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5화 (35/161)

35화

지원 사격을 받기 위해 나는 휙 아네트를 돌아보았다.

“아네트 양, 아네트 양도 뭐라고 해 봐요. 이 옷은 한참 잘못되지 않았어요? 특히 셔츠!”

“어, 어어…… 제 눈엔 그저 완벽하시기만 한 것 같아서…… 저,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아네트가 버벅거리며 대답했다. 눈동자가 이리저리 갈 곳을 잃은 것으로 보아, 정말 아네트는 문제점을 모르는 듯했다.

드물게도 아네트와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순간이었다.

“조안 경! 조안 경은요?”

“그, 외람되오나 아이린 님. 제 눈에도 단장님의 옷차림은 여느 귀족 남성의 옷차림과 다를 바가 없어 보입니다만.”

조안 경이 곤혹스레 대답했다.

“하!”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쪽에는 문외한이라서.”

조안 경 역시 내 성에 차는 대답을 해 주지 않았다.

나는 다시 이안을 돌아보곤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하아. 시간이 시간이라 이제 와서 갈아입으러 가시라고 할 수도 없고.”

“갈아입어야 할 정도로 문제라고?”

이안이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다시금 제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이었다.

곧 그가 무언가 눈치챈 듯 미간을 살짝 찡그리곤 날 바라봤다.

“잠깐. 혹시 내가 당신을 지적할까 봐 먼저 선수 친 겁니까?”

“그건 무슨 소리예요?”

“여기서 옷차림이 문제인 건 누가 봐도 내가 아닌 그대 쪽이지 않습니까.”

이안이 이번엔 반대로 날 지적했다.

난 어처구니가 없어 내 옷을 내려다봤다.

평소 입는 것과 달리 살짝 몸에 붙는 라인인 건 사실이었지만, 정말 아주 살짝일 뿐이었다.

“농담하시는 거죠? 이게 무슨 문제예요?”

“진짜로 모르는 겁니까. 어쩌면 그리 남을 보는 잣대와 자신을 보는 잣대가 다릅니까?”

“도대체 그게 무슨.”

“도무지 눈 둘 곳 없는 옷을 입어 놓고선, 누가 누구에게 지적을 하는 건지…….”

이안이 기가 막히단 듯 내 옷을 쳐다보더니, 곧 못 볼 걸 본 사람처럼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러더니 이번엔 사용인들에게 지적하기 시작했다.

“내 부인께서 문제점을 모르셨다면, 자네들이라도 직언했어야지.”

“……예, 죄송합니다…….”

사용인들이 사과했으나, 어딜 봐도 억지로 사과하는 게 역력해 보였다.

아니, 저 사람은 무슨 조선 시대에서 왔나. 나는 황당한 얼굴로 이안을 쳐다보았다.

“이분들한테 괜한 소리 하지 말아요. 이 옷이 어디가 어떻다고 그러세요? 맨날 하얀 옷만 입을 땐 뭐라도 흘릴까 봐 전전긍긍하다가 이제야 좀 살 것 같구만.”

투덜대고 있자니, 결혼식 전야제부터 그래도 신랑 신부라는 사람들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숨 쉰 나는 아네트를 돌아보았다. 조안 경과 의미 모를 눈빛을 주고받고 있던 아네트가 화들짝 놀라 날 바라보았다.

“슬슬 출발해도 되겠죠?”

“아, 넵. 물론입니다!”

“그럼 가 볼까요.”

나는 이젠 꽤나 자연스러워진 자세로 이안을 향해 가슴 높이까지 팔을 들어 올렸다.

이안 역시 익숙해진 태도로 그런 내 팔을 받쳐 에스코트하기 시작했다.

대성당에는 거대한 유리 온실이 있다.

남쪽 지방에서만 난다는 화려한 꽃들이 피어 있는 온실이었는데, 대부분의 연회는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그 안으로 들어서자, 사람들의 시선이 한꺼번에 우리 쪽으로 쏠렸다.

“이안 님과 아이린 님이시다!”

“어쩜, 오늘따라 두 분이 더 아름다워 보이시네요.”

