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6화 (26/161)

26화

“……아무것도 아닙니다.”

뭐라는 거야, 이놈의 입.

난 꾹 입을 다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안이 싱겁다는 듯 옅게 헛웃음을 흘렸다. 잠시 뒤에야 그가 나를 놔주었다.

“자. 세즈 매듭은 이렇게.”

어깨를 내려다본 나는 탄성을 뱉었다.

그새 매듭은 기하학적이면서 완벽한 모양새를 내고 있었다.

‘그 설명서를 완벽히 재현하는 게 가능했다니.’

“……감사합니다.”

“배우겠습니다, 단장님.”

“저, 저도 배우겠습니다!”

곁에서 지켜보던 조안 경과 아네트도 차례로 감탄했지만, 난 백날 이것만 연습한다고 해도 똑같이 재현할 순 없을 것 같았다.

“그럼, 슬슬 출발하시죠. 다들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시계를 돌아본 이안이 말했다.

나는 후, 심호흡을 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는 되었다. 남은 건 실전뿐이었다.

가짜 성녀로서 완벽히 데뷔해야 하는 순간이 마침내 온 것이다.

* * *

‘무슨 사람이 이렇게 많아!’

의식이 치러질 대강당.

나는 이미 몰려들어 있는 인파를 바라보며 아연실색했다.

“오오, 아이린 님이다.”

“분홍 머리에 신성 예복! 틀림없어. 아이린 님이 도착하셨다!”

“이안 님과 함께 오셨어!”

날 알아챈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 광경이 마치 파도와 같았다.

나는 꿀꺽, 침을 삼키곤 슬며시 어깨를 폈다.

‘자, 당당하자. 비록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사기를 쳐야 하는 순간이지만 당당하자!’

난 성녀다!

그것도 예지의 능력을 지닌 성녀다!

한껏 자기 세뇌를 하며 인파 사이를 걷는데, 이안이 슬며시 허리를 굽혀 속삭였다.

“긴장했습니까?”

“어떻게 안 해요?”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을 크기로 우리는 속삭였다.

“긴장할 게 뭐 있습니까. 말했듯 어차피 우리 둘 다 완벽한 평판은 글렀는데.”

“응원 참 감사하네요!”

이 인간은 도와주러 온 거야, 방해하러 온 거야.

나는 분노와 긴장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이안은 내가 단지 많은 사람의 시선 때문에 굳어 있는 줄 알겠지만, 가장 큰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성공, 하겠지.’

나는 아까부터 괜히 간지러운 오른쪽 손등을 움찔거렸다.

현재 그 위에는, 리젤로가 조달해 준 재료로 그린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투명히 말라붙어서 보이지 않을 뿐.

강당 끝까지 다가가자, 온화한 인상의 주교가 나를 반겼다.

“어서 오십시오. 아이린 그레이스 님. 처음 뵙겠습니다. 주교 케넨 브리온이라고 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케넨 주교님.”

이 사람이, 바로 내 성녀 검증을 맡아 줄 케넨 주교.

나는 긴장을 숨기며 케넨 주교와 인사를 나누었다.

“검증 절차는 간단합니다. 이 성배 안에 손을 담그시면 됩니다.”

나는 케넨 주교가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아름다운 성배였다.

최고의 장인이 심혈을 기울인 듯한 천사 조각과, 한가운데 자리 잡고 있는 커다란 보랏빛 보석.

한숨이 나올 만큼 아름다운 성배 안에는, 투명한 물이 가득 담겨 있었다.

설마 넣자마자 사기꾼에게 노한 신이 꽈르릉 벼락을 내리치는 건 아니겠지.

‘봐주십시오, 이 세계의 신이시여. 전 그저 살고 싶을 뿐이에요.’

게다가 전 애초에 여기로 오고 싶지도 않았다고요. 따지자면 당신들이 사고 친 걸 제가 아등바등 수습하고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봐줘!’

나는 숨을 삼키며 성수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다행히 어디서 천둥소리가 들리진 않았다.

