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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밤-0화 (프롤로그) (1/109)

#프롤로그

사희는 티타늄 실버 빛깔의 승강기 문 앞에서 잠시 우두커니 서 있었다. 엘리베이터가 올라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얼이 빠진 채로 서서, 하행 버튼도 누르지 않은 채 우두망찰하고 있을 뿐이었다.

조금 전 들었던 말이 귓가에 메아리처럼 맴돈다.

“죄송하지만 강사님. 오늘부터 이 시간에 풀장 출입을 하실 수 없어요.”

말을 전한 직원이 사희에게 한 마디를 덧붙였다.

“출입 카드는 제게 반납하고 가시면 처리해드리겠습니다.”

피가 온몸을 한 바퀴 크게 돌았다. 혈관 구석구석까지 차가운 피가 돈다.

그런 말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월요일, 수요일 오후 1시부터 3시. 오직 그녀만이 자유롭게 출입할 수 있었던 시간이다. VVIP 전담 강사로 특별 채용된 그녀가 가진 특권이었다. 가지고 있을 때는 그게 특권인 줄 몰랐는데, 막상 잃고 나니 그게 특권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닌 척했지만 사실 그것에 은근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이제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은, 그녀가 이곳을 완전히 떠나야 한다는 뜻이 된다. 당연하다 믿었던 자격이 하룻밤 꿈처럼 사라졌다. 마음이 와르르 무너진다. 무너진 것이 자부심인지, 자존심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확실한 것은 참을 수 없는 모멸감이 들었다는 점이다.

끝이라는 걸 모르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오늘 그녀는 마지막 수업을 위해 이곳에 왔다. 지난주, 사희는 일방적으로 계약해지를 통보받았다. 받아들이기 어려운 이유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결과를 돌이킬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이 계약에서 결정권을 가진 쪽은 사희가 아니었다.

하지만 떠날 때 떠나더라도, 마지막 소임은 다 해내고 싶었다. 고용인의 입맛대로 하루아침에 끝나버릴 수 있는 계약이라 하더라도, 그 계약의 종료 시점까지 만큼은 자신의 의지 위에 두고 싶었다. 아무렇게나 쓰이고, 아무렇지도 않게 버려지는 무의미한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기에.

하나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마지막 일정을 끝내고 미련 없이 떠나려 했던 그녀의 의지는 끝내 보잘것없이 부서졌다. 그들에게 이사희의 자존심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가시지 않는 굴욕감이 온몸에 끈끈이처럼 달라붙어 사희를 바닥으로 끌어내리고 있다. 당장이라도 주저앉아 울어버리고 싶었지만 사희는 최선을 다해 꾹 참았다.

‘울 것 없어. 내가 사는 세상에선 운다고 달라지는 것이 아무것도 없거든.’

사희는 무기력한 기분에서 빠져나와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에서 벗어나 모멸감을 털어내고 싶었다.

승강기는 그녀가 있는 층을 지나 위로 올라갔다. 위에서 누가 그녀보다 한발 먼저 버튼을 누른 모양이었다.

잠시 후, 승강기가 그녀의 층에 도달했음을 알리는 빛을 밝힌다. 그리고 무겁게 닫혀있던 문이 열렸다. 그리고 동시에 안에 타 있던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천천히 열린 문 안으로 발짝을 떼려던 사희가 주춤, 걸음을 멈췄다.

승강기 벽에 몸을 조금 기대선 채로 서 있던 동하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도 이 자리에서 이렇게 그녀와 마주칠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지 못한 눈치였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많은 말과 감정들이 서로의 눈빛을 타고 오갔다.

잠시 후, 남자가 비스듬히 기댔던 장신을 일으키더니 그녀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승강기에 오르라는 뜻이리라. 그러나 사희는 승강기에 오르는 대신 뒤로 한 발 물러나는 것을 선택했다. 최대한 단호한 표정을 지었다. 그것이 더는 당신이 있는 세계로 들어가지 않겠다는 단호한 뜻으로 받아들여지기 바라는 마음으로.

사희가 뒤로 물러남과 동시에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이제 끝이다. 사희는 생각했다.