“하아, 어쩜 저렇게 잘 어울리는 한 쌍일까…….”

오늘도 레하트 사람들은 속닥거리는 소리가 컸고, 난 안 들리는 척 사람들을 향해 은은한 미소를 보냈다.

온실은 부드러운 음악 소리와 향긋한 음식 냄새, 사람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일단 빠르게 안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라시드는 오늘은 출석하지 않은 것 같았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모두 순전히 나와 이안의 결혼을 축복하는 듯 따뜻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단, 적어도 겉으로는.

나는 기꺼이 행복한 신부의 얼굴을 한 채 전야제 속으로 발을 들였다.

* * *

전야제의 백미는 뭐니 뭐니 해도 무도회라고 했다.

대성당에선 좀처럼 열리지 않는 이벤트라서일까, 참석해 있는 주교와 신도들도 평소보다 더 즐거운 표정이었다.

분위기가 꽤 무르익었을 무렵, 즐겁고 활기찬 음악이 조금씩 가라앉기 시작했다.

슬슬 시간이 된 모양이었다.

나와 이안은 유리 온실 한가운데 선 채 서로를 마주 보았다.

“기억합니까?”

가까이서 마주한 채 이안이 속삭였다.

“연습했던 것들.”

“그럼요.”

나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이안과 왈츠를 연습한 뒤, 돌아와서도 혼자 복습해 보았었다.

내가 들어온 이 76번의 몸은 운동신경이 좋은 편인 것 같았다.

한 달 동안이나 운동 없이 방치했을 땐 삐걱거렸으나, 다시 움직이기 시작하니 금세 날렵해졌다.

즉, 왈츠를 추면서 이안의 발을 밟지 않는 것 정도는 식은 죽 먹기라는 이야기였다.

하프와 바이올린이 달콤한 선율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의 손을 마주 잡았다. 가까이서 올려다보는 이안의 눈은 오늘도 역시 비현실적이었다.

순간 며칠 전 연습할 때 그랬던 것처럼, 또 스스로가 굳어서 버벅거릴까 걱정이 들었다.

하지만 다행히 오늘 내 몸은 꽤 자연스러웠다.

‘오늘은 어쩐지, 별로 안 떨리네.’

아마 이 순간의 모든 것에 지나치도록 현실감이 없는 탓인 듯했다.

아름다운 음악 소리와, 마치 반딧불이처럼 우리만 바라보는 사람들의 눈빛.

무엇보다 나만을 향해 있는 사파이어색 눈동자와, 그 안에 들어 있는 내 모습.

모든 것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어서, 혹시 꿈은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대한민국에 사는 이서연이 하룻밤 우연히 꾸게 된 꿈.

‘물론 그럴 리 없다는 건 알지만.’

빙의한 지 한 달이나 지난 지금, 나는 완전히 체념한 상태였다.

이제 내 세계는 이곳이었다. 돌아갈 집 따윈 이제 내게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무슨 생각 중입니까?”

낮은 물음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나는 이안을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푸른 눈동자에 의아함이 서렸다.

“내 생각 중인 건 아닌 것 같은데.”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나는 살짝 당황했다.

나도 모르게 넋 놓았던 걸 들킨 모양이었다.

“……당연히 이안 님 생각 중이죠. 명색이 결혼식 전날인데 당연히 내일 남편 될 사람을 생각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래요? 정말 집중하고 있습니까?”

살며시 내 허리를 더 끌어안으며 이안이 말했다.

나는 그의 리드대로 움직이며 되물었다.

“그렇다니까요. 왜 계속 물어보세요?”

“글쎄. 그대가 어쩐지, 조금 슬퍼 보이는 것 같아서.”

나는 눈을 천천히 깜빡거렸다.

다른 생각 중이었던 게, 그렇게 티가 많이 났나.

생긋 웃으며 나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메리지 블루인가 봐요.”

“메리…… 뭐라고 했습니까?”

“으음, 잘못 말했네요. 왜, 신부들은 결혼 전에 우울해진다고들 하잖아요.”

이곳에도 그런 얘기가 있을까?

