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화 (18/161)

18화

“저를 이 범죄자라고 몰아가는 증거는, 그게 전부인가요?”

“이름과 나이대, 게다가 외형까지 일치합니다. 충분히 세간에서 의심을 살 만한 사안이라 생각되어 걱정을 금할 길이 없었습니다.”

정말 걱정이 된다는 듯한 목소리에 나는 속으로 헛웃음을 쳤다.

이제 보니 파르아스 백작은 꽤 연기파였다.

‘청중은, 훔쳐 듣고 있을 이 살롱의 모든 이들이겠고.’

“그러시군요. 하지만 아시다시피, 제 이름은 몹시 흔해요. 나이대가 같다는 것 역시 증거가 되지 못하고요.”

나는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파르아스 백작은 내가 조금도 당황하지 않자 되레 놀란 눈치였다.

“그리고…… 아, 그래. 외형이 같다고 하셨지요? 다행이에요. 백작님의 ‘걱정’은 제가 여기서 없애 드릴 수 있겠네요.”

백작을 향해 방긋 웃어 보이자, 그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살롱의 모든 이가 들을 테니 얼버무려선 안 된다. 확실히 백작의 의심을 타파해야 했다.

즉, 강수를 둘 타이밍이란 뜻이다.

후. 가볍게 한숨을 내쉰 나는 내 머리칼에 손을 댔다.

‘아침엔 끔찍한 날벼락이 닥쳤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이런 식으로 도움이 될 줄이야.

“혹시 날붙이가 있을까요?”

주변을 돌아보며 묻자, 레이디 하나가 얼떨떨한 얼굴로 페이퍼 나이프를 건넸다.

나는 그것을 내 머리칼 끝으로 가져갔다.

사각.

손가락 한 마디만 한 길이의 머리카락이 잘려 나갔다.

“어머!”

“헉!”

여기저기서 놀란 소리가 터져 나왔다.

내 돌발 행동에 백작 역시 한껏 당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 아이린 님. 갑자기 이게 무슨…… 어라?”

곧 백작의 목소리가 당황으로 물들었다.

더 이상 내 몸의 일부가 아니게 된 머리카락들이, 순식간에 다른 색으로 물들었다.

벚꽃 같은 분홍빛으로.

“이게 무슨…….”

적잖이 놀랐는지 백작이 입술을 뻐끔거렸다.

나는 방긋 웃으며 말했다.

“제 갈색 머리는 사실 진짜 머리 색이 아니에요. 진짜는, 이 분홍색이죠.”

잘라 낸 머리카락들을 보이며 내가 말했다.

백작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한 듯했다.

“설, 설마.”

백작이 더듬거렸다.

“마법으로 머리 색을……?”

“네, 맞아요.”

상쾌하게 웃어 주며 말하자 백작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놀랐겠지. 당연히 놀랐을 것이다.

나도 오늘 아침에 얼마나 놀랐었는데.

백작은 잠시 뒤에야 정신을 차린 듯 간신히 반격을 시도했다.

“외람되오나, 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 값비싼 변신 가루를 왜 사용하고 계셨던 겁니까? 역시 정체를 숨기고 싶으신 게 아닌지요?”

음. 역시 이렇게 나오네.

나는 더 짙게 미소를 지었다.

파르아스 백작의 말이 맞았다. 내겐 말할 수 없는 정체가 있다.

그렇기에 더더욱 빈틈을 보일 수 없었다.

나는 살며시 고개를 기울이며 말했다.

“왜냐면…….”

어디 말해 보라는 듯 백작이 턱을 치켜든 채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갸웃한 채로 마저 말했다.

“분홍색 드레스가 마음에 들었는걸요.”

“……예?”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었던 듯, 백작의 목소리가 삐끗했다.

나는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요즘 분홍색에 푹 빠졌는데, 하필 제 머리카락도 분홍색이어서요.”

“그, 그게 무슨.”

백작이 당황한 얼굴로 뻐끔거렸다.

“말이, 말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런 이유로 변신 가루를 쓰고 다니셨다고요?”

“왜 말이 안 된다고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분홍색 머릴 하고 분홍색 드레스를 입을 순 없잖아요? 그랬다간 분홍색에 잡아먹힌 사람처럼 보일 텐데요.”

나는 정말 이해가 안 된다는 듯한 얼굴로 말했다.

부족한 개연성을 뻔뻔한 연기력으로 밀고 나가자는 전략이었다.

“무슨 그런…….”

파르아스 백작이 허둥거렸다.

