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1화 (81/161)

81화

‘……꿈이야.’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전부 이미 지나간 일이라는 걸, 과거에 불과하다는 걸. 난 지금 선 채로 악몽을 꾸고 있을 뿐이라는 걸.

그런데도 기억들에 압도당한 나는 온몸을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그런 나를 도마뱀이 사냥감을 포착한 포식자처럼 빤히 쳐다보았다.

이대로라면 잡아먹힐 거야.

상대는 나보다 훨씬 작은 몸집이었지만, 본능이 그런 경고를 울렸다.

“안…….”

아주 간신히, 나는 입술을 조금 움직였다.

내 반항을 눈치챈 듯 도마뱀이 입을 더 크게 벌렸다.

다음 순간, 수많은 일이 동시에 일어났다.

입을 제 몸집만큼 벌린 도마뱀이 내게 달려들었다.

동시에, 내 미약한 몸부림을 눈치챈 듯 이안이 나를 돌아보았고.

“아이린!”

이안이 외쳤지만, 이번엔 도마뱀이 조금 더 빨랐다.

도약한 도마뱀의 머리가 날 통째로 집어삼킬 듯 가까워졌다. 악몽 같은 기억들이 해일처럼 나를 덮쳤다.

“오지 마!”

질끈 눈 감은 나는 온 힘을 다해 외쳤다. 배 속에서부터 끌어모은 성량이 터져 나왔다.

외침과 동시에, 마치 가위로부터 해방되듯 몸이 다시 움직여졌다. 나는 헐떡이며 기침했다.

“콜록, 콜록!”

매연을 들이마신 듯 목이 따가웠다. 기침하면서도 나는 찡그리고 눈을 떴다. 도마뱀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

사라진 줄 알았던 도마뱀의 머리가 바닥에 풀썩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에서 내게 달려오는 이안이 보였다.

“아이린! 괜찮습니까?”

“전 괜찮…… 콜록.”

이안이 또 날 구해 준 걸까.

이번에야말로 감사 인사를 하려는데, 이안이 소름 끼치도록 무서운 얼굴로 도마뱀을 노려보았다.

“더러운 것이 감히.”

검을 들어 올린 이안이, 꿈틀거리는 도마뱀을 향해 검 끝을 겨눴다. 그리고 다음 순간.

콰쾅!

검 끝에서 검기가 폭발하듯 내쏘아졌다.

“헙…….”

나는 비명을 지르지 않기 위해 입을 틀어막았다.

폭발의 여파로 자욱한 연기가 퍼졌다. 잠시 뒤 연기가 잦아들자, 더 이상 도마뱀은 흔적도 찾아볼 수 없었다. 바닥 역시 폭격을 맞은 듯 처참한 몰골이 되었다.

“괜찮습니까?”

나를 돌아본 이안이 다시금 물었다.

나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목이 좀 따끔거리긴 했지만, 한 차례 기침하고 나니 그조차 괜찮아졌다.

“전 아무렇지도, 콜록. 않아요. 그보다…….”

나는 이안에게 방금 내가 겪었던 현상을 설명하려고 했다. 내 머릿속에 악몽을 불러일으켰던 것을 봐서, 방금 그 도마뱀 역시 몽마의 일종인 게 분명했다.

그런데 다른 목소리가 내 말을 가로막았다.

“……고객님, 당신.”

아. 그러고 보니 이 자리에 리젤로도 있었지.

나는 잠시 존재를 잊고 있던 리젤로를 돌아보았다.

그는 이상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설마…….”

리젤로가 중얼거렸다.

충격받은 것 같기도 하고, 한 대 얻어맞은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보면 감격한 것 같기도 한 얼굴이었다. 곰 인형에게서 볼 거라곤 생각도 못 해 본 다채로운 표정이었다.

왜 저러지. 기묘한 기분에 입을 열어 대답하려던 순간이었다.

“이봐.”

성큼성큼 걸어간 이안이 리젤로의 멱살을 휘어잡았다.

“이, 이안 님?!”

전혀 예상치 못한 행각에 나는 뒤집어질 듯 놀랐다.

