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구원의 밤-2화 (3/109)

#02

누굴 만나든 한번은 들을 이야기였기에 각오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렇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언니가 급격하게 우울해지기 시작한 것은 형부가 외도 끝에 집을 나가면서부터였다. 아니, 실은 언제부터 언니가 빛을 잃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쩌면 단 한 번도 빛났던 적이 없었던 것도 같다.

언니는 밝은 성격은 아니었어도 수더분한 성정의 사람이었고, 색깔 없이 무난했던 사람이었다. 때로는 미련할 만큼. 남편의 외도를 대하는 태도만 봐도 그랬다. 분노로 치를 떠는 사희와는 다르게 언니는 어이가 없을 정도로 덤덤해 보였다. 솔 이상으로는 올라가지 않는 낮은 목소리로 어차피 남편은 돈을 벌어다 주는 사람일 뿐, 정이 없다고 말했던 언니. 그런 그녀가 어째서 자살을 시도했는지는 지금에 와서도 의문이다.

어쩌면 언니의 그 말은 진심이 아니었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좀 재미가 없잖아. 남자들 생각하기에. 그 사람이 무슨 죄야.’, 그렇게 사희를 속 터지게 만들었던 그 말이 되레 진심이었는지도.

어쨌든 언니는 유서도 남기지 않고, 수건걸이에 목을 맸다. 다행히 미수에 그쳤지만.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인지만 이번 일이 있기 전에도 몇 차례 비슷한 전적이 있었던 모양이다. 의사는 그것을 심각한 우울증으로 인한 습관적 자살 충동이라고 설명했다. 이토록 곪아가는 동안 가족 중 누구도 그녀의 상태를 알아채지 못 했냐고 물었을 때, 사희는 ‘제가 알기론 그럴 사람이 아니거든요, 언니는.’이라고 멍청한 대답만 했을 뿐이다.

몰랐다. 언니의 속이 비어가고 있는 줄은.

“어쩜 그런 일이 다 있니? 안됐다.”

윤이 한 마디를 덧붙였다. 고작 ‘안됐다.’는 말로 위안이 될 일은 아니었기에 사희는 대꾸를 하지 않았다. 쉽게 하는 그 말이 동정 같아서 싫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윤의 목소리에는 조금의 안쓰러움도 묻어있지 않았다. 안됐다, 뒤에 붙은 흐응, 하는 콧소리가 웃음소리처럼 들린 것은 비단 기분 탓은 아닐 것이다.

“너 돈 많이 벌어야겠다?”

동정보다 더 직설적인 말이 사희를 찌른다. 즉시 목 언저리가 불에 덴 것처럼 달아올랐다. 자존심이 상했다.

“이미 벌고 있어요.”

“뭐? 지금 하는 수영장 파트? 그거로 되겠어? 학비에 병원비에 돈이 한두 푼 들어가는 일이 아닐 텐데. 듣자니 너 유학도 갈 거라고 했다며? 그 와중에 꿈도 야무지다, 얘.”

윤이 가소롭다는 듯 콧방귀를 뀌며 비웃었다.

“제 걱정은 마세요. 알아서 할게요.”

“참, 인생 모르는 거야. 승승장구할 줄 알았던 이사희가 당장 먹고 살 걱정을 해야 하다니. 하긴 메달 못 따고, 은퇴하면 별 볼 일 없어지는 게 운동선수의 운명이니까.”

일부러 사희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윤의 의도를 모르지 않는다. 사희는 붉어지는 얼굴을 들키지 않으려 유자차 잔에 코를 처박고, 그것에 집중한 척 윤을 무시했다.

“아마 교수님이 일자리 소개해주실 거야.”

입안으로 따라 들어온 유자 과육을 씹으며 사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사정 듣고 맘이 많이 안 좋으셨나 봐. 위로금을 주는 건 어떨까, 나한테 물어보시더라고.”

“또 물으시면 그런 거 필요 없다고 선배가 잘 말씀드려 주세요.”

“못 받을 건 또 뭐니? 하여간 너는 그 쓸데없는 자존심이 문제야.”