“잘하셨습니다. 이제 잠시 눈을 감으신 뒤, 편히 숨 쉬고 계시면 됩니다.”

온화한 표정으로 케넨 주교가 말했다.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케넨 주교가 나지막이 신성어를 읊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이다.

나는 입속으로 작게 시동어를 읊었다.

리젤로가 종이봉투에 함께 적어 준 주문을 희미하게 웅얼거리자, 마법진이 그려진 오른쪽 손등 위로 짜릿한 감각이 내달렸다.

동시에 이곳저곳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오……!”

“역시.”

나는 내리깐 눈을 떠 성수반을 바라보았다.

순간 나도 모르게 숨이 멈췄다.

성수 위로, 황홀한 황금빛 기포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성녀의 증표군.”

“십오 년 만에 보는 광경이야.”

“틀림없다. 역시 십오 년 만에 나타나신 성녀님이로군!”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나갔다.

‘됐…… 다.’

나는 휘청거리려는 몸을 간신히 다잡았다.

“아름다운 황금색이군요.”

케넨 주교가 흐뭇한 미소와 함께 나를 바라보았다.

“검증되셨습니다. 십오 년 만에 엘룬께서 보내신 신의 사자여.”

나를 바라보는 케넨 주교의 맑은 눈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양심이라는 놈이 따끔따끔 통증을 호소했다.

케넨 주교는 꿈에도 모르겠지.

눈앞에 서 있는 게 마탑주와 거래한 사기꾼이라는 사실은.

케넨 주교의 능력은 심플하면서도 확실했다.

이 사람의 성력을 성수에 흘려 넣으면, 그 안에 접촉한 사람의 재능에 따라 다양한 색깔의 기포가 피어오른다.

치유사로서의 재능이 있다면 주황 계열, 성검술에 재능이 있다면 푸른 계열 등등.

그리고 성녀가 손을 담그면 황금색의 기포가 피어올랐다.

마치 모 마법 학교 배경의 소설에 나오는 모자나, 과학 시간에 쓰던 리트머스지가 떠오르는 능력이었다.

내가 이렇게 자세히 검증 절차에 대해 아는 이유는 간단했다.

‘원작에 나왔으니까.’

검증 절차는 한 번으로 끝이 아니다.

신도들은 정기적으로 검증받아 자신의 신성력에 이상이 없는지 확인하는 전통이 있었다.

그리고 작중에서, 여주인공은 한 번 악역의 술수에 넘어가 신성력을 모두 잃어버리는 사고를 당한다.

‘물론 여주인공인 데다 진짜 성녀인 만큼 일시적인 현상이긴 했지만.’

문제는 하필 바로 며칠 뒤에 정기 검증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었다.

여주인공의 걱정을 눈치챈 리젤로은, 점수를 따기 위해 그녀에게 제안한다.

자기가 눈속임으로 검증을 통과할 수 있게 해 주겠다고.

방법은 간단하다면 간단했다.

리트머스지 역할을 하는 케넨 주교의 성력을 일시적으로 차단한다.

그리고 인위적으로 황금색 기포를 피어오르게 한다.

후자는 쉬운 일이었다. 마법으로 불꽃놀이도 가능한 세계관이니 그 정도 가시적인 눈속임은 쉬웠다.

문제는 전자.

‘마법으로 성력을 차단한다는 건 그 리젤로마저도 고전할 만큼 난제였지.’

하지만 원래부터 성력 연구에 관심이 많았던 리젤로는 결국 방법을 찾는 데 성공한다.

그 방법이, 지금 내 오른쪽 손등 위에 그려져 있었다.

마법진의 형태로.

“아이린 님. 괜찮으십니까?”

퍼뜩 정신을 차리자, 케넨 주교가 내게 염려 어린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아, 괜찮습니다. 그저 조금, 긴장을 했었나 봐요.”

나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내가 들어도 가증스러웠다.

케넨 주교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긴장하실 것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지만, 이제 가장 중요한 절차가 남아 있군요.”