뭐, 어느 세계든 결혼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은 다 비슷할 테니 상관없지 않을까 싶었다.

“후회합니까?”

짙푸른 빛 눈동자가 나를 찬찬히 훑었다.

“나와 계약한 것.”

“…….”

예상치 못한 물음에 나는 잠깐 대답하지 않았다.

후회하냐고?

아니, 그럴 리가 없었다.

이안과 계약한 건 그 당시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으니까.

그러니 후회란 말은 어불성설이었다.

나는 씩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혀요. 계약 내용은 끝까지 확실히, 이행해 주실 거잖아요.”

“당신을 아무도 찾지 못하는 곳으로 사라지게 도와 달라던…… 그 이야기 말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이안은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잠시 뒤에야 그가 다시 물었다.

“여전히 변함이 없습니까? 사라지고 싶다는 그 생각엔.”

“네. 그럼요.”

나는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혹여나 변했다 하더라도, 불변의 계약석으로 계약한 이상 이젠 어쩔 수 없잖아요?”

“……맞는 말씀이십니다.”

이안이 어슴푸레 미소를 지었다.

내가 가르친 적 없는, 가짜가 아닌 진짜 미소였다.

진짜는, 역시 연기로 만들어 낸 가짜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예뻤다.

문득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정말 꿈이었다면, 이 순간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었을 텐데.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전부 틀림없는 현실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오히려 한 발자국 떨어진 채 지금의 순간을 지켜봐야 했다.

내가 지금 이곳에 너무 몰입하지 않도록.

* * *

어느덧 완전히 달이 뜨고, 시계는 늦은 밤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지만 온실 속 열기는 가라앉을 줄 몰랐다.

웃고 떠드는 사람들의 이야기 소리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게 정말인가요?”

나는 홀짝이던 과실주도 옆으로 치운 채 눈을 반짝거렸다.

방금 들은 얘기가 꽤 흥미로웠기 때문이다.

“프리먼 남작이 정말 이혼당했대요?”

“그렇다니까요!”

일전 장미 정원에서 이안과 연기할 때, 우릴 훔쳐보던 귀부인들이 바람 난 프리먼 남작에 대해 떠드는 걸 들었다.

그 뒷이야기를 듣게 되니 호기심이 솟았다.

내 물음에 코델리아 옆에 서 있는 영애가 신나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런데, 놀라지 마세요. 남작이 이혼 계약서에 서명하자마자, 남작 부인이 웬 젊은 청년을 옆구리에 꿰차고 돌아다니는 중이라지 뭐예요?”

“어머, 어머. 사실은 맞바람이었나?”

“모르죠. 프리먼 남작은 그렇게 확신하고 있는 것 같지만! 이혼을 물러 달라고 주교님들께 사정하고 있는 것 같은데, 시장 바닥 흥정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게 이혼을 했다 물렀다 할 수 있을 리가 없죠.”

“그러게요, 그러게요. 호호호!”

흥미로운 가십에 사람들이 가볍게 낄낄거렸다. 나도 물론 그중 하나였다.

이 세계든 저 세계든 이런 얘긴 참 재밌네.

나는 과실주를 다시금 홀짝거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몇 발자국 떨어진 곁에서 이안이 루시안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이 보였다.

표정이 심각한 것으로 보아 일 이야기를 하는 중인 듯했다.

‘가엾은 새신랑. 이런 자리에서도 쉴 수가 없네.’

남 일처럼 생각하며 나는 몸을 일으켰다.

“디저트를 조금만 더 가져올게요.”

“어머, 제가 가져다드릴게요.”

“아니에요. 바로 저긴데요, 뭐.”

빙긋 웃으며 나는 뷔페 테이블을 향해 걸어갔다.

항상 사람으로 북적거리던 테이블이 웬일로 한산했다.

가져갈 음식을 고르는데, 문득 인기척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이안인가?’

뒤를 돌아보려던 순간이었다.

“안녕? 76번.”

뱀처럼 낮게 쉭쉭거리는 목소리.

나는 숨을 멈췄다. 온몸으로 소름이 번져 나갔다.

“고개 돌리지 말고, 그대로 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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