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일 났다.’
하필 이안에게 딱 걸릴 게 뭐람.
괜찮아. 나는 스스로를 다독였다.
나는 앞으로 일 년간 전 제국민을 속여야 하는 입장이었다. 이까짓 난관쯤 가볍게 돌파할 수 있다!
난처한 미소를 지으며 나는 입을 열었다.
“바람만 쐬고 들어가려 했는데, 커다란 쌍둥이 탑이 눈에 확 들어와 버렸지 뭐예요. 아시다시피 마탑은 제도의 명물 중 명물이잖아요.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그만.”
이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미심쩍음을 숨기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때 별안간 아네트가 외쳤다.
“저 때문이에요, 단장님! 아이린 님께서는 마탑을 구경하시던 것뿐인데, 제가 멋대로 아이린 님 곁을 떠난 거예요.”
“아네트 양.”
나는 놀라 아네트를 돌아보았다.
아네트는 겉으론 당찬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드레스 뒤로 숨긴 손가락이 빠르게 꿈지럭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왜 그랬지?”
이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아네트의 손가락 꿈지럭이 더 심해졌다.
“잠깐 근처에서 물건만 살 생각이라 괜찮을 줄 알았어요. 그러다가 그만 나쁜 사람들을 만나서…… 정말 죄송합니다.”
아네트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저 때문에 아이린 님까지 위험에 빠지셨어요. 입이 열 개여도 할 말이 없습니다.”
“아니에요, 아네트 양. 저놈들이 나쁜 놈들이었던 거잖아요? 아네트 양이 잘못한 건 하나도 없어요.”
“아이린 님…….”
실제로 그랬다. 아네트가 한 일이라곤 대로변을 걸은 것뿐이었다.
설마 그런 곳에서 저런 간 큰 미친놈들을 만날 줄 아네트도 몰랐겠지.
사실만 말하며 두둔했는데 아네트가 나를 몹시 감동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하아. 뭐. 알겠습니다.”
이안이 한숨과 함께 놀라운 말을 했다.
나는 깜짝 놀라 고개를 쳐들었다.
“이해해 주시는 건가요?”
“내가 당신을 감금했던 건 아니니까. 단 앞으론 조심해 주십시오. 아무리 제도라고는 해도, 저런 쓰레기들은 어딜 가든 존재하니까.”
이안이 서늘한 눈길을 우리 뒤로 던졌다.
이안의 등장과 함께 동상처럼 얼어 있던 불량배들이 털썩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댜, 댠댱님.”
“용서해 듀딥디오! 저희가 잘못했숩니다!”
그런데 발음이 매우 이상했다.
‘오르비 열매가 제대로 일했네.’
내가 뿌린 열매에 정통으로 맞은 녀석들은, 온 얼굴이 울퉁불퉁 부어 있었다.
입술까지 팅팅 부은 꼴이 몹시 미관상 좋지 않았다.
“사과는 내게 할 게 아니지 않나?”
얼음처럼 시퍼런 시선으로 이안이 불량배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우와, 나 같으면 이 자리에서 기절했음.’
옆에서 지켜만 봐도 사지가 오그라드는데, 정통으로 그 눈길을 맞고 있는 불량배들은 얼마나 무서울까.
‘그러게 왜 대로변에서 희롱을 해, 하길. 미친놈들!’
“레, 레이디. 데동합니다!”
“쥭을 죄를 디었숩니다!”
나는 불량배들의 이상한 발음을 들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데동하다는 게 어느 나라 말이지? 아네트 양, 알아듣겠어요?”
“저도 모르겠습니다!”
“레, 레이디……!”
“아무튼, 합의는 없어요. 달게 정의의 심판을 받길.”
저런 놈들은 사회에 풀어 두면 안 된다.
그때, 누군가 다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아이린 님! 무사하시― 단장님?”
골목길로 달려온 것은 조안 경이었다.
나와 이안을 발견한 조안 경이 절도 있게 고개를 숙였다.
“무사하신 것으로 보여 일단 다행입니다. 모두 호위를 명민히 하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어떤 처분이든 달게 받겠습니다.”
“아니에요, 조안 경! 제가 다른 문으로 나와서 조안 경이 발견하지 못하신 거잖아요. 제 실수였어요, 이안 님. 조안 경은 잘못 없어요.”
나는 황급히 조안 경을 두둔했다.
