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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화 (8/161)

8화

“저, 성녀 아이린이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증발할 수 있도록. 이안 님을 포함해서, 절 알던 모든 이가 절 찾지 못하도록 도와주세요.”

“…….”

“동의하시면 저도 기꺼이 이안 님의 약혼자가 되어 드릴게요. 일 년간은요.”

일 년. 아주 적절한 기간이었다.

복도를 걸어오면서 열심히 계산해 본 결과, 앞으로 정확히 10개월 뒤 이안은 자신의 계획을 완성한다.

온 성기사단의 병력을 끌어모아 황궁을 치겠지.

황제가 된 이안에게는 더 이상 나 같은 가짜 약혼자는 필요치 않을 것이다.

그 점까지는 이안도 생각이 미칠 터.

그런데 어째서인지 이안은 흔쾌히 대답하지 않았다.

“그건 꽤…… 이상한 요구군요. 이유를 물으면 가르쳐 줄 겁니까?”

“아뇨.”

나는 단호히 말했다.

거래를 성립시키기 위해 협상하는 이 시점에서는 강하게 나갈 필요가 있었다.

어금니에 힘을 꽉 주고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날 마주 보던 이안이 기묘한 표정과 함께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정말이시죠?”

“쉽게 이해는 안 가는 조건이지만…… 당신이 정 원한다면.”

“좋아요. 거기까지 약속해 주신다면 거래 성립입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이안은 잠깐 말없이 내 손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뭐야, 설마 이 세계에선 악수 같은 걸 안 하나? 아닌데, 하던데?

머쓱함에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찰나, 커다란 손아귀가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차가운 생김새와 달리 따스한 체온.

난 그걸 맞잡고 만족스레 위아래로 흔들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계약석은 언제 준비되나요?”

“곧장 가져오도록 하죠. 루시안.”

“옙, 단장님.”

잠시 뒤 루시안이 짙은 보랏빛 마석을 가지고 돌아왔다.

마석을 알아본 나는 눈을 빛냈다.

‘불변의 계약석.’

저 계약석으로 이루어진 계약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지켜야만 했다.

지키지 않는다면 대가는 계약자의 영혼.

영혼이 공허로 끌려가, 육신만이 남은 시체나 마찬가지인 상태로 살게 된다.

페널티가 확실한 만큼 신뢰도도 확실하다.

그러니 당연히 불변의 계약석은 계약석 중에서도 최상급 가치를 자랑했다. 아마 어지간한 집 한 채 값은 할 것이다.

이 계약석을 가져온 것만으로도 이안에게 약속을 이행할 의지가 있다는 건 알 수 있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이것으로 계약을 진행해도.”

“물론이죠.”

나는 자신감 있게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안 님께서야말로 자신 있으신가요? 모든 약속을 다 지켜 주실 자신.”

“물론.”

이안이 픽 미소를 지었다.

“좋아요. 그럼 계약하죠. 이안 님께서는 아까 제가 말씀드린 세 가지 조건을 지켜 주실 것. 그리고 저는.”

“일 년간 나의 가짜 아내가 되어 줄 것.”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이안이 덧붙였다.

“양다리 없이.”

……거기 왜 자꾸 집착하는 건데?

다소 황당했으나 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그것까지 포함. 그럼 계약 성립이죠?”

우리는 계약석에 함께 손바닥을 올려놓았다.

동시에 검푸른 마력이 돌에서 솟아 나와 우리의 몸을 감쌌다.

‘계약석에 본명 같은 걸 써야 하는 시스템은 아니라서 다행이다.’

나는 그 성스러운 광경을 구경하며 그런 부질없는 생각을 했다.

* * *

“괜찮으시겠습니까, 단장님?”

루시안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뒤를 쫓았다.

“성녀님께서 무리한 조건을 요구하신 건 아니지만, 그래도 불변의 계약석은 최대한 사용을 줄이시는 편이―”

“족쇄는 확실히 걸어 놔야지.”

흔쾌히 자신에게 손을 내밀던 아이린의 얼굴을 떠올린 이안은 살며시 미간을 찡그렸다.

