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6화 (76/161)

76화

“부인께서도 제가 원하는 것 하나는 들어주셔야 합니다.”

“……네?”

“우리가 만난 지 170일이나 되는 기념일이니까요.”

제가 하는 말을 그대로 읊으며 싱긋 웃는 이안의 모습에, 아이린은 묘한 소름이 등골을 스치는 것을 느꼈다.

“물…… 물론이죠.”

아이린은 애써 환한 미소를 지었다.

“사랑하는 남편이 원하는 일인데, 제가 뭔들 안 들어드리겠어요?”

겉으론 그렇게 말하면서 아이린의 속내는 울상이었다.

‘대체 뭘 요구하려고!’

역시 뭐 하나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다. 속으로 이안을 몹시 원망하면서도 아이린은 일단 안심했다.

아무튼 마탑 입성까지는 성공한 것이다. 비록 이 남편이라는 이름의 족쇄를 찬 채로지만.

“약속하신 겁니다.”

이안이 픽 웃으며 재차 말했다. 아이린의 등골이 좀 더 서늘히 식었다.

“그…… 힌트를 좀 주실 순 없을까요? 뭘 요구하실 건가요? 미리 알아 두면 제가 더 잘 준비할 수 있잖아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부인께선 언제나 부인 그 자체만으로 완벽하니까.”

“하하하…… 부끄러워라. 그러지 마시고 귀띔만 살짝 해 주세요. 제게 뭘 바라세요? 작은 힌트만이라도 안 될까요?”

“안 됩니다.”

“이안 님!”

그 모습을 바라보며 시종들은 몽롱한 눈빛을 했다.

실랑이하는 모습마저도 그들에겐 애정 어린 말다툼으로 보였다. 이안이 누군가와 저런 식으로 맥락 없는 대화를 하는 이가 절대 아님을 알고 있기에 더 그랬다.

‘어쩜. 정말 금실 좋은 분들이야.’

‘이런 분들을 모시다니 난 정말 행운아지!’

‘보는 것만으로도 달달해진다.’

주황 머리를 한 시종, 샬레트만이 빤한 시선으로 부부를 관찰했다.

* * *

통칭 마탑이라 불리는 쌍둥이 탑이 양쪽으로 우뚝 서 있는 로제나 거리.

거리의 초입에 들어선 순간부터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와아.’

별세계란 게 이런 걸 말하는 것일까.

연인들을 위한 축제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도록, 거리 전체가 핑크빛과 하트로 범벅되어 있었다.

곳곳에 나와 있는 마탑의 직원 마법사들에게도 하트 모양 장식이 주렁주렁 달려 있었다.

‘지독하다. 지독해.’

지독하리만큼 콘셉트에 잡아 먹힌 광경에 나는 혀를 내둘렀다.

과연 시작된 지 고작 몇 년 만에 수도의 명물로 자리 잡은 축제다웠다.

거리까지 나온 마법사들이 갖가지 마법 물품을 판매하고 있었다. 호객하는 모습만 봐선 마법사인지 베테랑 상인인지 알 수 없을 정도였다.

“마탑의 특별한 비법으로 만든 향수를 시향해 보세요! 여러분의 매력을 두 배로― 어머나.”

숙달된 호객 멘트를 읊던 마법사가 우리를 발견하곤 화들짝 놀랐다.

그래. 성기사단장과 성녀를 손님으로 맞아 본 경험은 없으시겠지.

민망함을 숨기며 나는 최대한 활짝 미소 지었다.

“안녕하세요! 향수병이 참 예쁘네요. 시향해 볼 수 있을까요?”

“어머! 그, 그럼요! 로미나 씨! 여기 시향지, 빨리요!”

마법사가 황급히 동료를 불렀다. 시향하는 동안 두 마법사가 열띤 목소리로 조잘거렸다.

“매혹적인 향으로 이름난 재스민의 매력을 한껏 살린 향수예요. 다채롭고 고급스러운 허브들에, 저희 마탑만의 비법 재료도 살짝 섞었답니다. 한 번만 뿌리셔도 은은한 잔향이 최대 삼 일까지 갈 거예요.”

