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그런데 보양식 공세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용의 발톱을 겨우 해치웠는데, 또 시종들이 음식 담긴 트레이를 밀고 들어왔다.
다행히 이번 것은 평범하게 채소 같은 생김새를 하고 있었다.
“달맞이 산에서 일 년에 단 일곱 개 자란다는 전설의 약초입니다. 한 뿌리만 먹어도 그해 잔병치레는 걱정 없을 만큼 엄청난 면역력을 선사한다고 합니다.”
“정말 엄청난…… 약초네요.”
나는 새싹처럼 생긴 약초를 멍하니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게 귀한 게 내 입에 들어가도 되는 거야?
그러나 한 시간쯤 뒤엔 그런 고민도 무색해졌다.
심해에서 잡아 왔다는 전설의 물고기, 설산에서 채취해 왔다는 전설의 눈 결정…… ‘전설’이란 수식어가 붙은 온갖 보양식들이 트레이에 탄 채 내 방으로 굴러들어 왔다.
‘왜 이러는 거야!’
당혹스러운 보양식 세례에 나는 얻어맞은 사람처럼 넋이 나갔다.
플라세보 효과인지, 아니면 정말 그것들이 효과가 있는 건지, 먹을 때마다 기운이 펄펄 샘솟는 듯한 느낌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이안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도무지 알 수 없었다.
‘이것도 애정 과시의 일종인가?’
나는 내 부인의 건강을 위해 이만큼이나 돈을 쓰는 사랑꾼이다, 뭐 이런 어필인 걸까?
그렇다면 못 어울려 줄 것도 없지만, 아무리 그래도 너무 배가 불렀다. 다행히 위가 천장까지 꽉 차기 전에 보양식 공세는 끝이 났다.
배부르니 잠이 온다는 핑계로 주방장과 시종들을 몰아낸 나는 드디어 홀로 남았다.
‘마침내……!’
아예 문을 잠가 놓은 나는 화장대로 걸어갔다.
열쇠로 제일 아랫단 서랍을 열자, 어젯밤 숨겨 놓았던 재료들이 그대로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다시금 그것들을 화장대 위에 늘어놓은 나는, 깨끗이 손을 씻고는 경건한 마음으로 그 앞에 앉았다.
‘자아. 제조법 자체는 어려운 게 아니야.’
나는 머릿속에 꼼꼼히 적어 놓은 레시피를 떠올리며 심호흡을 했다.
이미 수십, 수백 번 시뮬레이션한 제조 과정이었다.
우선 정수를 잘 계량한 나는, 그것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제조에 돌입했다.
약을 만드는 일 같은 건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나였지만 딱히 막힘은 없었다. 그저 원작 속 리젤로가 만들어 놓은 레시피를 따라 하기만 하면 됐다. 여주인공이 그랬듯이.
‘우선 오르비 열매를 정수에 5분간 담은 다음…….’
그냥 으깼다간 폭발할 수 있으니 정수에 담그는 작업은 필수다.
라고, 원작 속 리젤로가 여주인공에게 충고하던 말이 떠올랐다.
리젤로는 일부러 겁을 줌으로써 여주가 자신에게 대신 만들어 달라며 의지해 오길 바랐었지만, 독립적인 우리의 여주는 조언 고맙다며 혼자 해주약을 완성해 버렸었지.
그 장면을 떠올리며 나는 아주 신중히 계량과 배합 과정을 거쳤다.
정령화의 뿌리를 고르고, 카쿨타 진액을 시계 방향으로 세 번, 반시계 방향으로 다섯 번 젓고.
모든 과정을 완수하고 나니 순식간에 한 시간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을 훔치며 나는 유리컵 안을 들여다보았다.
한 시간가량 정제하고 섞은 모든 재료가 걸쭉한 액체가 되어 유리컵 안에 전부 들어가 있었다.
액체는 꼭 구정물처럼 지저분한 색깔이었지만, 나는 실망하지 않았다.
‘이제 다섯 시간 동안 햇빛을 쐬어 주면 돼.’