그 여자는 이 이상한 하루를 통틀어 가장 이상한 존재였다.

이안은 오늘 처음으로 눈을 떴던 순간을 떠올렸다.

먼저 이상을 감지한 건 후각이었다. 코끝에 기묘한 냄새가 스쳤다.

타인의 살냄새. 그리고 미약한 입욕제 향기.

뭔가가 잘못됐다.

그걸 깨달은 순간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누, 누, 누구…….’

사냥당하기 직전의 사슴처럼 떨리는 목소리.

순식간에 심장이 차갑게 식었다. 지금, 그의 품 안에 침입자가 안겨 있었다.

‘뭐지, 당신은?’

그렇게 물으며 이미 이안은 오른손 손아귀에 힘을 주고 있었다.

언제든 이 기묘한 사슴의 목 줄기를 틀어쥐고 제압할 수 있도록.

침입자는 커다란 녹색 눈망울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사정없이 입술을 떨며 침입자가 말했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그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인사말을 듣는 순간, 허탈히 그의 손아귀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어떤 침입자가 이렇게 얼빠진 소릴 한단 말인가.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사실은 이게 현실이 아닌가?

그 멍청한 생각이 뇌리를 스치지만 않았어도, 이안은 숨쉬기보다 쉽게 여자를 제압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안은 그러지 못했다.

그 찰나의 방심이 실책이었다.

‘제압했더라면, 일이 훨씬 더 쉽게 흘러갔겠지.’

이안은 예상치 못한 일과 마주하는 것을 아주 싫어했다.

하지만 때로는 겹치는 우연이 건네는 변수를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그 여자는 그에 부합하는, 예상하지 못한 변수였다.

‘제가 사라질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그리고, 조금 이상한 변수였다.

‘저, 성녀 아이린이라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완전히 증발할 수 있도록.’

이안은 고개를 저어 쓸데없는 회상을 떨쳐 내었다.

지금은 정신을 단단히 벼리고 이 변수에 대처해야 할 때였다.

‘성녀, 라.’

그 말을 완벽히 신뢰하고 있는 건 아니었다.

물론 의심할 수도 없었다. 아이린이 내민 ‘증거’는 사기꾼 따위가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나저나 역시 성녀님들의 능력은 대단하시더군요. 그런 내밀한 정보까지 알아내시다니.”

마침 루시안도 그 생각을 했는지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그래. 놀라웠지.”

“이번 성녀님의 권능이 남다르게 뛰어나신 거겠지요?”

그게 아니라면 곤란했다.

이안이 밟고 있는 계획은 누군가에게 들켜선 안 되는 것이었으니까.

그 상대가 설령 성녀라 하더라도.

“그렇겠지. 그래야 하고.”

선황의 유해가 제 저택 아래 잠들어 있다는 것을 들킨 순간, 이안은 아이린을 한배에 태워야만 했다.

혹은 제거하거나.

“그런데 단장님, 혹시 느끼셨습니까? 아까 성녀님께서 돌아오셨을 때, 미약하게 마력의 잔여물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너도 맡았군.”

미약하지만 확실했다. 그건 아이린 본인, 혹은 바로 근처에서 누군가가 마법을 사용한 흔적이었다.

‘마법을 쓸 수 있는 몸은 아닌 것 같았는데.’

게다가, 집무실로 돌아왔을 때 이상하리만치 새하얬던 아이린의 얼굴.

마치 누군가에게 쫓기기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이안은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 톡 두드렸다.

분명 그 여잔 순진하기만 한 사람은 아니었다. 이안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있음은 확실했다.

‘무슨 꿍꿍이인 건지는, 차차 알아 가 볼까.’

억지로 캐내려 했다가는 까무러칠지도 모른다. 보기보다 잘 놀라는 여자 같았으니까.

“루시안.”

“예, 단장님.”

“최고로 호화로운 약혼식을 준비해.”

