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마치 그런 내 생각을 읽은 듯 아네트가 속삭였다.
“이안 님은 저 뒤에 계세요.”
아네트가 어딘가를 가리켰다.
나는 그제야 길게 뻗은 테라스의 끝부분이 흰 베일로 가려져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함께 맹세의 기도를 올리기 전까지, 신랑과 신부는 서로 못 보거든요.”
아네트의 속닥거림에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한국에도 비슷한 풍습이 있긴 하지만, 보통 신랑을 가리기보단 신부를 가리던데. 머리에 쓰는 베일 같은 것으로 말이다.
저 베일 뒤에 이안이 있단 말이지.
저렇게 꽁꽁 숨겨 놓으니, 마치 사탕 봉지라도 까먹으러 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괜히 요상해지는 기분을 떨치고, 오늘 내 들러리를 맡아 준 아네트의 안내에 따라 걸음을 옮겼다. 이안이 있는 곳을 향해.
이 순간만큼은 수많은 하객도 약속한 듯 조용해졌다.
베일 앞까지 걸어간 나는, 멈춰 선 채 불안스레 눈을 깜빡였다.
도착했는데, 이제부턴 뭘 하면 되지?
분명 아네트가 이 절차에 대해 설명을 해 줬던 것 같은데, 기억이 안 났다.
긴장해도 여기까지 잘 걸어왔는데, 하필 제일 중요한 순간에 머리가 새하얗게 비어 버린 것이다.
‘아네트 양, 도와줘요.’
그러나 유일한 구세주가 되어야 할 아네트는 현재 내 뒤에서 드레스 자락을 잡아 주고 있었다.
내 앞에 있는 건 오로지 흰 베일 뿐이었다.
‘그냥 걷으면 되는 건가?’
그 전에 인사부터 해야 하나?
다짜고짜 걷으면 좀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안절부절못하던 그때였다.
베일 너머에서 나타난 커다란 손이 휙, 베일을 젖혔다.
“뭐 합니까? 거기서.”
귀에 익은 목소리에 나는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유난히 은발이 햇빛에 반짝여 보였다.
신랑답게 새하얀 예복을 차려입은 이안은 눈이 부셨다.
태양의 역광 때문만이 아니라, 정말 눈이 부셨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도 웃기지만, 절로 마음이 경건해지는 미모였다. 순간 당황해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할 정도로.
나는 놀란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괜히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젖혀야 되는데요.”
“마저 젖히십시오. 그럼.”
이안이 베일을 가리키며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반쯤 오기로 베일을 마저 젖혔다. 그제야 이안의 모습이 완전히 드러났다.
‘……외모 하난, 정말로.’
성스럽기 그지없는 인간이었다.
비록 새신랑 주제에 불량한 미소를 입가에 걸치고 있긴 했지만.
“만족했습니까?”
“네.”
나는 도도히 대답했다.
“그럼 가시죠.”
픽 웃으며 이안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 위에 손을 얹자, 흰 장갑 너머로 따스한 체온이 전해져 왔다.
서늘하기 그지없게 생겨선 이안은 남보다 체온이 높았다.
그 온도를 전해 받으며 나는 이안과 함께 웨딩 로드를 마저 걸었다.
단상 위에서 결혼 축사를 맡아 준 주교가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몸져누운 추기경 성하를 대신해 나온 사람이었다.
“오늘은 참으로 뜻깊은 날입니다.”
주교가 흐뭇한 웃음을 지으며 우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엘룬 님께서도 축복하시는 듯 날씨가 구름 하나 없이 쾌청하군요. 엇갈리고 복잡한 인연의 끈을 풀고 함께하기로 한 두 분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주교가 나와 이안의 독특한 러브스토리를 떠올리는 듯, 잠시 감격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하긴. 나라도 기억에 남을 만한 이야기긴 했다.
납치된 노예와 구출해 준 성기사단장으로 만나, 서로 금지된 마음만을 품고 있다가 성녀로 발탁됨과 동시에 맺어지다니.
이 수많은 하객의 어느 정도는, 그 극적인 스토리에 마음이 끌려 구경 온 거겠지.
