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이안이 어깨를 으쓱였다. 나는 그 얄미움에 부들부들 떨었다.
내가 가엾었는지 루시안이 얼른 부연 설명을 했다.
“성녀님께서도 아시겠지만, 일이 이렇게 된 이상 진실은 아무도 믿어 주지 않을 겁니다. 단장님의 순결은…… 물 건너간 거죠.”
물 건너가긴 어딜 가!
순결, 이 세상에선 중요한 거잖아! 당신 상사의 중요한 부분을 그렇게 떠내려가게 둬도 되는 거야?
나는 기가 막혀 쏘아붙이지도 못하고 입술을 더듬거렸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정말 저랑 도, 동침한 게 맞다고 인정을 하시겠다고요?”
“정확한 이야기는 이렇습니다. 당신과 나는 원래부터 서로에게 반해 있던 사이다.”
이안이 나른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유로운 어투와 달리 내용은 충격 그 자체였지만.
“그러나 성기사단장이라는 내 위치 때문에 나 홀로 마음만 삭이던 중. 어느 날 새벽, 꿈에나 그리던 그 사람이 내 침대 안에 나타난 겁니다. 우리는 이것이 틀림없는 꿈이라고 생각하고 서로를 탐했지만…….”
이안의 목소리가 점점 낮고 느릿해졌다.
으악. 이야기가 거듭될수록 온몸에 닭살이 두두두 퍼져 나갔다.
내 질색하는 얼굴을 본 이안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알고 보니 꿈이 아닌 현실이었고. 당신은 성녀가 됨과 동시에 날 타락시켜 그 손에 넣은 거죠.”
“넣고 싶지 않은데요…….”
개미만 한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이안이 해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럼, 이해해 주셨으리라 믿고.”
이안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더 이상의 충격 발언은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이안은 이번에도 내 예상을 뛰어넘었다.
“약혼 발표를 하시죠. 결혼합시다. 일 년간만.”
“네?”
멍하니 입을 벌린 난 일 초 뒤 정신을 차렸다.
“말도 안 돼요. 절대 안 돼! 결혼은 물론이고 교제를 인정할 수도 없어요!”
“그럼 날 순결 잃은 몸으로도 모자라, 아무하고나 하룻밤 뒹구는 놈으로 만들겠단 겁니까?”
이안이 으르렁거렸다. 나는 기가 막혀 떡 입을 벌렸다.
살짝 한숨을 내쉰 이안이 이번엔 어르듯 말했다.
“말씀드렸듯, 연애 결혼인 걸로 하죠. 예전부터 서로에게 반해 있었던 걸로.”
“……싫다고 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러자 이안이 예의 그 천사처럼 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죽이게요?”
“무슨 소립니까. 내가 반한 당신에게 어떻게 손을 대겠습니까?”
이안이 눈꼬리를 접어 웃으며 말했다.
“부인.”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나는 기겁해서 외쳤다.
“단장님의 계획은 알겠어요. 충분히 이해했고, 솔직히 효과적인 계획이라고도 생각해요.”
그래, 이안의 계획은 뒤통수가 얼얼할 만큼 급진적이었지만 솔직히 이 상황에선 제일 그럴듯했다.
‘이제 와서 이안과 나 사이에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지나가던 개미도 믿어 주지 않을 테지.’
그렇다면 차라리 스캔들을 역이용하는 것도 방법이었다.
성기사단장과 성녀의 운명적인 사랑 이야기는 분명 꽤 많은 사람을 매료시킬 터였다.
그래. 이안의 입장에선 이게 최선일 수 있겠지.
하지만 내겐 아니었다.
“하지만 단장님과 약혼을 할 순 없어요.”
이안이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어째서입니까?”
어째서긴.
당신과 결혼 같은 걸 했다간 도망칠 길이 더 요원해지잖아.
‘뭐, 이미 선황의 유해를 말한 시점에서 쉬운 탈출은 그른 것 같지만.’
그래도 그냥 ‘비밀을 알고 있는 성녀’와, ‘비밀을 알고 있는 데다가 단장의 약혼녀이기까지 한 성녀’에게 붙는 호위(라는 이름의 감시)는 천지 차이일 것이다.
물론 이 생각들을 곧이곧대로 말할 순 없었다.
난 잠시 머리를 굴리다 말했다.
“제겐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정말입니까?”
이안이 이마를 찌푸렸다.
곧 그가 무언가 떠오른 듯 고개를 기울이고 물었다.
“그 자국을 낸 사람입니까?”
자국? 자국이라면…… 아, 그래. 침대에 떨어졌을 때 내 목에 있던 붉은 자국을 말하는 듯했다.
나는 살짝 놀랐다. 벌레 물린 자국이 어쩌고 하기에 아무것도 모르는 줄 알았는데, 거짓말이었나?
“루시안이 알려 주었습니다. 그 자국이 뭘 의미하는지.”
그렇게 말하는 이안의 얼굴은 답지 않게 굳어 있었다.
마치, 굉장히 생경하고 낯선 무언가에 대해 이야기하는 듯이.
‘……역시 동정남.’
이렇게 갑작스러운 포인트에서 그 속성을 어필하다니.
괜히 이안의 얼굴 보기가 좀 부끄러워졌다.
“그, 그러셨군요.”
“대답해 보십시오. 애인과 있다가 내 침대에 떨어졌던 겁니까?”
“……그런 거죠?”
나도 왜 내 몸에 그런 자국들이 있었던 건지는 모른다.
아니, 솔직히 예상은 갔다.