“선배.”

“그래. 안 그래도 나도 그렇게 말씀은 드렸어. 너 분명히 안 받을 거라고. 사실 일시적인 위로금보다는 사실 장기적인 돈벌이가 더 필요하잖아. 안 그래? 그래서 차라리 일자리를 찾아봐 주시는 게 나을 거라고 말씀드렸지. 너 지금 파트로 돌아다니면서 수영강습이나 하고 있다고 말씀드렸거든. 배운 게 그거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하지만.”

말을 마친 윤이 승리자처럼 웃었다. 사희는 어금니를 꽉 물었다. 급성 스트레스로 식도가 뜨거워지는 기분이 들었다.

사희가 불쾌한 패배감과 불안감에 굳어있을 때, 정 교수가 연구실로 들어왔다. 몇 마디 위로와 걱정을 건넨 정 교수가 뒤이어 본론을 꺼냈다.

“사희야, 너 노바 쇼핑몰이라고 알지?”

“네?”

“네 본가가 그쪽이라고 하지 않았어? 언니도 그곳에 사신다고 했었지?”

“네? 아, 네…….”

“아, 그래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언니는 좀 괜찮으시니?”

언니의 이야기가 나오자 사희는 약간 고개를 떨어트렸다. 부끄럽다. 언니의 존재가 자신의 약점이 된 것 같아서 화가 났다.

“……좋아지고 있습니다.”

“그래, 그래야지. 네가 고생이 많다. 걱정 많이 했어. 내가 어떻게 하면 너를 도울 수 있을까 생각을 좀 해봤는데 마침 좋은 기회가 있지 뭐니. 여기 연락해 봐.”

정 교수가 사희 앞으로 명함 한 장을 밀어준다.

“거기 내 지인이 있어. 연락하면 자리 줄 거야.”

“무슨 일인데요?”

옆에 앉아있던 윤이 촉새처럼 끼어들었다.

“VIP 고객 상대하는 일이야. 계약직이긴 해도 보수는 섭섭지 않을 거야. 내 면(面)을 생각해서라도 가장 좋은 자리로 연결해 달라고 말해 두었어. 일단 그 일 하면서 발등에 떨어진 불부터 꺼.”

사희는 머뭇거리며 겨우 명함을 받아 들었다.

“힘든 일 정리되면 꼭 복학해라. 박사 들어가. 그게 네 길이야. 공부, 포기하지 마.”

윤의 표정이 눈에 보이게 찌그러진다. 시기 어린 시선으로 사희를 힐긋 보더니 입을 부루퉁하게 내민다. 그러나 정작 시기의 시선을 받는 사희의 표정은 심란해 보였다.

이야기를 마치고 연구실을 나오는데, 그럴 필요 없다는 데도 윤이 굳이 배웅을 하겠다며 따라 나왔다. 얼마 못 가 윤은 결국 입이 근질거리는 것을 참지 못하고 묻는다.

“어떻게 할 거야? 갈 거야?”

“글쎄요. 생각을 좀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이사희, 지금 네가 찬밥 더운밥 가릴 때야? 현실을 직시해.”

“이왕 먹을 밥인데 입맛에 맞는 거로 고르는 게 뭐가 어때서요?”

“좋은 기회 얻었으면 넙죽 받을 것이지, 꼴에 낙하산은 싫다 이거니? 세상이 그렇게 만만한 줄 알아? 네가 아직 뭘 모르나 본데, 바깥세상은 전쟁이야. 네가 뭐 사회 나와서도 국가대표일 것 같아?”

슬슬 한계에 다다랐다. 당신이야말로 이 전쟁 같은 바깥세상이 무서워서 취미에도 없는 박사과정으로 도망쳤으면서 누구한테 훈계야? 사희는 픽, 코로 웃었다.

“그렇게 좋은 기회라면 선배가 하겠다고 하세요.”

“얘는. 나랑 너랑 같니?”

윤은 가소롭다는 듯 싱글싱글 웃는다.