백작 옆에 서 있던 주교가 다소 혼란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조금 이상하긴 하지요.”

“그렇죠? 주교님께선 이해해 주셔서 다행이네요. 참고로 이안 님께서 고민하는 절 위해 제시해 주신 아이디어랍니다.”

덧붙인 거짓말에 사람들이 또 술렁거렸다.

“이안 님께서 직접…….”

“변신 가루도 이안 님이 사 주신 거겠죠?”

“사치하시는 성격이 절대 아니신데. 이번엔 정말 단단히 사랑에 빠지시긴 한 모양이에요.”

“아니, 말도 안 됩니다!”

백작이 목소리를 높였다.

가져온 무기가 물에 빠진 총처럼 무용지물이 되자 몹시 당혹한 모양이었다.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런 변명 말고 솔직히 말씀해 주십시오! 어떤 과거를 감추고 계신 겁니까. 지금이라도 솔직하게 털어놓아 주신다면―”

“지금 누굴 몰아세우고 있는 겁니까?”

그때,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옆을 돌아본 파르아스 백작의 얼굴이 얼음처럼 굳었다.

‘언제 왔지?’

갑작스러운 이안의 등장에 나조차도 화들짝 놀랐다.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지만.

“이…… 이, 이안 님.”

“내 약혼자께 궁금한 것이 많은 모양인데.”

이안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푸른 눈동자는 서리가 뚝뚝 떨어질 듯 차가웠다.

백작은 뒷걸음질을 시도했지만, 곧 테라스 난간에 가로막혔다.

“그렇다면 날 상대했어야지. 감히 누구를 겁박하는 건가.”

하찮은 벌레를 내려다보듯 이안이 파르아스 백작을 노려보았다.

이 순간 그는 정의로운 성기사단장이 아닌, 선황의 친아들이자 제1 황위 계승권자인 황족이었다.

“이안 님, 저는 그런 것이 아니라.”

파르아스 백작이 더듬거렸다.

이안이 어지간히도 무서운 듯했다.

그래서 굳이 그가 없는 뒤풀이 연회를 틈타 날 노린 것일 테고.

‘그렇게 무서우면 애초에 수작을 부리지 말았어야지!’

깜짝 놀랐잖아. 흥.

나는 파르아스 백작을 흘겨보며 속으로 생각을 정리했다.

저렇게 담이 약한 파르아스 백작이 이 일을 주도하진 않았을 것이다.

‘즉, 백작은 앞잡이로 던져진 하수인에 불과하다는 건데.’

누굴까?

백작을 조종한 진짜 범인이.

“저는 그저, 아이린 님을 둘러싼 오해가 커지는 것이 걱정되어서, 그래서.”

“그걸 지금 변명이라고 내미는 건가?”

이안이 이번엔 나를 돌아보았다.

시퍼렇게 냉기 서린 눈동자와 마주치자 이번엔 내가 퍼뜩 놀랐다.

내게로 다가온 이안이 조심스레 물었다.

“많이 놀라셨습니까? 안색이.”

내 안색?

나는 나도 모르게 내 뺨을 더듬었다. 보나 마나 평소와 똑같은 안색일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나는 살며시 입을 열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조금…… 놀라긴 했어요.”

“죄송합니다. 제가, 그대 곁을 떠나지 않았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이안 님의 잘못이 아닌걸요.”

“이렇게 안색이 상하다니…….”

정말 걱정스럽다는 듯 이안의 눈빛이 나를 살폈다.

저 눈빛 좀 봐. 나는 남몰래 감탄했다.

백 년 동안 멜로 연기만 해 온 멜로 연기 장인 같다.

‘순결남 주제에…… 제법이잖아?’

묘한 경쟁심이 발동했다.

온갖 로맨스 소설과 드라마로 다져진 내가 질 수 없었다.

“이안 님이야말로, 안색이 좋지 않으세요. 저 때문에 놀라신 거죠? 그러지 마세요…… 제 마음이 더 아프니까.”

내친김에 이안의 뺨까지 쓰다듬고 싶었지만, 아무리 경쟁심이 불붙었다고 해도 거기까진 용기가 안 났다.

“그대는 정말. 언제나 내 생각을 먼저 해 주는군요.”

이안도 만만치 않았다.

다정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에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살롱 안의 모든 시선이 우리에게로 쏠려 있는 것이 느껴졌다.

지금이다. 나는 없는 연기력을 박박 긁어모았다.

