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1화 (31/161)

31화

뭐지. 뭘까.

대놓고 쪽지를 열어 볼 수는 없었기에 나는 궁금함을 꾹 삼켰다.

코델리아와 헤어지고, 성당의 내 방으로 돌아온 뒤에야 나는 얼른 쪽지부터 펼쳐 보았다.

「멜로디 히아신스는 우리의 친구!」

이게 뭔 소리야?

쪽지에는 달랑 그 내용만 적혀 있었다.

나는 쪽지를 앞뒤로 이리저리 뒤집어 보았다. 저 이상의 메모는 없었다.

‘아니, 누가 마탑주 아니랄까 봐 저번부터 수수께끼 되게 좋아하네.’

나는 끙, 신음을 내뱉었다.

멜로디 히아신스라면 오늘 만난 영애의 이름이었다.

조용하고 숫기 없는 인상의 아가씨였지.

말도 많이 나눠 보진 않았다.

뜬금없이 그 영애가 우리의 친구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람.

저번처럼 혼자 남으니 쪽지가 변화하는 일도 없었다. 마법이 전혀 걸려 있지 않은, 평범한 쪽지인 듯했다.

‘에라. 모르겠다.’

당장 추리가 필요한 일이었다면 좀 더 단서를 주었겠지. 내용을 기억만 해 놓자.

나는 쪽지를 꼼꼼히 찢어서 벽난로 안에 던져 넣었다.

금세 종이쪽지는 새까만 잿가루로 변했다.

* * *

다음 날.

그날도 나는 메르시 씨와 이마를 맞댄 채 카탈로그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번에 고를 품목은 결혼식 날 머리에 쓸 티아라였다.

티아라는 제작할 시간이 부족했기에 이미 만들어진 기성 제품 중에 선택해야 했다.

대신 그만큼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최상급으로만 준비했다며 메르시 씨가 강조했다.

“이 물건은 어떠신지요. 베르닐 광산에서 채취한 에메랄드 중 가장 순도 높은 것을 박아 넣은 최상급 티아라입니다.”

물건들은 하나같이 휘황찬란하기 그지없었다.

종교인, 하면 청렴하거나 소박한 이미지를 갖고 있었던 내겐 이 결혼식 준비가 통째로 문화 충격의 연속이었다.

이 나라는 종교인에게 딱히 그런 미덕을 기대하지는 않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사치를?’

그때 메르시 숍의 직원이 반짝이는 눈을 하고 말했다.

“저희 숍에서도 이렇게 화려한 신부님을 모시게 된 건 처음이에요. 이안 님께서 아이린 님을 정말, 정말 많이 사랑하시나 봐요!”

사랑.

나는 쑥스러운 척 허허 웃음을 흘렸다.

그래. 내 세상에서나 이 세상에서나 사랑을 재단하기 가장 쉬운 척도는 돈이었다.

즉 이안은 나와의 결혼식에 펑펑 돈을 뿌림으로써 자신이 정말로 사랑에 푹 빠져 있노라고 온 세상에 선언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건 좋은데. 이렇게까지 돈이 많단 말이야?’

나는 메르시 씨가 보여 준 티아라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베르닐 광산에서 채취한 최상급 에메랄드로 만들었다는 티아라는, 정말 보기만 해도 눈이 황홀할 정도였다.

분명 드레스랑 맞먹도록, 아니. 드레스보다도 비싸겠지.

이런 돈을 마구 써 대는 이안의 재력에 문득 의문이 갔다.

‘성기사단장 봉급이 엄청난가……?’

아니면 황족으로서의 사재를 털고 있는 건가.

음. 어느 쪽이든 사실 내 알 바는 아니지.

나는 기꺼이 메르시 씨가 제안한 아름다운 티아라에 오케이를 외쳤다.

아무튼 예쁘고 화려한 걸 걸치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비록 일 년간만이라고 하더라도.

메르시 씨가 돌아가고 난 뒤, 아네트가 또 다른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아이린 님을 뵙고 싶다는 분이 계세요!”

“응? 누구죠?”

나는 의아한 눈을 했다.

날 찾아올 사람이라고 해 봤자, 이안이나 코델리아 정도인데.