“엘룬 님의 인도 아래 만난 두 사람. 두 사람은, 서로를 영원토록 지키며 신뢰하고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까?”
음.
지키고 사랑하는 대목도 문제가 많았지만, 신뢰하냐는 대목은 특히 문제였다.
나는 아주 약간 찔려 오는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이안을 마주 보았다.
이안 역시 나를 마주 보며 서 있었다.
이제 맹세의 말만을 뱉을 차례였다.
고개만 끄덕이면 나와 이안은 그 순간 부로 부부의 연을 맺게 되는 것이다.
비록 겉모습뿐이라곤 하지만.
이안이 입을 열었다.
“네. 맹세합니다.”
그 목소리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질 수 없지.
여기까지 온 이상 물론 물러날 생각은 없었다.
나는 활짝 미소 지으며 뒤이어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맹세합니다.”
“그럼, 이로써.”
주교가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두 사람이 부부의 연을 맺게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와아아아!”
엄청난 함성이 귓가를 울렸다.
* * *
“네. 맹세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아이린은, 아주 환한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이안은 문득 궁금해졌다. 지금 그녀의 머릿속에서 무슨 생각들이 돌아다니고 있을지.
‘긴장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웨딩 베일 너머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그림자를 발견했을 땐, 분명 그런 줄로만 알았다.
벌써 한참이나 제 신부를 기다리고 있던 이안은, 픽 웃으며 신부 대신 베일을 젖혔다.
그곳엔 웨딩드레스를 차려입은 아이린이 있었다.
길거리에서 파는 솜사탕처럼 달콤한 색채의 분홍 머리. 냄새를 맡으면 향긋할 것 같은, 꿀을 바른 듯한 금색 눈.
신성해 보일 정도로 아름다운 웨딩드레스와 제가 직접 고른 보석으로 만든 티아라.
요정처럼 아름답게 꾸민 아이린은 어째서인지 뚱한 표정이었다.
‘……제가 젖혀야 되는데요.’
그 얼굴에 이안은 순간,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릴 뻔했다.
연기를 전혀 못 하고 있지 않은가. 그녀는 누가 봐도 설레야 할 새신부처럼 보이진 않았다.
은근히 능글맞은 구석이 있는 여자지만, 역시 오늘 같은 날은 긴장이 되는 모양이었다.
이안은 기꺼이 자신의 계약 파트너를 리드하기로 했다.
‘그럼 가시죠.’
그런데, 손을 잡은 순간부터 아이린은 어딘가 달라졌다.
주교 앞에서 자신을 마주 보는 그녀는, 마치 정말 한 명의 신부 같았다.
사랑받고,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는, 행복에 잠겨 있는 새신부.
이안은 잠시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활짝 머금은 웃음이 아이린의 얼굴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 위로 반사되는 햇빛이 오늘따라 유달리 눈부신 탓에, 이안은 살며시 눈가를 좁혔다.
“그럼, 신랑과 신부는 맹세의 입맞춤을 해 주십시오.”
주례의 말에 이안은 현실로 되돌아왔다.
아이린이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물론 절차야 들어서 알고 있었겠지만, 막상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입 맞추라는 소릴 들으니 놀란 모양이었다.
이안은 희미하게 웃으며 살며시 아이린의 턱을 쥐었다.
안 그래도 토끼 같던 눈이 더 커졌다.
이안은 다가가는 대신 잠깐 멈칫했다.
여자와 이렇게까지 가까워 본 적이 있었던가?
가족을 제외하면, 여성과 검을 맞댈 때조차 이 이상으로 밀착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안은 이 몹시도 생소한 거리감을 의식하지 않도록 살짝 눈을 감았다.
그대로 고개 숙여 아이린에게 다가가자, 그녀의 몸이 잔뜩 굳는 것이 느껴졌다.
머지않아 둘의 고개가 겹치듯 완전히 가까워졌다.
우레와 같은 함성이 터졌다.
“와아아아!”
둘의 행복을 기원하는 환성들.
그 속에서 이안은 나지막이 속삭였다.
닿을 듯 말 듯 가까이에 아이린의 입술이 있었다.