보다 자극적인 상황처럼 사진 찍히기 위해 일부러 분장을 한 거겠지.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기에, 있지도 않은 가상의 애인을 만들어 내는 수밖에 없었다.
“깊은 사이입니까? 그 애인이란 자와.”
“음, 뭐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럼 헤어지시죠.”
“네? 그, 그건 곤란한데요.”
“깊은 사이도 아니라고 하셨잖습니까.”
“아무리 그래도 일단은 사귀는 사이거든요!”
쯧, 하고 이안이 혀를 찼다. 나는 또 교제 운운하는 이야기가 나올까 봐 얼른 덧붙였다.
“사실은 깊은 사이가 맞아요. 서로를 굉장히 사랑하고 있거든요.”
“아이린 양. 그렇다면 이렇게 합시다.”
마뜩잖다는 듯 미간을 좁힌 이안이 또 다른 제안을 해 왔다.
“만약 그 애인과 헤어지고 내 계획에 동참해 준다면, 당신께 충분한 보상을 드리겠습니다.”
“……보상이라뇨?”
바로 거절했어야 했는데. 자본주의에 물든 입은 나도 모르게 물음을 내뱉고 말았다.
“원하는 거라면 무엇이든.”
뭐든?
이 사람, 위험한 소릴 하네.
나는 슬쩍 이안을 노려보았다. 램프의 요정 지니가 ‘무엇이든’의 범위를 정하지 않아서 얼마나 노동 착취를 당했는지 모르나 보다.
“정하기 힘들다면 제가 예시를 드리죠. 1천만 마르스는 어떻습니까?”
‘그게 얼만데?’
난 열심히 머리를 굴려 보았다.
『성녀님은 사랑을 몰라』 속 주인공이 수도에 소담한 이층집을 백만 마르스에 샀던 구절이 떠올랐다.
‘잠깐. 수도에 2층이나 되는 집이 백만 마르스면…… 1천만 마르스는 대체 얼마인 거야?’
서울에 집이 열 채!
난 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이 세계에 떨어진 지 몇 시간도 지나지 않아 채 생각이 미치지 못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겐 돈이 필요했다.
그것도 아주 절실히.
이곳엔 아르바이트비를 소중히 모아 온 내 통장이 없었다. 백 원짜리 동전으로 배를 불렸던 저금통도 없었다.
그야말로 무일푼.
연고라곤 전혀 없는 내가 이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선 돈이 필요했다.
이 세계를 벗어나는 방법을 찾아내기 전까지는!
집 열 채까진 필요 없지만, 한 일 년쯤 아무 일도 안 하고 생활할 돈 정도는 있으면 아주 좋을 것 같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잘 들어, 76번. 너는, 반드시, 이 일에 성공해야 해.’
몇 시간 전, 내 머리를 덮쳤던 속삭임이 다시금 떠올랐다.
낮게 쉬어 빠져 있었던 그 목소리를 떠올리자 또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 목소리의 정체가 뭔지도 알아내야 해.’
아마 목소리의 주인은 지금도 나를 감시하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기사가 대대적으로 나갔으니 일단 누군가 의도한 대로 스캔들은 터졌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목소리의 주인이 내가 빙의한 이 몸을 놓아줄까?
‘아닐 것 같은데.’
무턱대고 도망쳤다간, 이안과 목소리의 주인. 둘에게 동시에 쫓길 확률이 높다.
생각을 정리한 난 슬며시 이안을 올려다보았다.
“기한은 있는 거죠? 일 년이라고 하셨나요?”
“물론. 나도 가짜 결혼을 그 이상 지속할 생각은 없습니다.”
“생각할 시간을 주세요.”
나는 결국 그렇게 말했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 제안은 덥석 받아 물기엔 위험부담이 너무 컸다.
지금 내 머리는 단기간에 입수한 수많은 정보로 과부하가 걸린 상태였다. 이안의 침대에 떨어진 이후 몇 시간 동안 이리저리 정신없이 휘둘려 다니기만 했으니까.
잠깐 말이 없던 이안은, 곧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시간을 드리죠.”
“감사해요.”
“준비가 되면, 시종을 시켜 나나 루시안을 부르십시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안이 씩 미소를 지었다.
“그럼 곧 다시 뵙겠습니다. 부인.”
“그렇게 부르지 말라니까요!”
이안은 내 항의가 재미있는 듯 픽 웃곤, 루시안을 돌아보고 내게 방을 내줄 것을 지시했다.
루시안의 뒤를 따라 복도를 걷는 동안, 날 발견한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발을 멈췄다.
“저, 저분인가?”
“맞지 않아? 머리 색이랑, 이목구비가…… 사진이랑 똑같아.”
“게다가 루시안 님이랑 같이 있잖아. 틀림없어.”
“저분이 바로 단장님의 여자…….”
들려오는 속삭임에 말 그대로 팔짝 뛸 노릇이었다.
복도 모퉁이를 돌아 루시안이 조심스레 속삭였다.
“보는 눈이 많지요. 단장님의 제안을 승낙하신다면, 이런 일은 앞으로 익숙해지셔야 할 겁니다.”
“…….”
“그래도 신전 사람들은 대부분 순박한 편입니다. 정말 무서운 건…….”
루시안은 말꼬리를 흐렸다.
그 뒤는 안 들어도 알 것 같았다.
‘사교계. 그리고 황실이겠지.’
특히 황실은, 현 황제의 시꺼먼 속내를 전부 알고 있는 나로선 호랑이 소굴로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