그런데 문은 닫히기 직전 다시 열렸다. 그리곤 안에서 불쑥 나온 남자의 팔이 사희의 손목을 잡았다. 이렇다 할 새도 없이 사희는 승강기 안으로 끌려 들어왔다.

사희가 남자의 손을 강하게 뿌리쳤으나, 그는 전혀 그 손을 놓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대신 재빨리 어느 층의 버튼을 눌렀을 뿐이다.

“이거 놔요!”

뿌리치려는 사희와 그럴수록 더욱 강하게 잡아채는 동하의 실랑이가 이어지는 사이, 승강기는 남자가 누른 층에 멈췄다. 구조 변경 공사가 한창인 층이었다. 어디선가 덜 마른 페인트 냄새 같은 것이 났다.

동하는 사희의 손을 끌고 승강기에서 내렸다. 그리곤 공사 흔적이 어지럽게 늘어진 공간들을 빠르게 지나 어느 문 안으로 사희를 끌어당겼다.

“이거 놔요!”

“잠깐 이야기 좀 해요.”

“난 할 말 없어요.”

“난 있어!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무조건 피하지만 말고 좀 들어요.”

“싫어!”

사희는 절규하듯 강하게 소리쳤다. 사희는 강압적으로 구는 남자의 몸을 세게 밀쳤다. 온 힘을 다했음에도 꿈쩍도 하지 않는 게 더 화가 나서 사희는 그의 어깨와 가슴을 가방으로 세게 후려쳤다. 그러나 어떻게 해도 남자는 끄떡없어 보였다. 끈적끈적하게 붙어있던 모멸감이, 차가운 비수가 되어 몸속으로 파고드는 느낌이 든다. 오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멋대로 굴지 마! 내가 니들이 가만히 있으라면 가만히 있고, 꺼지라면 꺼지는 그런 사람인 줄 알아?”

그 서슬에 놀란 동하의 표정이 멈칫했다.

“니들이 뭔데. 니들이 대체 뭔데 나를 이렇게 만들어!”

사희의 볼 위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린다. 참고 있던 울분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운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은 그것 말고는 이 분노를 표할 길이 없었다.

심상치 않은 기색을 눈치챈 동하가 사희에게로 한 걸음 다가섰다.

“무슨 일……. 있었습니까?”

그러나 사희는 그가 다가온 만큼 뒤로 물러나며 더욱 강하게 남자를 노려보았다.

“너도 똑같아.”

적대감이 찬 여자의 목소리가 공사 마감이 되지 않은 공간에 웅웅, 울렸다. 천장과 벽에 부딪혀 돌아온 메아리가 강하고 단호한 그녀의 적의를 강조해주는 듯했다.

사희는 눈물이 흐르는 얼굴을 감싸 쥐고 입술을 꽉 깨문다. 참아보려 했지만 되지 않았다. 몸이 떨렸다. 처음엔 얼굴을 감싸 쥐고 있던 손이 떨리더니 이내 목소리가 떨리고, 곧 어깨가 떨리고, 턱이 떨렸다. 속눈썹을 적신 눈물이 볼을 타고 흘러내려, 툭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사희…….”

“싫어. 정말 싫어.”

“…….”

“그러니까 제발 더는 다가오지 마.”

사희는 굳어있는 남자를 두고 돌아섰다. 그리고 도망치듯 빠르게 뛰어나갔다.

싫다. 날 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밝아지는 당신 눈빛이 싫고, 아무렇지도 않게 내 이름을 부르는 그 친근한 목소리가 싫고,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보는 그 태연함도 싫다.

그런데 그보다 더 싫은 것은, 그를 본 순간, 마음속에 피어났던 반가움이다. 그와 동시에 하염없이 약해져 버린 자신의 마음도 싫었다. 그에게 기대서 엉엉 울어버리고 싶다는 부끄러운 욕구와, 당신은 그래도 그 모진 사람들과 다를지도 모른다는 덧없는 기대. 그게 싫다.

당신이 좋아서. 그래서 당신만은 다를지도 모른다고 덧없는 기대를 하는 내가 싫어서. 그래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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