반말하는 것까진 이해했지만, 멱살을 잡다니! 말려야 할까 격렬히 고민하는데, 이안이 리젤로에게 경고하듯 속삭였다.

“더러운 호기심 따위 집어치워. 뭘 봤든, 못 본 걸로 하는 게 좋을 거다.”

“……알고 있었군요? 이안 님, 당신도.”

이안에게 멱살이 잡힌 채로도 리젤로는 반질거리는 인형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안이 으르렁거렸다.

“이해 못 했나? 뭐가 됐든 관심 끄라는 이야기다.”

“그 반응에 더 확실해지는데요. 내가 본 것, 진짜가 맞군요?”

도대체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는 걸까.

분명 제국어로 이루어진 대화인데도 나는 둘의 이야기를 하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안이 거칠게 리젤로의 멱살을 내동댕이치듯 뿌리쳤다.

“부인께 접근하지 마라. 감히 그러는 순간 나와 성당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할 테니.”

“무서워라. 나도 마탑과 성당이 전쟁하는 꼴을 보고 싶진 않습니다. 하지만…… 재밌는 건 공유해야죠? 그렇지 않나요?”

“헛소리 집어치우고.”

스릉, 검 뽑는 소리가 살벌히 울려 퍼졌다.

이안은 이미 검을 뽑았었는데?

이 와중에도 의아한 생각이 들어 이안을 돌아본 나는, 기겁하며 입을 떡 벌렸다.

이안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인큐버스를 상대했던 그 검이었다. 아공간에 잠들어 있어야 할 성검 말이다.

“부인께 접근하지 마. 맹세하지 않는다면 지금 여기서 베겠다.”

이안이 리젤로를 겨누며 말했다.

그 순간, 벽에 박혀 있던 보석들이 일제히 튀어나와 이안 주위를 둘러쌌다. 마력 담긴 보석들이 마치 살아 있는 듯 빛을 뿜으며 위협적으로 웅웅거렸다. 이안이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간 당장 공격해 올 듯이.

리젤로가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나는 단장님과 싸우고 싶은 생각은 없는데.”

“맹세해.”

“이러지 마시죠. 마탑을 적으로 돌린다면 성당에서도 골치 아플 텐데요?”

“혓바닥이 긴 놈이군.”

성검의 검신에 흰 빛무리가 어렸다. 인큐버스를 처치할 때 봤던 바로 그 빛이었다.

‘미치겠네.’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는 몰라도, 확실한 건 이안의 눈이 제대로 돌아갔다는 거다.

아무리 세뇌를 당했었다고 해도 이안은 원작에서 최종 보스까지 해 먹은 인물이었다. 수틀리면 설령 상대가 마탑주라 해도 거뜬히 검을 휘두를 작자였다.

게다가 리젤로는 또 어떻고. 그 역시 걸려 오는 도발을 웃으며 넘어갈 호인은 절대 아니었다.

“그, 그만. 그만들 하세요!”

나는 그렇게 외치며 이안 앞으로 뛰어들었다.

나라도 나서지 않으면 이 미치광이들을 아무도 말릴 수 없을 것 같았다.

‘모르겠다. 인간 방패라도 되어야지!’

그런 비장한 각오로 나는 다시금 외쳤다.

“두 분 다 그만하시라고요. 일단 대화로 풀어 볼 생각부터 하질 않고― 콜록. 콜록!”

갑자기 크게 외친 탓일까.

목이 쓰라린 기분에 기침이 터져 나왔다. 하필이면 그 와중에 사레가 들리는 바람에 기침은 더 격렬해졌다.

“콜록, 콜록. 콜록!”

“아이린. 아이린!”

이안이 황급히 나를 돌아보았다.

“괜찮습니까? 제기랄, 역시 무리를…….”

그렇게 중얼거리며 이안이 내 이마를 짚었다.

그저 기침을 좀 한 것뿐인데, 마치 심각한 병자라도 대하는 듯한 반응이었다. 조금 머쓱해진 나는 밭게 기침하면서도 고개 저었다.

“그냥 사레가 좀 들려서, 콜록. 아무튼, 콜록! 저분과 싸우시면 안 돼요.”

나는 가까워진 이안의 귀에 빠르게 속닥거렸다.