4시간 59분도, 5시간 1분도 안 된다. 정확히 5시간 0분이어야 했다.
그러고 나면 액체가 황금빛으로 끓어오를 터였다.
나는 설레는 마음으로 유리컵과 함께 뻐꾸기시계를 테라스로 가져갔다.
마침 날씨가 좋았다. 적당한 산들바람이 기분 좋게 불어오는 것을 느끼며 나는 유리컵에게 햇빛을 쬐어 주었다.
그렇게 한 시간.
두 시간.
세 시간…… 네 시간.
마침내, 다섯 시간가량이 흘렀다.
‘지금이야.’
미리 정교히 맞춰 놓은 시계를 들여다보며 나는 미친 듯이 두방망이질하는 심장을 진정시켰다.
테라스에 나온 지 정확히 4시간 59분 30초가 되는 시간. 완성까지는 고작 30초가 남은 상황이었다.
‘제발!’
유리컵을 내려다보며 나는 검은 천을 부여잡았다. 황금빛으로 끓어오름과 동시에 이 천을 덮어 햇빛을 차단해야 했다.
4시간 59분 48초. 나는 간절한 눈으로 유리컵을 들여다보았다. 배 아파 낳은 아이가 처음 초등학교에 들어가는 모습을 봐도 이렇게까지 긴장되진 않을 것 같았다.
4시간 49분 52초.
57초.
그리고, 마침내…….
시계에서 뻐꾸기가 튀어나왔다.
뻐꾹, 뻐꾹!
‘응?’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액체는 아직 구정물빛이었다.
뻐꾹, 뻐꾹!
뻐꾸기가 재차 튀어나와 울어 댔지만, 여전히 유리컵 안 액체는 묵묵부답이었다.
‘해주약아……?’
나는 애타는 눈으로 유리컵을 들여다보았다. 여전히 걸레 빤 듯 지저분해 보이는 그 안을.
“…….”
침묵과 정적 속에서 30초가 더 흘렀다. 여전히 액체는 구정물 색이었다.
1분이 더 흘렀다. 아직 변함이 없었다.
5분이 흐른 뒤, 나는 마침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미친…….”
해주약 제조에 실패했다는 것을.
액체는 황금빛으로 끓어오르기는커녕, 이제 아예 젤리처럼 굳어 버렸다.
탱글탱글해 보이는 구정물색 젤리를 바라보며 나는 절망했다.
‘어째서.’
왜, 성공하지 못한 거야. 어째서!
‘모든 게 완벽했는데.’
재료도, 레시피도 완벽했다. 레시피가 등장하는 대목을 페이지 번호까지 기억하는 나이니 틀릴 리가 없었다.
몇 분간 더 망연자실해 있던 나는 돌연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가 잘못됐다. 그것도 아주 크게.
하지만 마법에도, 약에도 문외한인 내겐 오류를 파헤칠 능력이 없었다.
“하아…….”
질끈 눈을 감은 나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나는 실패했다. 하지만 이 실패를 발판 삼아 다음엔 반드시 성공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성공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단 한 명뿐이었다.
레시피의 창시자. 마탑주 말이지.
‘젠장.’
구정물 젤리가 든 유리컵을 꾹 쥔 채 나는 격렬한 고민에 잠겼다.
리젤로에게 찾아가 도움을 청하는 것 자체는 그렇게까지 꺼려지진 않았다.
물론 돈이나 다른 대가를 요구하긴 할 테지만, 그렇게라도 해서 해주약을 완성할 수만 있다면 무슨 대가든 싸게 느껴질 터였다.
원작 속에서도, 실제 만남에서도 리젤로는 지나치게 상도덕 없는 대가를 요구한 적이 없었기에 그 부분은 신뢰가 되었다.
‘그래. 일단 찾아가 보자.’
속전속결. 나는 결단을 내린 즉시 테라스를 나섰다.
이안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대놓고 마탑에 입장할 수는 없으니, 일단 멜로디 양의 저택을 찾아갈 생각이었다.
* * *
한 시간 뒤.