“안 닿으니까, 긴장하지 마십시오.”
놀리는 듯한 속삭임을 감지했는지, 아이린이 와락 미간을 좁혔다.
분홍빛으로 물들인 입술이 당혹한 듯 조금은 굳어지더니, 곧 살그머니 열려 속살거림을 뱉었다.
“전 닿아도 상관없는데요? 그럼 곤란한 건 이안 님이겠죠.”
“…….”
역시 만만한 여자는 아니었다.
눈을 뜬 둘은 잠깐 전투적인 시선을 교환했다.
눈싸움에서 먼저 패배를 선언한 건 이안이었다.
어쩔 수 없다는 듯 눈을 내리깐 이안이 고개를 떼어 냈다.
고개가 떨어지자마자 아이린이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 탓에 이안은 그녀의 표정을 더는 확인할 수 없었다.
주교가 다시 한번 축하의 말을 읊었고, 그동안에도 하객들의 함성은 잦아들 줄 몰랐다.
“다시 손 주십시오.”
이안이 아이린을 돌아보며 말했다.
손을 맞잡은 둘은, 테라스 끝까지 함께 걸어갔다.
드넓은 대성당 앞 정원을 하객들이 가득 메우고 있었다.
마치 국왕과 왕비라도 마주한 듯 하나같이 들뜨고 신난 모습들.
하지만, 과연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이 자신과 아이린을 축복하기 위해 모인 것일까?
‘그럴 리가 없지.’
이안은 잠시 아이린을 돌아보았다.
자신과의 오늘 이 가짜 결혼 때문에, 그녀는 앞으로 수많은 관심의 소용돌이에 휩싸일 것이다.
그 관심들이 마냥 긍정적인 것뿐일 리는 없었다.
벌써 아이린에게 접근하기 위해 호시탐탐 기회만 노리고 있는 날벌레들이 있음을 이안은 알고 있었다.
그중 하나를 어제도 맞닥뜨렸다.
‘에드워드 비첸, 이라고 했나.’
루시안이 조사한 그의 신원엔 문제가 없었다.
비첸 남작가의 둘째 아들. 행적은 대체로 깨끗했으나, 한 가지 걸리는 부분이 있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불법 도박장에 출입하고 있는 정황이 포착된 것이다.
한량처럼 사는 귀족 자제들이 그런 도박장에 들락거리는 것은 유별난 일은 아니었으나…… 글쎄.
그자가 정말 아이린에게 사심 없이 접근한 것일지는 좀 더 알아봐야 할 일이었다.
앞으로도 아이린에겐 그런 자들이 많이 접근할 터였다.
그리고 그녀 근처에 방충망을 치는 것은, 마땅히 계약 파트너인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이었다.
* * *
‘닿을 뻔했어.’
아까부터 내 심장이 초속 20m/s로 뛰어 대고 있었다.
이러다간 수명이 앞당겨져 일찍 죽어 버리고 말 거다.
‘키스할 뻔했다고.’
지금 나는 이어지는 피로연을 위해 드넓은 대성당의 정원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즉 본식은 이미 끝난 뒤였다.
그런데도 나는 아까 이안과 저질렀던 맹세의 입맞춤 뒤로 내내 패닉에 빠져 있었다.
‘미치겠네.’
닿지도 않았다.
이안은 그저 입술 바로 앞에서 속삭임으로 간지럽히기만 하고 떨어졌을 뿐이었다.
그러니 엄밀히 말하면 입맞춤이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런 걸 아직까지 의식하고 있는 건 나뿐일 거다.
나는 슬며시, 내 곁에서 함께 걷고 있는 이안을 노려보았다.
‘저 사람은 진작에 잊어 먹었겠지.’
닿지 않으니, 긴장 풀라고 했던가.
여유롭게 나를 놀리던 목소릴 떠오르니 또 살짝 열이 받았다.
모태 솔로 제국의 황태자인 이안이 저리도 여유만만한데 나만 허둥댈 순 없었다.
나도 얼마든지 뻔뻔하게 나가 주지.
나는 다짐을 굳히며 다시금 환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