“이사희, 너는 가만 보면 참 운이 좋은 것 같아. 솔직히 아시안 게임 때만 해도 너보다 잘하는 선수 있었는데, 걔가 갑자기 문제 생기는 바람에 네가 대타 뛴 거잖아.”

주먹에 힘이 들어간다. 목 밑에서 뜨거운 기운이 올라오는 것을 참느라, 목구멍이 긁히는 것처럼 아팠다. 그때 그 선수가 금지 약물 주사를 맞아서 그렇게 되었던 건 왜 쏙 빼놓느냐고, 전적 따지고 보면 서로 비등한 실력이었다고 쏘아붙이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었지만 꾹 참았다. 이제 와 따지고 들어 뭐하겠는가. 은퇴한 지가 언제인데.

그러나 이것만큼은 꼭 짚고 넘어가고 싶다. 내가 운이 좋다고? 그럼 너, 나랑 인생 한번 바꿔 살아볼래? 너도 이 갈리는 인생 한번 살아보겠느냐고!

“죄송하게 됐네요. 저까지 운이 안 좋았어야 선배 차례까지 갔을 텐데.”

사희의 말에 담긴 진의를 파악하느라 잠깐 멍청하게 있던 윤의 눈이 샐쭉하게 올라간다.

“야!”

“그럼 잘 지내세요. 올해는 논문도 좀 쓰시고요. 박사 하셔야죠. 돈 많이 쓰셨는데.”

사희는 이야기가 길어지기 전에 얼른 발걸음을 재촉했다. 등 뒤에서 욕설 비슷한 것이 들렸던 것 같았지만 개의치 않는다. 싫은 것 꾹꾹 참아가며 선배 대접 해주는 것도 끝이다. 내가 지금 유치한 질투와 시비 따위 받아줄 만큼 한가한 상황이 아니거든.

사희는 눈에 힘을 주어 거대한 위용을 으스대며 우뚝 선 노바를 다시금 노려보듯 보았다. 사람을 찍어 누르는 것 같은 저 오만한 건물은 아무래도 정이 들 것 같지 않다. 그래서 자꾸만 이렇게 적을 보듯 적대감 어린 눈으로 보게 된다.

“그래, 당분간만이야. 당분간만.”

사희는 두 손으로 가방의 어깨끈을 잡아 바짝 조였다. 그리곤 더는 망설이지 않고 성큼 발걸음을 뗐다. 씩씩한 걸음에 등허리를 덮는 검은 머리카락이 산뜻하게 찰랑였다.

***

한낮, 공중에서 발아래 도시를 내려다보면 쓸쓸해질 때가 있다. 자비 없이 내리쪼이는 뙤약볕이 빌딩 유리창에 부딪혀 섬광을 내는 찬란한 광경을 보면 특히 더했다. 아름다운 것이 더 아름답기 위해서는 기어이 부서지고 말아야 하는 것인가.

동하는 창 앞에 적막하게 놓인 의자에 앉아 있었다. 길게 뻗은 다리를 꼬고 조금은 느슨하게 몸을 눕혀 앉은 그는, 시선의 각도를 바꿀 때마다 시시각각으로 부서지는 햇살을 보는 것으로 점심시간의 대부분을 허비하고 있는 참이었다.

그의 곁으로는 갖가지 서류들이 질서정연하게 늘어져 있다. 혜석그룹의 사업을 정리해놓은 리스트들이었다.

동하를 불러들인 것은 이종학 회장이었다. 불러들였다는 표현은 어쩌면 적절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이종학 회장은 뉴욕으로 단지 한 통의 우편을 보내왔을 뿐이었다.

동하의 시선이 그 봉투 쪽으로 기울었다. 벌써 수십 번도 넘게 보았기에 굳이 펼치지 않아도 무엇이 들어있는지 알고 있다. 봉투를 보는 동하의 미간이 강하게 좁아 든다. 저를 끝내 이곳으로 불러들인 것에 대에 불만이라도 표하듯.

한참 그것을 노려보던 동하가 마침내 봉투 쪽으로 손을 뻗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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