조안 경은 내 꾀에 당한 것일 뿐이다. 영화를 볼 때 보디가드 눈을 피해 요리조리 사고 치는 캐릭터들을 보며 왜 저러나 분통을 터뜨렸었는데, 그게 내가 될 줄은 몰랐다.
“고개 들어라. 조안.”
“예.”
“오늘 일은 따로 책임을 묻겠다. 아이린 님은 내가 모시고 돌아갈 테니, 너는 저것들을 처리하고 오도록.”
이안이 불량배들을 고갯짓하며 말했다. 조안 경이 경례했다.
“예, 단장님.”
조안 경이 불량배들에게 다가가자, 그놈들이 미친 듯이 떨었다.
“히, 히익, 조안 오르톄스?”
“미친개 죠안?!”
“뎨, 뎨발 살려 주십시오!”
불량배들이 엎드려 싹싹 빌기 시작했다. 조안이 가까이 다가갈수록 기어코 울음을 터뜨리는 놈도 있었다.
그 모습을 더 구경하고 싶었으나, 이안이 나를 데리고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정 마탑이 궁금하다면.”
마차로 향하며 이안이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내게 부탁하십시오. 동행해 줄 테니.”
“이안 님께서 제 마탑 관광을 돕겠다고요?”
농담인가 싶어서 나는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이안의 얼굴은 진지했다.
“마탑엔 위험한 자들이 상주합니다. 십오 년 만에 나타난 성녀는 필시 호기심의 대상일 테죠.”
그렇게 말하는 이안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위험한 자들…… 리젤로를 말하는 건가?’
하긴, 원작에서도 이안과 리젤로는 사이가 좋지 않았다.
당연했다. 리젤로는 원작 여주에게 미친 집착남이었고, 이안은…….
‘원작 여주의 첫사랑이었으니까.’
이안을 질투한 리젤로가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바람에 둘의 사이가 나빠진 건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원래 상성이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앞으로 어떻게 한담.’
리젤로를 만나지 못했다.
성녀 검증 절차가 앞으로 단 십삼 일 남았다. 그 안에 무조건 리젤로를 대면해야만 했다.
‘한 번 걸린 이상, 마탑에 직접 찾아간다는 선택지는 당분간 무리수고.’
다른 방법으로 선회해야 하는 건가.
마탑에 곧바로 찾아가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이긴 했지만, 이렇게 된 이상 어쩔 수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깊이 한숨 쉬자, 이안이 내게 시선을 던졌다.
“모레가 우리의 약혼식인 건 기억하고 있습니까?”
“그럼요.”
잊을 리가 없었다.
내 인생 첫 약혼식이었으니까.
‘안 지 사흘 된 남자와 약혼이라니, 정말 이서연 인생 알 수 없다.’
이안이 이렇게까지 서두르는 이유는 알고 있다.
신문에 스캔들이 대서특필된 이상 하루라도 빨리 관계를 공식적으로 인정해야 했다. 지저분한 소문이 더 커지기 전에.
불장난이 아닌 진지한 약혼 관계임을 쐐기 박아 놓아야 한다는 건 확실히 이해했다.
‘하지만 그건 전부, 이안이 내가 성녀임을 완벽히 확신하고 있을 때 이야기지.’
선황의 유해에 대한 이야기로 이안이 나를 믿기로 했음은 알고 있다.
성녀 검증 절차는 앞으로 열흘도 넘게 기다려야 하니, 이안으로서는 나를 내치든 품든 당장 선택해야 했겠지.
결국 나와 한배를 타기로 선택해 준 건, 나로선 고마운 일이긴 했다.
그런데, 만에 하나 이안이 자신의 선택이 틀렸음을 알게 된다면?
그때를 대비한 계획도 마련해 놓은 걸까?
몹쓸 호기심이 내 입을 열었다.
“혹시,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제가 검증 절차를 통과하지 못한다면요? 어떻게 되는 건가요?”
“궁금합니까?”
이안이 비스듬히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온몸에 소름이 끼친 나는 빠르게 후회하며 얼른 고개 저었다.
“아뇨. 별로 안 궁금합니다.”
“말씀드리죠.”
“괜찮아요! 안 들을게요.”
“말씀드리겠습니다. 부인께서 우리 계약에 대해 아직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신 것 같으니.”
이안이 천천히, 내게로 상체를 숙였다.
유리 호수처럼 새파란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담았다.
“불변의 계약석을 나눈 이상, 우린 이미 한배에 올라탄 겁니다. 누가 거짓말을 했든, 사기꾼이든…… 혹은 설령, 당신이 성녀가 아니라고 해도. 그대는 계약 기간 동안은 내 부인입니다. 어떤 형태로든지.”
