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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화 (33/161)

33화

“자세 연습. 오늘까지 마치라고 당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

……아.

나는 살짝 입을 벌린 채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랬다. 확실히 그런 얘기가 있었다.

어제, 저 잘나신 분이 검기로 내 방 잠금쇠를 박살 내신 뒤, 돌아가기 직전에 내게 숙제를 냈었다.

조안 경의 도움을 받아 기본적인 자세 잡는 방법은 모레까지 익혀 놓으라고.

“잊었군요.”

내 표정을 바라본 이안이 싸늘히 말했다.

나는 얼른 대답했다.

“아니에요.”

“아닌 게 아닌 것 같은데. 자세 잡는 걸 보면 금방 알 수 있으니 굳이 거짓말하지 마십시오.”

놀랍게도, 이안의 추궁이 이 순간만큼은 몹시 감미롭게 들렸다.

이안은 정말 그 용건 단 하나 때문에 나를 부른 것 같았다.

즉, 리젤로에 대해 추궁하기 위해서 불러온 게 아니란 뜻이었다.

‘살았다. 살았다!’

그렇다면야 어떤 추궁이든 기꺼이 들어 줄 수 있었다.

나는 은은한 미소를 띤 채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이안이 흠칫 얼굴을 굳혔다.

“뭡니까? 그 미소는.”

“저는 원래 웃는 상이에요. 계속 말씀하세요.”

“……자세나 잡아 보시죠.”

이안이 루시안에게 눈짓하자, 루시안이 얼른 내게 목도를 가져다주었다.

이 인간은 언제 어디서나 불쌍한 어린양을 훈련할 수 있게 준비된 인재인가? 무슨 집무실에까지 목도를 가져다 놨어?

그런 의문을 삼키며 나는 루시안이 건네준 목도를 쥐었다.

이안의 의심과 달리, 난 정말로 자세 연습을 했다.

그야 검기 한 번으로 장난감처럼 잠금장치를 박살 내신 분의 숙제이니 무시할 수가 없었다.

장장 삼십 분간의 연습 끝에, 조안 경도 이 정도면 훌륭하다고 칭찬해 주었다.

나는 그때의 기억을 되살려 자세를 잡았다.

이안이 그런 나를 천천히 훑어보았다.

“…….”

잠시 침묵이 이어졌다.

나를 향한 시선에 마치 질감이 있는 것 같았다.

목도를 쥔 손에 서서히 땀이 배었다.

견디다 못한 내가 먼저 입을 열려던 찰나였다.

“연습을 했다는 건 알겠습니다.”

내 얼굴이 순식간에 화색을 띠었다.

“그럼요. 정말 열심히 연습했답니다.”

“그런데 워낙 기초가 없어 그 위에 뭘 쌓든 흔들리는 느낌이군.”

“…….”

이안의 이어진 혼잣말에 나는 울컥했다.

그야 검에서 정점을 찍은 사람 눈엔 나 같은 초보자야 햇병아리, 아니 지렁이쯤으로 보이겠지!

항의하려는데 이안이 먼저 말을 이었다.

“어쩔 수 없군요. 저기 누워 보시죠.”

이안이 가리킨 쪽을 바라본 나는 멍하니 눈을 끔뻑였다.

거기엔 소파가 있었다.

“예?”

“편하게 누워 보세요. 오늘은 기초를 완벽히 끝내 드릴 테니.”

기초를 끝낼 건데 왜 제가 저기 누워야 하죠……?

몹시 두려운 마음이 들었으나, 난 차마 거역하지 못하고 엉거주춤 소파로 다가갔다.

구두를 벗고 그 위에 눕는데, 마치 CT 기계 안으로 들어가는 듯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이렇게요?”

“긴장 풀고.”

이안이 소파 옆에 선 채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이봐요. 댁이면 이 상황에서 긴장이 풀어지겠습니까?

남의 집무실 소파에서 멀뚱히 누워 있자니 몹시 어색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괜히 입을 놀렸다.

“그, 흠. 소파가 굉장히 푹신하고 편안하네요.”

“잠깐 배 위에 손을 올리겠습니다.”

“예?”

