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6화 (46/161)

46화

황당함에 나는 이번에야말로 말을 잃었다.

‘……아니, 잠깐만.’

이거, 어쩌면 써먹을 수 있을지도.

순간 번뜩인 기지에 나는 홱 고개 들었다.

이안은 내 계략도 모르고 아직도 나를 재촉하고 있었다.

“왜 말이 없죠. 정곡이라도 찔렸습니까.”

“아니요. 아니, 네, 맞아요.”

난 세차게 고갤 끄덕였다.

“그분이 전 애인과 닮아서 약간 끌리네요. 솔직히, 네. 조금 흔들렸어요.”

“…….”

이안이 나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입술이 일자로 꾹 다물렸다. 어지간히도 말문이 막힌 모양이었다.

나는 기세를 이어 갔다.

“사실은, 방금도 살짝 자제심을 잃을 뻔했어요. 갑작스레 헤어진 전 애인과 비슷한 얼굴을 보니까 그리움이 마구 북받쳐 오르더군요.”

이안은 이번엔 살짝 입술을 벌렸다.

내가 본 그의 얼굴 중 가장 황당해하는 표정이었다.

“……진심입니까?”

“이안 님. 부탁드려요.”

나는 진지한 얼굴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제가 자제심을 잃지 않게 도와주세요. 출정에 저도 데려가 주시면 안 될까요? 저 혼자만 이 낯선 곳에 놔두시면, 실연에 상처 입은 제가 무슨 짓을 할지 저도 모른다고요.”

스스로가 두렵다는 듯 나는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눈으론 슬쩍 이안의 눈치를 살피면서.

“……하.”

이안이 짧은 탄식과 함께 고개 숙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그는 잠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역시 무리수였나?’

이제 와 고민해 봐야 엎질러진 물이지만.

숨 막히는 몇 초간의 침묵 뒤, 이안이 마침내 다시 시선을 들었다.

“좋습니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가시죠.”

새파란 벽안이 나를 잡아먹을 듯 쏘아보았다.

‘어? 정말로?’

생각보다 순순히 떨어진 허락에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당신이 구속을 필요로 하는 타입인 줄은 몰랐는데.”

이안이 내게 한 걸음 다가오며 말했다.

나는 본능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그래 봤자 나보다 훨씬 큰 보폭에 곧장 따라잡혔지만.

“미리 말씀하지 그러셨습니까. 계약 관계라곤 하나 부부인데, 내가 부인의 그런 허물쯤 이해 못 해 줄 것 같았습니까?”

왜지.

말의 내용은 무서울 게 없는데,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져 왔다.

나는 애써 침착한 척 입을 열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 콜록. 합니다.”

괜히 헛기침하는 나를 이안이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또 흔들리게 되면 말씀하시죠. 전 애인이란 자와 비슷한 부분이 있는 남자는 모조리 시야 밖으로 치워 드리겠습니다.”

어떻게 치울 건데……?

본능적으로 묻고 싶은 충동을 누르며 나는 입술을 뗐다.

“감사… 흐흠, 감사합니다. 역시 이안 님께 상담하길 잘했어요.”

거의 첫 만남 때처럼 날 노려보는 이안 때문에 오금이 심하게 저려 왔다.

간신히 끝까지 대답한 내게 이안이 차갑게 헛웃음을 뱉었다.

“이거나 받으십시오.”

이안이 돌연 품속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다이아몬드처럼 투명한 보석이 큼지막하게 달린 팔찌였다.

“이게… 뭔가요?”

“일전에 당신에게 약속했던 것, 기억합니까? 조안 경이 없어도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아티팩트를 주겠다고.”

“아.”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안과 계약할 당시, 나는 내 신변 보호를 조건 중 하나로 내걸었었다.

“이걸 주려고 절 찾아오시던 길이었나요?”

“예. 계약 부인의 외도를 목격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아직 아무 짓도 안 했어요.”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닙니까? 오른손이나 들어 보시죠. 이 보석을 손바닥으로 감싸요.”

이안의 목소리에서 냉기가 풀풀 날리는 건 착각이 아닐 것이다.