“어디 한번 맡아 볼게요. ……으음!”

시향지를 코 가까이에 대고 가볍게 숨을 들이마시자 독특한 향기가 났다. 꽃다발에 코를 묻은 듯 향긋한 것이 기분 좋았다.

“정말 향긋하네요. 이안 님도 맡아 보실래요?”

“……예.”

이안이 딱딱히 굳은 얼굴로 내가 내민 시향지를 받았다. 아마 태어나서 처음 쥐어 보는 물건일 테다.

시향지를 코로 가져가는 이안의 모습이 아주 어색해 보였다. 뭘 해도 여유가 흘러넘치던 사람이다 보니 이런 모습도 꽤 신선했다.

속으로 풋 웃은 나는 일부러 눈을 깜빡거리며 물었다.

“어때요? 여보. 제가 두 배 더 매력적으로 보이나요?”

“…….”

이안이 잠시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차가운 눈빛에도 나는 얼어붙지 않았다. 어차피 여기는 사람들 한가운데. 이안은 싫어도 내 장단에 맞춰야만 할 터였다.

“글쎄.”

그때 이안이 비스듬히 입꼬리를 당기며 말했다.

내가 예상하던 반응이 아니다. 당황하던 찰나, 이안이 말을 이었다.

“평소 그대에게서 나는 향기와 다른 걸 모르겠습니다만.”

“어머나!”

“어머, 어머. 세상에.”

맙소사.

머리끝까지 닭살이 돋은 나는 멍한 눈으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내가 대답하지 못하자, 얼핏 다정해 보이는 이안의 눈동자 안으로 옅은 비웃음이 엿보였다.

‘도대체 언제 이렇게 진화한 거야.’

피부만 닿아도 딱딱하게 굳던 남자는 어디로 가고, 이젠 여자만 백 년 정도 꼬셔 본 것 같은 카사노바만 남아 있었다.

“다, 당신도 참.”

나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마주 웃었다.

“제게 너무 푹 빠지신 거 아니에요? 차암. 몰라.”

질 수 없지.

나는 몸을 배배 꼬며 이안의 가슴팍을 콩 때렸다. 이런 식으로라도 이안을 때려 보는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이안의 눈빛이 가까이 선 나만 알아볼 수 있도록 살짝 변했다. 어디까지 가나 한번 지켜보겠다는 눈빛이었다.

나는 그 눈을 못 본 체하고 다른 곳을 향했다.

여기 말고도 주변에는 볼거리, 즐길 거리가 엄청나게 많았다. 나는 그것들에 일일이 관심을 보이며 기웃거렸다. 일단은 최대한 축제를 즐기는 척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진심으로 즐길 수 있는 사람이 있을진 모르겠지만.’

축제는 사람들로 바글거렸지만, 우리 주변은 마치 둥근 공터처럼 비어 있었다. 다들 몇 발자국 떨어져서 공연이라도 보듯 우리를 관람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애써 그 시선들을 무시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와, 저긴 또 뭐죠? 줄이 엄청 서 있네요!”

축제에 신난 아가씨 연기에 몰입하며 나는 한쪽을 가리켰다. 뭐 하는 곳인지는 몰라도 이미 그곳은 줄 서 있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사람과 부대끼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이안이 질색할 만한 공간이었다. 그래서 내 목적에는 그만큼 안성맞춤이었다.

오늘은 최대한 이안의 혼을 쏙 빼놓는 것이 내 목표였다. 물론 이 인간은 웬만해선 방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봐야 했다.

“얼른 가 봐요!”

이안을 재촉하자 그는 반항도 못 하고 질질 끌려왔다.

가까이 가 보니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인 곳의 중심에 마법사 한 명이 우뚝 선 채 뭔가를 소개하고 있었다.

“마탑이 개발한 문제의 그 약! 신께서 노할 금지된 발명품! 사랑의 묘약을 드디어 여러분께 소개합니다!”