“고개 나한테 꺾지 말고, 시선 정면으로.”

당황해 이안을 홱 돌아보자, 그가 담담히 말했다.

잠시 뒤, 나는 커다란 손바닥이 내 배를 감싸는 것을 느꼈다.

전에도 생각했지만, 이거 조금 기분이 묘하네.

“호흡 들이쉬어요. 숨이 여기까지 들어오도록.”

시키는 대로 숨을 한껏 들이마시자, 머리 위에서 낮은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잘하고 있습니다. 그대로.”

이안이 나를 칭찬했다.

이건 참 드문 경우였기에 나는 눈을 깜빡거렸다. 어쩌면 처음 있는 일일지도.

“다시 내쉬고. 천천히.”

나는 이안의 지시대로 심호흡을 반복했다.

푹신한 소파에 누운 채, 낮게 귓가를 간질이는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기분이 약간 미묘해졌다.

정신이 붕 뜬 듯한, 조금은 나른한 기분.

나는 무심코 입을 열었다.

“결혼식이 이제 정말 코앞이네요.”

“다시 들이마시고. 그렇군요. 긴장됩니까?”

“후우…… 글쎄요. 사실 아직도 현실감이 없어요.”

들이켰던 숨을 내쉬며 나는 솔직히 말했다.

매일같이 화려한 웨딩드레스나 보석들을 고르고 있지만, 완전히 실감이 나는 건 아니었다.

내가 결혼을 한다니. 아무리 일 년짜리 가짜 결혼이라곤 해도, 역시 쉽사리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 이안 님.”

“뭡니까.”

되묻는 목소리가 사무적이고 서늘하기 그지없었다.

이런 인간이 며칠 뒤면 내 남편이 된단 말이지.

한탄스러운 마음에 절로 날숨이 잘 내쉬어졌다.

“이번에 코델리아 님의 정기 친목회에 갔다가 들은 이야기인데요.”

“네.”

“레하트 제국의 결혼식 문화가 뭔가요?”

“예?”

이안이 의아한 듯 미간을 좁혔다.

“코델리아 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체통 없는 문화라고, 없어져야 할 악습이라고. 대체 무슨 문화이기에 다들 그런 얘길 하는 거죠?”

그렇게까지 다들 반응하는 걸 보면 분명 평범한 문화는 아닌 듯했다.

현장에서 당황하지 않으려면 미리 알아 둘 필요가 있었다.

“무슨 문화를 말하는 겁니까?”

“저도 모르겠어요. 아시다시피 저는 레하트 제국 출신이 아니잖아요.”

“체통 없는 문화라니. 어떤 걸 말하는…….”

거기까지 말한 이안이 문득 말을 멈췄다.

“이안 님?”

의아해진 내가 고개를 틀어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이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이안 님. 왜 그러세요? 생각나신 거죠. 그렇죠?”

이안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안색만 더 창백해질 뿐.

나는 겁에 질렸다.

‘도대체 무슨 문화인 거야!’

“뭐길래 그러세요. 저한테도 말씀해 주세요. 네? 그래야 마음의 준비를 하죠.”

“……그건. 그, 문화는.”

이안이 다소 갈라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철폐돼야 할 악습이 맞습니다.”

역시 떠올린 게 맞았구나!

이안이 이렇게까지 반응하니 두려운 것과 별개로, 호기심이 더 고개를 쳐들었다.

“당신은 알 필요 없습니다. 제가 처리할 테니.”

“뭘 처리해요?”

“우리 결혼식에 그 문화가 끼어들 일은 없을 겁니다.”

“사람들이 다 알고 있을 만큼 유명한 전통인데, 마음대로 뺄 수 있는 건가요?”

“그렇게 만들 겁니다.”

이안이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그러곤 문득 내 배 위에 얹혀 있는 제 손을 바라보더니, 불에 덴 듯 황급히 거둬들였다.

이제야 접촉을 의식한 것처럼.

“이안 님?”

“……호흡 연습은 조안 경과 마저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많이 좋아졌습니다.”

나는 갑자기 나와 내외하기 시작한 이안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늘 남들보다 체온이 낮을 것 같던 흰 얼굴에 묘하게 붉은 기가 감돌아, 평소보다 인간적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뭐지?