리칼리온까지 동행하게 된 건 좋은데, 계약 파트너로서의 신뢰를 너무 잃었나?

나는 일부러 착한 미소를 지으며, 시키는 대로 오른손을 움직여 팔찌의 보석 부분을 꾹 눌렀다.

딱히 느껴지는 건 없었다.

“그 뒤에는요?”

이안이 말없이 내 이마로 손을 뻗었다.

난데없는 접촉에 나는 흠칫 눈을 감았다.

그런데 곧이어 닿아야 할 타인의 체온이 느껴지지 않았다.

슬그머니 눈을 뜬 내가 물었다.

“……뭐 하세요?”

“제 손에 닿으려 해 보십시오.”

나는 이마를 움직여 이안의 손바닥에 부딪히도록 했다.

……그런데, 닿지 않았다.

사이에 공기로 된 막이라도 있는 것처럼 이마와 손이 닿지 않았다.

“그 보석을 감싸고 있는 한, 무엇도 당신에게 닿지 못할 겁니다.”

이안이 담담한 어투로 말했다.

나는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엇도, 요?”

“네. 발록 떼가 떠다니는 한복판에서도 그것만 있으면 어떤 것이든 당신의 털끝 하나 다치게 할 수 없습니다.”

“…….”

나는 아연한 눈으로 팔찌를 내려다보았다.

이안은 허세를 떨지 않는다. 이것과 함께라면 난 정말로 무엇에서도 안전할 수 있었다.

‘……흑마법에서도?’

내 몸에 걸려 있는 나인의 흑마법이 뇌리를 스쳤다.

아니. 나는 곧 고개 저었다. 아마 이미 당한 마법에까지 효력을 발휘하진 못할 터였다.

그래도 그게 어디인가.

원한다면 무엇도 내게 닿지 못하게 할 수 있다. 심플하지만, 굉장히 강력한 능력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아마 이 팔찌 하나는 산 하나도 살 수 있을 만한 가치를 지니고 있으리라.

“감사해요.”

나는 진심으로 감사 인사를 전했다.

“계약 내용을 이행했을 뿐입니다. 그나저나 슬슬 채비하시죠.”

“예?”

“해가 떨어지기 전에 출정할 겁니다.”

“아. 넵!”

나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여곡절이 좀 있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리칼리온 행에 탑승하는 데 성공했다.

‘이렇게 되면 마탑주를 바람맞히게 된다는 문제점이 있긴 한데.’

어쩔 수 없지. 다음에 만나면 사과하자.

리젤로에게 나는 이미 거액을 지불한 VIP 고객님이니 이 정도는 봐줄 터였다.

나는 괜한 생각 대신 원작 남주, 엘리엇의 삽화를 머릿속에 그렸다.

기다려라, 남주야. 누나가 구해 주러 갈게!

* * *

그로부터 몇 시간이 지난 시점.

“와아.”

창밖을 내다보며 나는 나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현재 내가 탄 마차는 제국 서부 어딘가를 힘차게 달리는 중이었다.

지평선까지 시원히 평야가 펼쳐져 시야에 걸리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수도와는 완연히 다른 풍경이었다.

“조안 경, 저희가 지금 이쯤 와 있는 건가요?”

나는 지도를 짚으며 말했다. 조안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 리칼리온까지는 반나절만 더 달리면 됩니다.”

내가 가리킨 곳은 수도로부터 한참은 떨어진 곳이었다.

정상적인 속도라면 마차로 도저히 하룻밤 만에 도착할 수 없는 곳.

하지만 마법과 재력 앞에서 불가능은 없었다.

수도를 떠나 한 시간가량 달린 우리는, 엘룬 교단 소유의 대형 워프 게이트에 도달했다.

그 게이트는 성기사단 전용으로, 시급한 일이 생겼을 때 성기사단이 출정하는 용도로만 쓸 수 있다고 했다. 설령 황제라 해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없는 특별 이동 수단인 모양이었다.

“밤새 마차에 계시느라 많이 피곤하실 겁니다. 더 주무십시오, 아이린 님.”

“아니에요. 조안 경이야말로 못 주무시지 않았어요? 계속 깨어 계시던걸요.”