“히아신스 자작가의 멜로디라는 영애라고 하십니다! 들여보낼까요?”

멜로디 히아신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멜로디 히아신스는 우리의 친구!」

어제 리젤로가 건넸던 쪽지에 쓰여 있던 발랄한 문구가 떠올랐다.

‘설마.’

나는 두려움으로 꼴깍 침을 삼키면서도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아는 분이에요. 들여보내 줘요.”

잠시 뒤, 주홍색 머리를 하나로 묶은 영애가 방 안으로 등장했다.

“아이린 님!”

애교 가득한 말투로 내 이름을 외치며.

“메, 멜로디 영애.”

나는 정처 없이 떨리는 시선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일단 멜로디를 안으로 들였다.

“갑자기 불쑥 찾아와서 죄송해요. 아이린 님이 너무너무 뵙고 싶어져서 참을 수가 없었어요!”

‘뭐지.’

발랄하고 귀여운 목소리에 나는 멍청히 눈을 끔뻑였다.

어제 만난 멜로디 양은 분명 이렇게 애교 많은 성격은 아니었다.

문득, 리젤로가 코델리아인 척 내게 편지를 보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코델리아를 흉내 내 썼던 문구도 무척 애교가 넘쳤었지.

‘……설마.’

나는 두려운 눈으로 멜로디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냐는 듯 멜로디가 반짝반짝 애교 있게 눈을 깜박거렸다.

“아이린 님, 실은 멜로디 고민이 있어 찾아왔어요.”

멜로디가 돌연 시무룩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자기를 3인칭으로 불렀어……!’

나는 뜻밖의 공격에 얼떨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무, 무슨 고민인가요?”

“그게, 그게. 연애 고민인데요……!”

부끄럽다는 듯 멜로디가 제 뺨을 감싸고 꺄아 하는 소리를 냈다.

“일전에 상담드렸던 그 영식 있잖아요. 그분 관련해서 또 상담하고 싶은 게 생겼어요!”

“그 영식 말이군요…….”

뭔 소린지 전혀 모르겠다.

난 수수께끼 같은 말만 하는 멜로디를 계속해서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역시, 이 영애.

겉만 멜로디고, 그 알맹이는.

“멜로디, 부끄러워서 다른 사람이 듣는 곳에선 말을 못 하겠는데…….”

멜로디가 그렇게 말하며 아네트와 조안 경을 돌아보았다.

신기한 눈으로 멜로디를 바라보고 있던 아네트가 눈치 빠르게 말했다.

“아, 신경 쓰이시면 저는 잠깐 나가 있을까요?”

“정말? 그래 주면 고맙겠어요. 혹시 기사님께서는…….”

그렇게 말하며 멜로디가 조안 경을 향해 눈을 마구 깜빡거렸다. 그 모습이 정말 깜찍하기 그지없었다.

나는 식은땀을 흘리며 조안 경을 돌아보았다.

“조안 경, 잠깐 둘이서 대화할 수 있을까요?”

“……방을 나가진 못하겠지만, 조금 물러나 있겠습니다.”

조안 경이 멀찍이 물러나 주었다.

그래도 청력 좋은 조안 경이라면 우리 얘기가 들리지 않을 정도의 거리는 아니었다.

“조안 경 바보.”

멜로디가 그렇게 속닥거리는 바람에 나는 화들짝 놀랐다.

그런데 조안 경은 미동도 없었다.

고작 이 정도 거리가 벌어졌다고 못 들을 리가 없는데도.

내가 당황한 눈을 하자, 멜로디가 말했다.

“우리에게서 흘러 나가는 소리 입자가 왜곡되어 다른 소리로 들리는 결계를 쳤습니다.”

방금까지의 애교로 범벅된 말투가 귀신같이 사라지고, 한결 낮아진 목소리였다.

나는 경악을 담아 여태 품고 있던 의문을 내질렀다.

“진짜 리젤로 님이세요?”

“너무 소리가 크면 결계가 못 덮는답니다.”

멜로디, 아니.

그러니까 멜로디의 껍질을 뒤집어쓴 리젤로가 윙크를 했다.

“멜, 멜로디 양은 어딜 갔어요?”

“하하. 잡아먹기라도 했을까 봐요?”