“도대체가, 정말 전쟁이라도 일으킬 셈이세요? 당신이 마탑주에게 검을 겨누는 게 무슨 의미인지 아시잖아요!”

이런 엄청난 해프닝이 벌어질 줄 알았으면 이안을 데리고 절대 마탑 근처에도 안 왔다. 차라리 멜로디 양의 저택에서 하염없이 그녀를 기다리는 게 나을 뻔했다.

“돌아갑시다. 일단.”

이안이 다급히 말했다. 평소 그에게서 들어 보기 힘든, 경황없는 목소리였다.

‘설마 나를 걱정하고 있는 건가?’

……내가 기침 좀 한 것 때문에?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추측이었지만, 일단 이안의 입에서 돌아가자는 말이 나온 건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나는 그가 말을 바꿀세라 얼른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일단 돌아가요. 그게 좋겠어요.”

“조금만 견디십시오. 성당까지는 금방이니.”

그렇게 말한 이안이 다시 리젤로를 노려보았다.

“부인께 허튼수작 부릴 생각 마라. 마지막 경고다.”

대답조차 듣지 않고 이안은 나를 돌아보았다. 또 리젤로와 싸우기 전에 얼른 이안을 데리고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실례하겠습니다.”

“네? 뭘― 꺄악!”

이안이 나를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니까, 소위 말하는 공주님 안기 자세로.

“왜, 왜. 왜 이래요?”

심하게 당황한 내가 더듬거렸다.

그러나 이안은 환자는 걷는 게 아니라는 의미 모를 말만을 남기고 날 안은 채 마탑을 빠져나왔다.

‘이 사람…… 가까운 사람이 결핵으로 잘못된 트라우마라도 있나?’

기침 좀 했다고 이렇게까지 환자 대우를 받는 건 난생처음이었다.

‘어쩐지, 과보호…… 를 받는 기분이기도 하고.’

이안이 나를 과보호하다니.

세상에서 제일 어울리지 않는 문장이었다.

그 이질감 때문일까, 가슴이 괜히 간질거려 왔다. 꽃가루 철을 맞은 알레르기 환자처럼.

* * *

그날 밤, 성당으로 돌아간 나는 시종들로부터 아주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부드러운 미음에, 달콤한 꿀물. 심신 안정에 도움이 된다는 음악까지.

푹신한 침대에 누워 그 모든 호사를 받고 있자니, VIP실에 입원한 대기업 회장 부럽지 않았다.

‘우여곡절 많은 하루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된 건……가?’

비록 이안과 리젤로가 한판 붙을 뻔한, 소름 끼치는 사건이 있었지만, 어떻게든 잘 얼버무리듯 마무리되었다.

악마 도마뱀에게 습격받을 뻔했지만 이안이 제때 구해 주기도 했고.

가장 중요한 용건이었던 해주약에 대한 정보도 얻어 냈다.

비록 심장 건강은 많이 해쳤지만, 따지고 보면 오늘 외출은 성공적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게 오늘 하루에 대한 평가를 내리던 나는 뜻밖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아이린 님, 그 소년 말이에요.”

“그 소년? ……아아.”

아네트의 말에 갸웃한 나는 곧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소년’이라 함은 엘리엇을 말하는 거였다.

세례를 받기 전이니 아직 그 아이에겐 이름이 없었다. 다만 출중한 실력과 외모 덕에 벌써부터 ‘그 소년’이란 이름으로 성당 내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고 들었다.

‘그러고 보니 엘리엇을 한 번도 보러 가지 못했네.’

그래도 명색이 원작의 남주인공인데, 내 일에 바빠 너무 신경 쓰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그분이요. 이번 세례식에 그분도 참석하시는 걸로 이야기가 되었거든요.”

그렇게 되었구나.

나는 또 고개를 끄덕였다.

원작보단 빨랐지만, 세례를 받는 건 엘리엇에게 무조건 좋은 일이었다.

“그런데, 그분께서 대모로 아이린 님을 지목하셨어요.”

“……네?”

뭐라고?

나는 아네트를 향해 눈을 끔뻑거렸다.

뭘 지목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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