“당연하죠. 제게 가장 중요한 건…… 언제나 이안, 당신이니까.”

그렇게 말하며 속눈썹을 아련하게 팔랑대는 것도 잊지 않았다.

드라마에서 인상 깊은 장면을 보면 절친 소연이와 늘 재현해 보던 게 나름대로 영양가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흥이 오른 나는 결국 이안의 한쪽 뺨을 살며시 감싸며 말했다.

“그러니, 제 걱정은 하지 말아요. 난 그대만 있으면, 괜찮으니까.”

“…….”

이안은 잠시 말이 없었다.

돌아오는 응수가 없자 나는 약간 뿌듯해졌다.

‘아무래도 내가 이긴 듯.’

K-드라마 애청자의 승리였다.

몇 초 뒤에야 이안이 입을 열었다.

“아이린. 오늘은 이만 쉬시는 게 어떻습니까.”

“그럴까요? 조금, 피곤하기는 해서.”

나는 얼른 이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이안과의 페이크 러브 스토리를 신나게 떠벌렸으니, 오늘 뒤풀이 연회의 목적은 달성한 셈이었다.

나를 데리고 테라스를 나서던 이안이 파르아스 백작을 돌아보았다.

“이 무례에 대해 어떻게 사죄할지, 생각해 두는 게 좋을 거요.”

파르아스 백작이 돌처럼 굳어 버렸다.

이안은 그런 백작을 거들떠보지도 않고 테라스를 나섰다. 물론 나와 함께.

“먼저 들어가게 되어 죄송해요.”

살롱으로 돌아온 나는 영애들을 향해 사과했다.

멍한 얼굴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영애들이 허둥지둥 대답했다.

“아니에요! 어서 들어가 보세요.”

“오늘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마지막에 불미스러운 일을 겪게 되셔서 유감이에요.”

“머지않아 또 뵐 수 있길 바라요.”

코델리아 성녀도 눈빛으로 내게 인사를 건넸다.

마주 인사한 나는 이안과 함께 살롱을 나섰다.

“휴우.”

내 방으로 돌아오는 복도에서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이안이 나지막이 말했다.

“생각보다 빨리 움직임이 있었군요.”

“그래도 잘 대처했어요.”

나는 뿌듯함을 숨기지 않으며 말했다. 이안이 나를 돌아보았다.

“정말 괜찮은 겁니까?”

뭐야. 아직도 걱정하는 연기 중?

나는 싱겁다는 듯 픽 웃었다.

“그 백작님, 너무 하수여서 겁도 안 나던걸요. 한 번 당황하기 시작하니까 제풀에 넘어지더라고요.”

이안이 나타나지 않았더라도, 당황한 파르아스 백작은 점점 제 무덤을 팠을 것이다.

첫 대립에 걸맞게 Lv. 1짜리 적이 나와 준 느낌이었다.

“그나저나, 다들 제 과거에 관심이 많은 것 같더라고요. 뭐, 당연한 일이긴 하지만.”

잠깐 고민하던 나는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도망 노예라는 제 과거를 곧이곧대로 이야기해도 될까요?”

“괜찮겠습니까?”

이안이 또 괜찮냐는 물음을 던졌다.

그런 과거가 밝혀져도 정말 내가 괜찮겠냐는 질문인 듯했다.

‘오늘따라 배려가 잦네.’

나는 괜한 기분에 콧잔등을 긁적였다.

첫 만남부터 죽이겠다느니 하며 으르던 사람에게서 배려를 받자니 기분이 약간 요상했다.

“저야 뭐, 크게 상관은 없어요. 문제는 이안 님이죠. 약혼녀가 도망 노예여도 괜찮겠어요?”

“난 그대의 출신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이안이 딱 잘라 말했다.

“당신이 노예였든, 왕족이었든 내게 훼방꾼인 건 똑같으니까.”

“네, 네. 정말 죄송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영혼 없이 사과했다.

이안이 그런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너무 영혼이 없었나? 뜨끔한 내가 그의 눈치를 볼 무렵이었다.

“하지만 아무래도 사실이 그대로 밝혀지면, 그걸 약점 잡아 당신을 괴롭히려는 무리가 있을지도 모르지요.”

나는 그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 나라, 레하트 제국은 노예 제도를 미개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막상 내가 노예였다고 하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낼 사람이 분명 있을 것이다.

“내게 생각이 있습니다.”

이어진 이안의 말에 나는 쫑긋 귀를 세웠다.

“뭔데요?”

잠시 뒤, 설명을 들은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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