알고 있었다.

성녀 임명식. 그게 끝나야만 ‘아이린 그레이스’는 교단에게 정식으로 인정받은 진짜 성녀가 되는 것이다.

“추기경 성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안이 나를 에스코트했다. 마치 레이디를 수행하는 기사처럼.

평소에는 잠겨 있는, 대강당 안쪽 벽이 양옆으로 열리기 시작했다.

아름답게 조각된 벽이 벌어지고, 그 안으로 널찍한 공간이 드러났다.

‘와아.’

나는 나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오직 성스러운 일만을 행하고자 만들어진 방 같았다.

벽면을 메운 신과 천사의 조각들, 백색으로 가득 찬 내부.

그 한가운데에 노년의 여성이 자리해 있었다.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분이 엘룬교의 현 추기경, 안나 그레이스였다.

“어서 오십시오. 성녀여.”

두 신관의 부축을 받은 채, 추기경 성하가 내게 말했다.

나는 긴장해서 뚝딱거리는 몸으로 추기경 성하께 걸어갔다. 이안이 에스코트해 주지 않았다면 이리저리 휘청대며 걸었을 것이다.

가까이서 마주한 추기경 성하는 몹시 독특한 인상이었다.

마치 한 수백 년 묵은 불상 같달까.

“그대의 등장은 일찍이 전해 들었으나, 몸이 좋지 않아 이제야 인사하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아닙니다, 추기경 성하. 이제라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는 정중히 예를 취하며 그렇게 말했다.

추기경 성하의 불상 같은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어렸다.

“그대, 아이린 그레이스. 엘룬 신의 부름을 받은 분을 이제부터 교단의 은인으로 모시려 합니다.”

추기경 성하의 엄숙한 목소리에 강당이 사위가 죽은 듯 고요해졌다.

“아이린 그레이스, 그대는 엘룬 신께 받은 선물을 우리를 위해 나누겠습니까?”

“예. 기꺼이 그러겠습니다.”

내가 대답하자, 신도 한 명이 추기경 성하께 성녀의 관을 내밀었다.

추기경 성하는 그것을 받아 내 머리 위에 씌워 주었다.

“엘룬 신의 은혜가 언제나 그대와 함께하길.”

묵직한 관이 머리를 내리눌렀다.

그 무게감에 여러 기묘한 기분이 교차했다.

개중 가장 큰 감정은 이거였다. 정말 저질렀구나, 하는 깨달음.

‘소시민 이서연, 많이 컸다.’

결국 네가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사기를 쳐 버리고 말았구나.

이어 이안이 내게 다가왔다.

성녀 임명식의 절차는, 성녀가 추기경에게 관을 받은 뒤 성기사단장에게서 영원히 지키겠다는 맹세를 받는 것까지라고 들었다.

이안이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내려다보는 이안의 얼굴은 새삼스레 생소히 느껴졌다.

그가 나를 잠시 올려다보더니, 내 손등 위로 입을 맞췄다.

손등을 타고 따스한 간질거림이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이안 에스테반, 맹세합니다. 내 심장을 걸고 그대를 지키겠습니다.”

창공처럼 새파란 눈이 나를 가득 담았다.

* * *

임명식이 끝난 뒤, 성당에선 성녀 임명을 축하하는 연회가 열렸다.

하도 긴장한 탓에 피곤해 죽을 노릇이었지만, 나를 위한 장소에 빠질 순 없었다.

연회장에 들어서자 수많은 사람이 나를 반겼다.

“헉, 성녀님께서 드셨다.”

“아이린 님이시다!”

여기저기서 속닥이는 목소리에 얼굴이 좀 화끈거렸다.

이런 주목은 역시 익숙지 않았다.

그때 근처에서 누군가 사람들 사이를 누비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코델리아!’

고작 두 번 봤지만, 아는 얼굴이라고 반가운 기분이 들었다.

사람들이 당연한 듯 얼른 코델리아를 위해 자리를 비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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