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6화 (66/161)

66화

“…….”

마차 안이 숨 막히는 정적으로 가라앉았다.

이안은 나를 밀치지도, 그렇다고 끌어당기지도 않았다.

이 정도 반응으로는 아무것도 파악할 수 없다. 긴가민가해하며 나는 조금 더 고개를 그에게로 가까이했다.

‘……피부 좀 봐.’

지나칠 만큼 가까워지자 괜한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가령 남자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투명한 피부라거나, 유려하면서도 단단하게 이어지는 턱선이라거나.

‘늘 생각하는 거지만, 얼굴 하나는 참.’

수백 가지 흠을 잡아도 얼굴만큼은 욕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원작 남주인공인 엘리엇과 나란히 놓아도 오히려 이쪽이 더 빛이 날 만큼.

여주의 첫사랑이자 작품의 최종 보스가 별 볼 일 없으면 곤란하니 신경 쓴 건 이해되지만, 이 정도면 심각한 설정 과잉이었다.

미술품을 감상하듯 나는 잠시 넋을 놓았다.

그 바람에, 몇 초 뒤에야 내 코가 거의 닿을 듯 이안의 뺨에 가까워져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

코앞까지 다가온 이안을 바라보며 나는 내심 당황했다.

‘안 밀쳐?’

여태 이안의 반응을 생각해 봤을 때, 이 정도로 이성이 가까이 접근하면 밀치거나 정색하는 게 당연했다.

마차 안에 있는 건 우리뿐이니, 타인의 눈을 의식해 부부 연기를 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이안은 미동도 보이지 않는다.

설마 진짜 꼭두각시인가?

오소소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며 나는 이안의 벽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눈은 단단히 응축된 사파이어처럼 굳어 있었다.

이제 꽤 오래 이안과 함께 지냈는데도 읽는 것이 불가능한 눈빛이었다.

“……이건.”

마침내 이안이 입을 열었다. 지나치게 가까운 곳에 있는 입술이 나지막이 속삭임을 뱉었다.

“무슨 의미입니까?”

무슨 의미?

나는 그의 말을 곱씹으며 눈을 깜빡거렸다.

이런 물음은 예상 밖이었다. 진짜 이안이 보일 법한 반응도 아니었고, 가짜 이안이 연기할 법한 반응도 아니었다.

당혹감에 멍한 눈으로 이안을 올려다볼 때였다.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마차가 부드럽게 멈춰 섰다.

동시에 바깥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린 님! 드디어 귀환하셨― 아이고! 어머나! 죄송해요!”

마차 밖에서 아네트가 소스라치는 소리가 들렸다.

황급히 사과하는 걸 보니, 마차에 난 창문 안으로 우리 모습을 본 모양이었다.

이안과 잔뜩 밀착해 있는 이 꼬락서니를 들켰다고 생각하니 온몸에 확 열이 올랐다.

“죄, 죄송해요. 일어나야겠― 으앗.”

너무 급하게 일어난 탓에 발이 꼬였다.

앗차, 하는 찰나의 순간 내 몸이 이안에게로 기울어졌다.

‘안 돼!’

나는 본능적으로 팔을 뻗었다. 하지만 중력 탓에 이미 몸이 완전히 쓰러진 뒤였다.

찰나의 노력이 무색하게도 나는 볼썽사납게 이안의 몸 위로 쏟아지고 말았다. 동시에 입술이 따뜻하고 단단한 무언가에 맞닿았다.

“헉, 죄송. 죄송해요.”

내 입술이 부딪힌 것은 이안의 목이었다.

정신없이 사과하며 고개를 든 나는 충격적인 광경을 목격했다.

이안의 목에, 오늘 아네트가 공들여 골라 준 연분홍빛 립스틱 자국이 꽃잎처럼 남아 있는 모습을.

“이, 이게 왜 여기에…… 죄송해요. 얼른 닦아 드릴게요!”