기겁하는 내가 재밌다는 듯 리젤로가 씩 웃었다.

“난 변신 가루로 겉모습을 바꾼 것뿐이고, 진짜 멜로디 양은 마탑의 내 방에서 잘 쉬고 있어요. 쪽지에 적었듯, 멜로디 양과는 꽤 막역한 사이라 내가 본인 행세를 하겠다는 걸 이해해 주었죠.”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나는 기가 막혀 말을 더듬었다.

“여긴 대성당인데! 어떻게 여길 속이고 들어올 생각을 하셨죠?”

담이 커도 너무 컸다.

들킨다면 아무리 마탑주라고 해도 즉각 지하 고문실 행일 것이 틀림없었다.

마탑주 해 먹으려면 이 정도 담은 장착해야 하는 건가!

“이안 님께 들키기라도 하면……!”

그 시퍼런 눈으로 날 노려볼 생각을 하니, 상상만 해도 기절할 것 같았다.

아니, 노려보는 정도가 아니지. 계약 파트너고 뭐고 나도 지하실로 끌려갈지도 모른다.

기겁하는 내게 리젤로가 얼토당토않은 말을 했다.

“사랑해 마지않는 정혼자 아닌가요? 이해해 줄 겁니다.”

“물론, 이안 님과 저는, 뜨겁게…… 사랑하는 사이죠. 그렇긴 하지만! 부부는 신뢰로 먹고산다는 말도 모르시나요? 이러시면 정말 곤란합니다.”

“그럼 다음엔 성녀님께서 마탑으로 오시겠어요? 아이린 그레이스라는 이름만 대면 제한 없이 내 방까지 올라올 수 있도록 조치할 테니.”

이렇게 흔쾌히 프리 패스권을 준다고?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리젤로를 쳐다보았지만, 놀랍게도 그는 농담이 아닌 듯했다.

“그것도 곤란해요. 리젤로 님과의 친분이 알려지면 안 되거든요.”

“하긴. 내가 그분이라 해도 기겁하겠군요. 자기 정혼자가 나 같은 사람과 친하게 지내다니.”

리젤로가 킬킬 웃었다. 몹시 성격 나빠 보이는 웃음이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왕 방에 들인 이상, 빠르게 용건을 해결하고 내보내는 수밖엔 없었다.

나는 마치 시한폭탄을 바라보듯 리젤로를 쳐다보며 말했다.

“대금 때문에 오신 거죠? 오십만 마리, 아직 안 데려가셨잖아요.”

“그렇죠. 그것도 있죠.”

그것‘도’?

그 표현이 거슬렸으나 나는 일단 이야기를 꺼냈다.

“일단 보내 주셨던 물건은 아주 요긴히 잘 썼어요. 효능이 좋더군요.”

나는 담담히 리젤로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 마법진이 아니었다면 난 이렇게 무사히 리젤로와 마주 앉아 있을 수 없었겠지.

“어디에 썼는지는 말씀해 주지 않으실 건가요?”

“용도까지는 알려 드리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닌가요?”

“물론 그렇긴 하죠.”

리젤로가 쿡쿡 웃으며 수긍했다. 다행히도 그는 왜 성력 차단 마법진을 부탁했는지 깊게 파고들진 않았다.

나로선 다행인 일이었다.

“고유 송금 주소를 알려 주시면, 약속했던 대금을 입금해 드리죠.”

저번 만남 때 나는 아주 중요한 걸 깜빡했었다.

리젤로의 고유 송금 주소, 즉 이 세계 버전 계좌 번호를 묻는 걸 깜빡했던 것이다.

‘근데, 나야 정신이 없어서 깜빡했다 쳐도, 리젤로는 왜 말해 주지 않았지?’

그때 알려 주지 않은 것 때문에, 리젤로는 굳이 날 이렇게 두 번 찾아와야 했다.

뭐. 아무리 천재 마탑주라도 가끔씩 깜빡할 수 있는 거겠지.

그때 리젤로가 또 뜬금없는 소릴 했다.

“보수를 바꿔 보실 생각은 여전히 없나요? 전 성녀님의 도움 받기 1회권도 여전히 좋습니다만.”

아. 안 사요.

나는 홰홰 손을 저었다.

“고유 송금 주소 부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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