“도대체 무슨 문화이기에 그러세요. 지금 굉장히 동요하신 것 같은데?”

“안 했습니다. 어차피 우리와는 상관없는 일이니까. 그보다 이제 기초는 됐으니, 실전으로 넘어가죠.”

갑자기?

내가 놀란 눈으로 돌아보자 이안이 변명하듯 말했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 * *

이안이 말한 ‘실전’은 검술이 아니었다.

나는 널따란 이안의 집무실 한복판에서, 그와 손을 맞잡은 채 왈츠 자세를 잡고 있었다.

이안은 아까 내 배 위에 서슴없이 손을 얹을 때와는 달리, 몸이 묘하게 경직된 채였다.

여자랑 이렇게까지 가까이 있어 본 적이 없다는 티를 풀풀 내고 있었다.

“왈츠 추는 법은 압니까?”

“음, 조금은요?”

체육 시간에 두어 번 배운 것을 떠올리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려운 동작은 없을 겁니다.”

이안은 의외로, 매끄럽게 나를 리드했다.

여자와 손도 잡아 본 적 없을 것 같은 남자가 이런 건 어떻게 이렇게 능숙한지 의아할 정도였다.

황족의 기본 소양이란 건가?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날 리드하는 이안의 동작은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그러나 딱 한 곳만은 그렇지 못했다.

‘돌멩이를 쳐다봐도 이것보단 사랑스럽게 쳐다보겠는데요, 예비 남편님.’

나를 내려다보는 이안의 눈빛이 지나치게 굳어 있었다.

안 그래도 날 고운 눈으로 쳐다보지 않는 인간인데, 결혼식 문화 얘기 이후로는 더 경직되고 말았다.

이래서야 이안과 춤추고 있는 것이 사랑해 마지않는 부인인지, 오늘 만난 거래처 미팅 상대인지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

“저. 이안 님.”

보다 못한 내가 입을 열었다.

“눈빛이요.”

“네?”

“절 너무 사무적으로 쳐다보고 계시잖아요.”

이 세계에 떨어져 이안과 가짜 연인 행세를 한 지도 벌써 한 달째였다.

그동안 내가 알아낸 건, 이 동네 사람들이 연애 가십에 환장해 있다는 점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귀도 몹시 좋았고, 눈도 굉장히 밝았다.

이안의 이런 딱딱한 눈빛 정도는 일 초 만에 캐치 할 게 분명했다.

“그러시면 안 돼요. 제대로 쳐다보셔야죠.”

“……쳐다보는 데에도 방법이 있습니까?”

왜 이러실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라시드와 도서관에서 만났을 때, 그 독점욕 연기 아주 좋았잖아.

파르아스 백작을 추궁했을 때에도 날 걱정하는 눈빛 연기가 상당했었다.

‘당신은 잠재력이 있다고.’

“일단, 제 허리에 손 더 제대로 감으시고요.”

나는 위험 물질을 만지듯 간신히 내 허리 위에 닿아 있는 이안의 손을 더 바짝 감았다.

이안이 흠칫 몸을 굳히는 게 느껴졌다.

“그리고 절 가만히 내려다보세요. 약간 눈을 내리깔고요.”

“…….”

이안은 대답이 없었지만, 일단 내 말대로 하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기다란 속눈썹 덕에 눈을 내리깐 것만으로도 우수 어린 분위기가 완성되었다.

“절 계속 쳐다보셔야 해요. 눈은 간혹만 깜빡이시고.”

이안은 시키는 대로 하려고 노력하는 듯했다.

바다처럼 푸른 눈동자가 나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순간 나는 숨을 멈췄다.

이상했다. 그저 시선이 마주치고 있을 뿐인데, 덫에 걸린 듯 옴짝달싹할 수 없었다.

‘어라.’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잘 나가던 눈빛 강의에 공백이 생겼다.

억지로 다시 입을 열어 보려 했으나,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이게 갑자기 무슨 현상이지.

눈이라도 감아 보려 했으나 그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마치 눈을 감으면 큰일이라도 날 것처럼, 이안의 시선으로부터 달아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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