기사답지 않게 투명한 피부 탓에 연분홍빛 색채를 띤 립스틱 자국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하필이면 이런 자국을 세상에서 제일 꺼릴 것 같은 사람에게 묻어 있으니 어쩐지 더욱더 선정적으로 느껴졌다.

시각적인 충격에 몹시 당황한 나는 사과를 거듭했다.

“정말 죄송해요. 금방 닦아 드릴게요.”

손바닥으로 황급히 이안의 목덜미를 문질러 보았지만, 립스틱 자국은 지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넓게 번졌다.

‘이, 이게 왜 안 지워져.’

립스틱 주제에 이렇게까지 안 지워지다니.

알고 보니 이 세계의 화장품 제조 기술은 굉장한 발전을 이룩한 모양이었다.

‘어쩐지 아무리 차를 마셔도 입술에서 안 지워지더라니…… 아니, 이게 아니라.’

헛생각이나 할 때가 아니다. 립스틱 자국이 제멋대로 번진 이안의 목덜미를 내려다보며 나는 경악에 휩싸였다. 아까보다 훨씬 더 사태가 심각해졌다. 이젠 거의 난잡해 보이기까지 했다.

제국이 창설된 이래 최강이라는 설이 붙는 신실한 성기사단장에게 난잡이라니. 절대 붙으면 안 될 수식어였다.

“……대체 뭐 하는 겁니까.”

마침내 이안이 입을 열었다.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듯 잔뜩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제, 제 립스틱 자국이 여기 묻어서요. 진짜 금방 닦아 드릴게요.”

“됐습니다. 그까짓 게 뭐라고.”

이안이 저런 말을 할 수 있는 건 지금 자신의 모습을 못 봐서일 것이다. 고작 립스틱 자국 하나 때문에 지금의 이안은 성기사단장이 아닌 길거리 제비처럼 보였다. 좀 심하게 잘생긴.

문지르느라 흐트러진 제 목깃을 추어올리며 이안이 차갑게 나를 노려보았다.

“그대처럼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은 난생처음 봅니다.”

“…….”

“갑자기 답지 않은 행동을 하질 않나, 남의 목을 닳을 기세로 문지르질 않나.”

“……아니, 저는 정말 걱정이 돼서.”

“대체 하루 종일 그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들이 굴러다니고 있는 건지.”

대놓고 받은 사고뭉치 취급에 나는 순간 울컥했다.

다 자기 이미지를 생각해서 한 일인 줄도 모르고……!

아무래도 이렇게 얄미운 말만 골라서 하는 걸 보면,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이안은 틀림없이 진짜 본인인 모양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아까 내가 감행했던 수작이 떠올라 눈이 질끈 감겼다.

그래. 나라도 이안이 갑자기 내 옆에 가까이 달라붙어 은근한 시선을 보냈다면 이 사람이 약을 먹었나 의심했을 것이다.

뒤늦게 곱씹다 보니 서서히 얼굴에 열이 올랐다.

“……제게도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어요.”

“그러셨습니까.”

누가 들어도 안 믿는 목소리였다.

진지하게 해명하기 위해 입을 연 순간이었다.

“어차피 그대에게 들을 만한 사정이 많기는 합니다.”

차가운 미소와 함께 이안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암흑 경매엔 왜 참석하려 했으며, 내게 비밀로 해야 할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전부 다, 찬찬히 들을 수 있다면 좋겠습니다만.”

나는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지구에 존재하는 묵비권이라는 개념이 지금처럼 절실히 필요한 적은 처음이었다.

* * *

“제기랄!”

거친 욕설과 함께 날카로운 파열음이 울렸다.

산산이 부서진 유리 액자의 파편이 뺨을 스쳤지만, 4번은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미동도 없었다.

“일 처리를 얼마나 개같이 했으면 이따위로 처참하게 실패할 수가 있지?”

노기 어린 음성에 4번은 고개를 숙였다.