‘어떤 형태로든지?!’
위험하도록 낮은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나긋이 설명해 주는 그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친절했지만, 내용은 살벌하기 그지없었다.
‘어떤 형태로 만들 건데!’
“물론 배신당한 내 마음은 아프겠지만.”
이안이 턱도 없는 소릴 덧붙였다.
‘마음이 아프긴 무슨. 그때야말로 날 지하 감옥으로 끌고 가서 사정 안 봐주겠지.’
씨알도 안 먹힐 약한 소리에 나는 나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이안이 그런 나를 보며 재밌다는 듯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러니 날 배신하지 마십시오. 부인.”
“그 부인 소리, 둘이 있을 때만이라도 관둬요.”
“싫습니다. 이렇게 질색하시니 더더욱 익숙해져야죠.”
‘하.’
나는 속으로 거하게 헛웃음을 쳤다.
그래, 정 그렇게 나오시겠다.
그렇다면 좋다. 나도 놀림을 받기만 하는 쪽은 아니었다.
“당신 말이 맞네요. 여보.”
“…….”
나는 이안을 올려다보며 환히 눈꼬리를 접어 웃었다.
여보, 라는 단어에 힘을 줘 가며.
“지금부터 빨리 익숙해져야겠어요. 아직은 약혼 관계에 불과하지만, 곧 합방도 해야 하잖아요. 안 그래요, 여보?”
“…….”
합방이라는 말에 이안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나는 속으로 킬킬 웃음을 터뜨리며 쐐기를 박았다.
“그날이 너무 기대되네요. 과연 저희가 첫날밤 연기를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요? 떨리네요. 그렇죠, 여보?”
이안의 벽안이 얼음처럼 새파랗게 굳어 버렸다.
나는 피식 웃으며 등받이 깊숙이 몸을 기댔다.
‘쉽구만, 순결남.’
이안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마차가 다 가도록 말이 없었다.
* * *
“이안 경의 보좌관…… 루시안, 그자가 온갖 대형 상단을 쏘다니고 있다더군요.”
매끄러운 목소리가 황제의 개인 집무실을 울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붉은 머리칼을 허리까지 늘어뜨리고 있었다.
그녀는 오 년 전, 세기의 국혼으로 제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주인공, 황후 로렐라이였다.
“진귀한 꽃과 보석, 야외 장식물을 모조리 사들이고 있다고 합니다.”
황제, 라시드가 킥 웃음을 흘렸다.
“성대한 결혼식을 올리기로 마음먹었나 보군. 우리 아우님이 사치를 하는 성격은 아니었는데…… 늦바람이 든 건가? 아니면 그 성녀가 그렇게나 매력적인 건가?”
“여태 폐하께서 이안 경을 두고 보기만 하셨던 건, 이안 경에게 가문을 이루겠단 의지가 없어서였죠.”
이안 에스테반은 명실공히 황실의 제1 계승권자.
그러나 이제껏 이안은 추기경이 되어 후사를 보지 않을 것이 기정사실이었다.
그건 황제파 중 다수의 이들이 이안을 견제하지 않는 이유 중 하나였다.
“그런데, 이제 와서 성녀를 아내로 맞겠다, 라.”
라시드가 천천히 턱을 쓰다듬었다.
“내 아우가 딴맘을 먹게 된 것일까? 어떻게 생각하시오, 황후.”
“이안 경께서는 늘 폐하께 충직한 모습만을 보이기는 했지요. 지금까지는.”
“흐음.”
빙글빙글 손안에서 와인 잔을 돌리며 라시드가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과연 친애하는 아우님이 정말 첫사랑에 흠뻑 잠긴 것일까? 아니면, 이 형님의 황좌를 탐내기 시작한 것일까…… 아. 그렇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라시드가 눈을 빛냈다.
“그 성녀란 여자를 만나 보면 감 잡기가 쉽겠는걸. 정말 사랑에 빠질 만한 여자인지, 이 두 눈으로 직접 보면 되지 않겠소?”
“조만간 비욘틴 공작 측에서 먼저 움직일 겁니다, 폐하. 그때까지 기다리심은 어떨는지요?”
“글쎄.”
로렐라이의 말에 라시드가 어깨를 으쓱였다.
“황후도 잘 알겠지만, 나는 기다리기만 하는 성미가 아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