일단은, 기왕 생긴 가짜 부인을 제국에서 가장 화려한 신부로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순결한 성기사단장’ 타이틀은 손에서 빠져나갔다.

잃은 게 있다면 얻는 것도 있어야지.

‘일생 지켜 온 순결도 내버릴 정도로 한 여자를 지극히 사랑하는 남자’라는 타이틀 역시 여론전에 효과적일 터였다.

* * *

“으어어어.”

나는 침대 위에 대자로 엎어졌다.

깃털로 듬뿍 채워진 이불이 폭신히 내 몸을 감쌌다.

나는 푹신함에 취해 반쯤 정신을 놓고 옆으로 굴러다녔다.

아무리 굴러도 침대가 끝이 나지 않았다.

하긴, 당연한 일이긴 했다.

나는 무려 십오 년 만에 나타난 성녀였으니까.

‘……으음.’

새삼 짙은 부담감이 마음을 내리눌렀다.

난 뒹굴거리기를 멈추고 아까 가져온 책을 펼쳐 들었다. 루시안이 가져다준 책이었다.

‘내가 도망 노예였다는 이야기에 굉장히 마음 쓰는 것 같았지, 그 사람.’

노예 출신이지만 노예로 팔리기 전인 어릴 적에 글은 배웠다고 하자, 루시안은 크게 안도했었다.

그러고는 『제국의 역사』, 『제국 전도』같이 기초 상식에 도움이 될 만한 책들을 도서관에서 빌려다 주었다.

‘참 사려 깊은 사람이란 말이야.’

어쩌다 그런 무시무시한 남자 옆에 그렇게 착한 보좌관이 붙었나 모를 일이었다.

아무튼 난 루시안이 빌려다 준 책들을 훑어보기로 했다.

원작을 읽기는 했지만, 그래도 이 세계에 대해 완전히 파악한 건 아니었으니까.

“일단, 자, 먼저. 『성녀의 역사』.”

목차를 보니 역대 성녀들의 능력과 미담에 대해 기록한 책인 듯했다.

나는 거의 뒤쪽을 펼쳐, 가장 최근에 등장한 성녀에 대해 읽어 보았다.

“성녀 코델리아.”

베르나데트 백작가의 차녀로 태어나, 7세에 성녀로 부름받았다, 라.

금수저 물고 태어나 성녀까지 되다니. 아무래도 전생에 덕을 많이 쌓은 분이신 것 같았다.

“능력은…… 꽃 피우기?”

웬 꽃?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능력치고는 약간 소박한데?

의문은 잠시 뒤 풀렸다. 코델리아가 피워 낸 꽃을 차로 달여 마시면 굉장한 원기 보양 효과를 얻는다고 적혀 있었다.

“와…… 신기하네.”

엄청 유용한 능력이구나.

코델리아 전에 부름받은 성녀, 로렐라이도 출중한 능력을 갖고 있었다. 무려 상처를 없던 것으로 만드는 능력!

비록 십 분 안에 입은 상처여야 한다는 제한 시간이 있긴 했지만, 그게 어딘가. 굉장한 능력이었다.

“다들…… 성녀라는 이름에 걸맞게 대단하구나.”

나는 살짝 식은땀을 흘렸다.

성녀 아이린 역시 그에 걸맞도록 대단한 능력을 지니고 있어야만 할 것 같았다.

‘버그 하나는 기가 막히게 잘 잡아내는데, 나…….’

오늘 이 황당한 세계에서 눈을 뜨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컴퓨터공학 전공 대학생이었다.

코딩에 그리 대단한 재능은 없었지만, 어디서 버그가 발생했는지 알아채는 감 하나만큼은 동기 중 탑이었다.

‘근데, 그 능력을 여기서 어떻게 써먹냐고.’

“으아아.”

나는 베개에 머리를 묻고 신음했다.

성녀라고 거짓말을 쳐서 목숨을 구한 건 좋은데, 문제는 이다음이었다.

‘이안에게 맞설 당시엔 원작에서 읽은 지식으로 잘 넘겼었는데.’

일 년이나, 그 사기극을 지속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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