말 그대로 오늘 그가 겪은 것은 최악의 실패였으므로, 4번이 내놓을 수 있는 변명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 계집은 대체 뭐란 말이냐. 노예 주제에 감히 우리를 배반하다니. 당장 폐기 처분하도록 해라!”

화를 주체하지 못하고 간부가 고함을 내질렀다.

고개를 조아리면서도 4번이 입을 열었다.

“폐기 처분은 쉽습니다. 76번의 몸에 새겨진 낙인만 발동시키면 되니까요. 하지만, 주인님. 다시 생각해 보십시오.”

“누구에게 훈계하는 거냐. 더러운 놈이!”

짝, 소리와 함께 4번의 뺨이 반대편으로 돌아갔다. 얻어맞은 뺨이 벌겋게 부어오르기 시작했지만 4번은 아무 일도 당하지 않은 것처럼 말을 이었다.

“76번은 오늘 일이 나인의 계획이었다는 것을 모를 겁니다. 공유한 적이 없으니까요.”

오늘 4번이 겪은 실패의 주역은 단연코, 아이린 그레이스라는 껍데기를 뒤집어쓴 나인의 칠십육 번째 노예였다.

공들인 계획이었다.

먼저 암흑 경매에 사교도들이 참석한다는 소문을 넌지시 흘렸다. 이안 에스테반이 오랜만에 수도에 붙박여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실행 가능한 계획이었다.

그 인간 같지 않을 정도로 신중한 자를 꾀어내기 위해 얼마나 공들여 퍼뜨린 소문인지 모른다.

우여곡절 끝에 그들은 이안이 지하 무도회에 참석하게 하는 데에 성공했다. 남은 것은 미리 만들어 놓은 거대한 마법진을 발동시켜 이안을 사로잡는 것이었다.

그만한 크기의 마법진은 나인의 재력으로도 감당이 벅찰 만큼 값비쌌지만, 나인은 최근 그들의 ‘후원자’로부터 천문학적인 금력을 지원받고 있었다.

계획대로 미리 소환해 둔 나이트메어가 이안의 전력을 조금이나마 소비시켰고, 그사이 사술이 발동되었다. 주문만 끝까지 시전할 수 있었더라면 그들은 사상 최강의 기사를 손에 넣을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그들은 실패했다. 성공을 고작 한 발짝 앞에 두고서.

아이린 그레이스라는, 성녀의 탈을 뒤집어쓴 칠십육 번째 노예 때문에.

아이린이 지하 무도회에 참석한 것부터가 예상외였다. 하지만 예상했었더라도 계획이 수정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성력도 없는 가짜 성녀 따위가 그들의 계획을 방해할 수는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그 여자는 보란 듯이 그 짓을 해냈다.

“빌어먹을. 건방진 계집!”

간부가 씨근덕거리며 화를 토해 냈다. 4번의 말이 맞다는 것을 이성적으로는 알고 있으면서도, 4번에게 거친 발길질을 수차례 퍼부었다.

한참 뒤에야 조금 분이 가신 듯 간부가 퉤, 바닥에 침을 뱉고 말했다.

“이번 일은 우연이라 쳐도, 그 노예가 맡은 임무에 지나치게 진전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혹시 모르지. 그새 딴마음을 품게 된 걸지도.”

“제 목숨이 아깝다면 쉽게 반역의 마음을 품진 못할 겁니다.”

나인이 노예들에게 거는 낙인 저주는 그들이 일구어 낸 최악의 발명품이었다.

나인 소속 흑마법사들이 직접 만들어 낸 저주이니 해주하는 방법 역시 그들밖엔 알지 못했다.

전설에나 나올 천재 마법사면 또 몰라도, 일개 노예 따위가 해주 방법을 찾아낼 리는 만무했다.

“도구는 쓸모를 보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폐기될 뿐이다.”

간부가 명령했다.

“76번 계집에게 전해라. 이번 달 안에 성과를 내어놓지 못하면 네 도구로서의 하찮은 삶도 끝이라고.”

“예.”

거역할 수 없는 명령에 4번은 그저 고개를 조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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