“저는 못 잘 것 같습니다. 신경 쓰지 마십시오.”

“설마, 제 호위 때문에요?”

“아니오. 그건 아닙니다.”

조안 경이 쓰게 웃었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벌써 한 달여간 조안 경과 알고 지냈지만, 내가 아는 그녀의 표정은 기껏해야 한 손에 꼽혔다.

무표정, 엄격한 표정, 그리고 이안 앞에서 긴장한 표정 정도.

“조안 경. 안색이 안 좋으세요.”

“아. 티가 났습니까.”

조안 경이 놀란 듯 자세를 바로 했다.

“죄송합니다. 신경 쓰이게 해 드렸습니다.”

“아니에요. 그런 말을 들으려던 게 아니라.”

나는 황급히 고개 저었다.

“무슨 일 있으신 거면, 제게라도 털어놓아 보실래요? 제가 해결해 드릴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상냥한 말씀 감사합니다. 아이린 님.”

조안 경은 정중히 감사 인사를 할 뿐, 털어놓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역시 무슨 일이 있기는 있구나.

나는 그녀의 표정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무리해서 캐물으려는 건 아니지만, 어쩌면 제가 도움이 되어 드릴 수도 있지 않을까요?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한결 나아지실지도 모르고요.”

난처한 듯 미소 지은 조안이, 몇 초 뒤 입을 뗐다.

“심려 끼쳐 드릴 생각은 정말 아니었습니다만. 사실, 리칼리온은 제 고향입니다.”

“네?”

내 눈이 커다래졌다.

“리칼리온 출신이시라고요?”

“네. 가족의 생사가 확인되지 않은 상태라 그곳에 정신이 쏠려 있었습니다.”

“……세상에. 조안 경.”

나는 입술을 깨물며 조안 경 근처로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뭐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가족분들은 분명 무사하실 거예요.”

나는 상투적인 위로나마 조심스레 건넸다.

“리칼리온의 성기사님들께서, 그렇게…… 되시기 전에,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 민간인들을 구출하셨다는 목격담이 있었잖아요.”

말하면서도 나는 스스로의 말에 설득력을 느끼지 못했다.

리칼리온에 살던 민간인들은 현재 행방이 묘연한 상태였다.

성기사들의 비호 아래 무사히 살아남은 거라면 옆 마을로라도 피난을 갔어야 하는데, 그 마을에선 그런 이가 한 명도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

증발한 것처럼, 그 많은 수의 사람들이 사라진 것이다.

조안 경이 쓴웃음을 베어 물었다.

“위로의 말씀, 감사합니다.”

“엘룬 신께 기도드릴게요.”

나는 꾹 주먹 쥐며 말했다.

“조안 경의 가족분들이 꼭, 무사하게 해 달라고.”

일단 내 신분은 성녀다.

그러니 내 기도가 조안 경에겐 위로가 될지도 몰랐다.

나는 눈을 감고 속으로 이 세계 신의 이름을 읊조렸다.

‘엘룬 신이시여. 듣고 계십니까?’

난생처음 해 보는 기도에 나는 좀 버벅거렸다.

‘어떻게…… 하면 되지. 그냥 다짜고짜 소원을 빌면 되나.’

아, 기도문부터 읊어야 하나? 어떡하지, 아직 덜 외웠는데.

횡설수설 튀어나오는 생각을 나는 꾹 억눌렀다.

‘아무튼. 조안 경의 가족들이 꼭 무사하게 해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이렇게 하면…… 되나?

장학금에 선정되게 해 달라고 빌었을 때와 별반 다를 게 없는 기도였다.

그래도 기도하는 내 모습이 조안 경에게 일말의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뜨려던 때였다.

‘……제야, 처음으로.’

“응?”

방금, 뭐였지?

나는 반짝 눈을 떴다.

“조안 경, 방금 제게 뭐라고 말씀하셨나요?”

“예? 아무런 말씀도 안 드렸습니다만.”

“아, 죄송해요.”

나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찰나지만 목소리 비슷한 무언가가 들렸던 것 같은데.

그냥 바람이 지나치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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