패한다면 당연히 길드는 휘청이겠죠. 더 나아가 저는 당신이 나인을 완전히 박살 내 주길 바라고 있어요.”

“그대와 내가 상부상조할 수 있다, 이겁니까.”

“바로 그거죠.”

크게 고개 끄덕인 내가 이어 말했다.

“문제는 정확히 어떤 계획인지를 모른다는 점인데…….”

나인은 철저한 집단이다. 내게만 모든 기대를 걸어 두고 있진 않을 터였다.

분명 또 다른 비장의 수를 준비해 두고 있겠지. 그리고 그건 아마 치명적일 것이다.

“거기부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알아가 볼까요?”

이안이 비스듬히 헛웃음을 지었다.

“급작스레 대책 없어지는군요.”

“그야, 뭐. 제게 대책까지 있었으면 아예 책사로 고용해 달라고 했겠죠?”

뻔뻔스레 말하자 이안은 잠시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묘한 눈길로 나를 훑어볼 뿐.

‘……안 먹히려나?’

강수를 뒀다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이안을 제대로 돕기 위해선 그의 신뢰를 얻어야만 했고, 그러려면 이 정도의 정보는 공개해야 했다.

잠시 뒤 이안이 입을 열었다.

“당신이 아무리 간이 크다지만, 이런 것까지 거짓말을 하진 않을 것 같고. ……뭐. 좋습니다.”

그 대답을 듣는 순간 온몸에서 힘이 풀렸다.

“두 번째 계약 성립이군요.”

“잘 부탁드려요.”

한결 마음이 편안해진 내가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내민 손을 잡는 대신 이안이 말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뭔가요?”

“언령은 사용 금지입니다.”

“어째서요!”

나는 당황해선 따졌다.

여태까지 실컷 설명하지 않았나? 이안이 위험에 빠져 있다는 걸.

그런데 무려 언령 능력자라는 고급 인력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이안이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비실비실 쓰러지는 책사를 두고 싶진 않으니까.”

“책사라고 부를 거면 월급이라도 주세요!”

황당해진 내가 외치자, 더 할 말은 없다는 듯 이안이 등을 돌렸다.

“실은 대련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고 온 참입니다. 그럼 이만.”

“잠깐만요. 조건에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데요!”

“그 조건에 관해선 타협할 마음 없습니다.”

이안이 짜증스레 내게 시선을 던졌다. 늘 보아 오던 불량스러운 태도 그대로였다.

“난 내 방에서 송장 치르고 싶은 생각 없으니까.”

“언령을 못 쓰면 어떻게 이안 님을 도우라는 거죠?”

“그대는 내 부인이 아닙니까.”

이안이 삐딱한 어조로 말했다.

“그 지위만으로도 꾸밀 수 있는 계략은 무궁무진할 겁니다. 다녀와서 다시 얘기하죠.”

시계를 흘긋 돌아본 이안이 정말 바쁘다는 듯 나를 내버려 두고 침실을 떠났다.

몹시 얄미운 작태였으나,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은 내게 영감을 주었다.

‘틀린 말은 아니야.’

세간에 알려진 아이린 그레이스는, 이안 에스테반의 사랑하는 아내.

라시드도 그건 의심하고 있지 않을 터였다. 나인은 라시드의 뒤통수까지 치고 제국을 집어삼킬 야심을 품고 있기에, 내가 자기들이 심어 놓은 요원이라는 사실까진 공유하지 않았겠지.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안의 말이 맞았다.

언령 능력자라는 것 외에도 내겐 큰 무기가 있었다. 이안의 부인이라는 지위 자체가 무기였다.

‘잘만 머리를 굴려 보면…….’

쓸 만한 계획이 나올지도 모르겠네.

침실을 이리저리 가로지르며 나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 * *

주황 머리 시종, 샬로테가 머리를 조아리며 고한 말에 라시드는 턱을 쓰다듬었다.

“그래. 수상한 정황은 일단 안 보인단 말이지. 혹여 네 미숙함으로 놓친 거라면 목숨은 없을 줄 알아라.”

샬로테는 대답 대신 고개를 더 깊이 조아렸다.

어둠 속에서 남자의 인영이 나섰다.

“그럴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폐하. 저희가 자랑하는 엘리트인걸요.”

“이건 몇 번째라고?”

“서른여덟 번째입니다. 꽤 성공작이죠. 실험 끝에 설마 감정을 읽는 능력이 생길 줄이야. 저희로서도 상상치 못한 성과입니다, 38번은.”

남자가 싱긋 미소를 지었다.

“그나저나 우리 38번의 말이 사실이라면 잘되었군요. 이안 님께서 정말 우리 노예를 진심으로 아낀단 말이죠.”

“네.”

고개를 조아리고 있던 샬로테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심 어린 걱정과 염려는 읽기 쉬운 감정 중 하나입니다.”

“좋아. 잘됐어, 잘됐어.”

생각에 잠긴 듯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렇다면 얘기가 더 쉬워지죠. 진심으로 걱정하는 상대가 망가지면, 아무리 이안 님이라 하더라도 마음에 틈이 생길 테니까요. 사술이 완성되기엔 더없이 좋은 조건이죠.”

라시드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계획에 차질은 없어야 할 거요. 에드워드 경.”

남자, 에드워드가 활짝 웃었다.

“여부가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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