나는 눈앞에 서 있는 초로의 노신사를 망연자실히 바라보았다.
“실례지만 뭐라고, 하셨죠?”
“주인님과 아가씨께선 보름간 저택에 부재중이라 말씀드렸습니다, 성녀님.”
히아신스 가문의 집사가 송구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성녀님께서 찾으셨다고 아가씨께 연락을 넣을까요? 아마 보름이면 답신이 도착할 겁니다.”
“보름이나요?”
보름이라니. 나인이 날 겁박하고 있는 이 상황에선 시간이 금이었다.
멜로디 양을 통해 리젤로를 만난다는 선택지가 사라진 나는 머릿속이 멍해졌다.
‘그럼 이제 리젤로를 어떻게 찾아가지……?’
선택지는 사실 존재했다.
첫째, 직접 마탑에 찾아간다.
가장 간단한 선택지였으나, 그랬다간 이안이 날 가만두지 않을 터였다.
둘째, 리젤로의 가짜 신분인 레이 모나한을 찾아간다.
이건 더 최악인 선택지였다. 표면적으로 나와 레이는 별 친분이 없다. 코델리아와의 살롱에서 몇 번, 지난번 길거리 카페에서 한 번 마주친 게 전부였다.
그런데 굳이 레이를 찾아간다니. 유부녀인 내 상황을 생각해 봤을 때 누가 봐도 이상하게 여길 터였다. 이안에게 쥐잡듯이 추궁당할 건 덤이었다.
‘젠장. 어쩌면 좋지.’
낯빛이 흙색으로 죽은 채 생각에 잠긴 나를 집사가 걱정스레 쳐다보았다.
나는 털레털레 멜로디 양의 저택을 뒤로한 채 다시금 마차에 올라탔다.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 보아도 그나마 그럴싸한 선택지는 저 둘밖엔 떠오르지 않았다.
* * *
그날 저녁.
이안은 막 수하에게서 올려 받은 보고서를 읽으며 생각에 잠겼다.
정예 기사단 육성은 예정대로 진행되고 있었다. 전국 각지에서 오로지 실력을 기준으로 선발한 엘리트 기사들은 이안의 명령 한 마디에 죽는시늉도 할 터였다.
“신분 위장도 완벽히 마쳤습니다.”
루시안의 말에 이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제가 간자를 심어 둔 이후, 가장 귀찮은 건 이 정예 기사단을 황제의 눈으로부터 숨기는 일이었다. 기사들은 겉으로는 제각기 다른 부대원으로 존재하면서, 해가 지고 난 뒤에는 이안 휘하에서 비밀 훈련에 열중해야 하는 고된 일상을 살고 있었다.
“그래. 그쪽 보고는 됐고.”
보고서를 접은 이안이 툭 던지듯 물었다.
“부인께서는?”
루시안은 남몰래 미소를 머금었다.
요즈음 그의 상사는 틈만 나면 아이린의 안부를 물었다. 특히 그녀의 건강 상태에 지대한 관심을 보이곤 했다.
“오늘 들어간 보양식은 전부 잡수셨다고 합니다. 아마 식당에도 곧 나타나실 겁니다.”
“남기진 않았겠지?”
“물론입니다.”
루시안은 속으로 또 쿡쿡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아이린 님의 건강이 걱정되시나?
그때 식당 안으로 인기척이 들어섰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든 이안은, 이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좋은 저녁이에요.”
들어선 것은 그의 계약 아내, 아이린 그레이스였다.
그러나 오늘은 어딘가 평소와 달라 보였다. 짙은 남색의 실내용 드레스 때문일까. 묘하게 고혹적인 빛이 감도는 드레스는 아이린이 평소 걸치는 옷이 아니었다.
“여보.”
어쩐지 평소보다 성숙한 분위기의 아이린이 눈웃음을 치며 다가왔다.
“내일이 무슨 날인지 아시나요?”
당황한 탓인지 입천장이 메말랐다.
마른 입안을 한 차례 축인 이안이 되물었다.
“……내일,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