열띤 목소리로 마법사가 외치자 구경꾼들이 흥분하며 손뼉 쳤다.

“단 한 방울! 처음 마주친 사람이라도 이거 한 방울만 마시게 하면 당신에게 사랑을 느끼게 할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사람의 마음을 가지고 놀 수 있게 하는 천하의 요망한 마법약!”

“정말인가요? 정말 이거 한 방울이면 된다고요?”

“그럼요! 효과는 백 퍼센트 보증합니다. 효능이 없을 시 전액 환불까지! 이런 기회 두 번 다시는 없습니다!”

“세상에! 진짜인가 봐!”

사랑의 묘약이라니.

정말 가지가지 하는군. 나는 살짝 식은 눈으로 호객 행위에 열심인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마탑주는 이렇게까지 해서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싶은 걸까?

‘하여간 원작 공인 까마귀 아니랄까 봐, 반짝이는 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돈 귀신이라니까…… 음. 그나저나, 진짜 효과가 있나?’

아무리 마탑의 마법이 대단하다 해도, 사람의 마음까지 좌지우지할 수 있다고?

나는 미심쩍은 눈으로 마법사가 치켜든 약병을 바라보았다. 순간 마법사와 내 눈이 마주쳤다.

“엘룬 신께서 알게 되시면 노발대발하며 금지하실 바로 그 마법약…… 허, 헙?”

말 중간에 나를 발견한 마법사가 휘청거렸다. 마법사의 눈이 지진을 일으키다가 나와 이안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서, 서, 성녀님?”

“어? 성녀님?”

“성녀님이라고?”

구경하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나를 돌아보았다.

마법사가 황급히 어색한 미소를 걸쳤다.

“오, 오해 마십시오. 방금 제가 한 말은 그냥 손님들께 어필하고자 주접을 좀 떨어 본 것으로…….”

성녀 앞에서 엘룬 신을 운운한 게 퍽 찔렸는지 마법사의 낯빛이 하얬다.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엘룬 교가 얼마나 화끈한 종교인지 모르는 모양이다. 거하게 스캔들을 터뜨린 성기사단장과 성녀가 대성당 안에서 대놓고 신방을 차려도 환영하는 집단인걸.

“알죠. 이런 걸로 일일이 정색할 만큼 저희가 꽉 막힌 집단은 아니랍니다.”

“정말 듣던 대로 마음이 하해와 같으시군요……! 아, 혹시 성녀님께서도 궁금하신가요? 시연해 보실 수 있도록 도와드릴까요?”

나는 잠깐 고민에 잠겼다.

진짜 사랑을 만들어 낼 수 있는 마법이 있다고는 믿지 않았지만, 그래도 궁금하기는 했다. 적어도 조금 정도의 호감을 느끼는 효능은 있는 게 아닐까?

“이안 님. 어때요? 잠깐 들러 볼―”

이안을 재촉하려던 나는, 그가 저 먼 반대편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섭도록 얼어붙은 표정으로.

‘뭐지?’

이안이 노려보는 방향을 향해 시선을 던졌으나, 보이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조심스레 이안을 불렀다.

“이안 님?”

“……아.”

그제야 이안이 먼 곳에서 시선을 떼었다.

“무슨 일이세요?”

“아무것도. 뭔갈 본 것 같은데, 착각이었을 겁니다.”

가볍게 고개 저은 이안이 나를 돌아보았다.

“왜 불렀습니까?”

“저것 때문에요. 저 마법약, 시연해 보고 싶어서요!”

내가 가리킨 곳에서는 이미 마법사와 함께 몰려들어 있던 사람들이 모두 우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한가운데서 커다란 현수막을 발견한 이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것을 읽었다.

“좋아하는 그이의 가슴에 짜릿짜릿 전기 충격을?”

이안이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마법약의 캐치프레이즈를 읊었다. 문구의 내용과 그의 목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안 어울렸다.

“네, 네. 바로 그 약이요.”

“좋아하는 사람의 심장에 왜 전기 충격을 줘야 합니까?”

이안이 굳은 얼굴로 내게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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