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Penny dreadful (1)2020.11.07.
“정말 괜찮겠습니까?”
소렐이 다시 예비과정에 참석하겠다고 당당하게 밝혔을 때, 누구보다 라이킨이 가장 걱정했다.
“학교가 무섭지 않아요?”
“잘 모르겠어요, 안 가봐서……. 가봐야 알 것 같아요.”
소렐은 고개를 흔들었다.
“집에 며칠 더 있어도 괜찮습니다.”
겁이 많으면서, 동시에 용감할 수 있을까? 모순된 이야기였지만 라이킨은 이 토끼 공주님이 의외로 그럴 수도 있다고 보았다. 흔한 헬레인 토끼들처럼, 겁이 많아 경계심이 강하지만, 필요할 때는 온몸을 내던지는 용감한 모습이 있었다.
“집에서 뭘 해요? 며칠 있었으면 됐지.”
라이킨은 그를 이상하다는 듯이 올려다보는 소렐의 표정에 잠시 침묵했다. 집에서 뭘 하냐니.
“……글래스턴에 오기 전, 집에 혼자 있을 때 뭘 했습니까?”
“밖에 나가서 친구들이랑 놀았는데요.”
“그럼 나랑 놀면 되겠군요.”
뱀파이어는 뜻 모를 웃음을 짓고 있었다. 소렐에게 있어서 라이킨은 조금 어려운 사람이었다. 속에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때가 많다. 지금도 그랬다.
“라이킨은 학교에 안 가요?”
나랑 놀기엔 너무 바쁜 교수님이잖아요.
“안 갑니다.”
“왜요?”
당신이 여기에 있으니까요. 흔해 빠진 대답을 던지려던 라이킨은 소렐이 곧장 하는 말에 입을 다물고 말았다.
“나랑 같이 가요.”
학교에. 같이. 나랑. 그의 가슴께에 겨우 미치는 소렐 이드리스는 겁도 없이 뱀파이어에게 같이 가자고 말했다.
*
“무서우면 나한테 바로 말해요.”
“네.”
“주변에 공주님을 도와줄 사람들이 아주 많으니까 소리만 질러도 됩니다.”
“안 좋은 상황이 생기면 또 마법을 쓰게 되지 않을까요!”
잘한다 잘한다 몇 번 칭찬을 해줬더니 이젠 마법을 쓴다는 말도 스스럼없이 한다.
“아뇨. 그전에 사람들이 도우러 올 겁니다.”
정확하게 의도한 대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을 때까진 안 된다. 소렐 이드리스를 운에 맡겨 보호할 수는 없었다. 라이킨은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기분이 나쁘거나, 오늘은 수업을 억지로 들어야 할 것 같으면 그래도 말해요. 나한테 말하지 않아도, 주변에 있는 뱀파이어 누구나에게 말하면 내가 데리러 올 겁니다.”
“네.”
소렐은 일단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큰일을 겨우 두 번 겪었다지만, 라이킨이 그녀를 대하는 태도는 어딘가 좀 지나친 감이 있었다. 그는 무릎을 접고 그녀와 눈높이를 맞춰가며 신신당부했다.
“만약에 오늘 하루 정말 괜찮았고, 수업을 듣느라 정신없을 정도였다면 저녁에는 외출을 합시다.”
“어디로요?”
“그건 미리 알면 재미없잖습니까.”
“아니, 재미있을 거예요. 계속 저녁에 갈 곳을 생각하며 하루 종일 즐거워 할 수 있는걸요.”
라이킨은 열심히 말하는 소렐을 보다가 근사하게 웃고 말았다.
“너무 기대가 컸다가 별거 아닌 곳이라 실망할지도 모르니 적당히만 궁금해해요. 이따 데리러 오겠습니다. 무서워하지 말고 재미있게 지내요.”
“라이킨도 좋은 하루 보내요.”
방싯 웃은 소렐은 깡총 돌아서서 그대로 뛰어가다가, 문득 멈춰 서서 다시 뒤를 돌아보았다. 키가 훌쩍 크고, 맞춤 정장을 꼭 맞게 입은 라이킨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뱀파이어에게 등 뒤를 내어주면 안 되는 일인데!’
작은 토끼는 뒤늦게 아차 싶었지만, 동시에 전혀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라이킨에게는 뒤를 보여도 괜찮았다. 소렐은 조금 어색하게 손을 들어서 흔들었다. 라이킨은 픽 웃더니 같이 손을 들어 흔들어주었다. 마주 인사해준다는 게 좋아서 그녀는 또 웃곤 다시 가던 길로 뛰어갔다.
‘뛰다가 넘어지면 어쩌려고…….’
토끼들이야 뛰는 걸 좋아하겠지만, 어쩐지 소렐은 보는 사람을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었다. 아니, 어쩌면 그저 라이킨이 걱정을 많이 하게 된 건지도 모른다. 그는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지만, 부정하거나 바로 표정을 굳히며 돌아서는 대신 소렐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가만히 서 있었다. 그건 그거고, 소렐이 넘어지는 건 문제니까. 다행히 소렐은 그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전혀 넘어지지 않았다.
“마스터.”
라이킨은 부르는 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글래스턴 추기경이 엘펜하임으로 소환되었습니다.”
“폴리아나는?”
“카메론 셀레스트 역시 글래스턴 추기경을 이번 공비전하 습격사건의 배후로 지목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슬쩍 빠졌지.”
쉽군. 라이킨은 중얼거리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시체를 너저분하게 늘어놔주니, 먼저 소렐을 도발한 책임자에게 책임을 묻기 위해 신성기사단이 움직였다. 그래봤자 글래스턴 추기경 ‘전하’께서는 이번에도 아무 일 없이 돌아오실 거다. 그리고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부르겠지.
“……에벌린에게 공주님 짐을 좀 싸놓으라고 해.”
“얼마나 가실 겁니까?”
“한 사흘 정도.”
공주님은 수업을 빠진다고 시무룩해 하실지도 모르겠지만, 추기경이 돌아오면 글래스턴에서 긴장상태가 더 심해질 거다. 라이킨은 일단 소렐을 이 칙칙한 도시에서 빼내기로 했다.
“아니, 더 길어질 수도 있고.”
어차피 글래스턴 대학의 입학식은 몇 달이나 남았으니까.
“알겠습니다.”
라이킨은 한 번 뒤를 돌아보던 소렐을 떠올렸다. 그녀가 좋아해줬으면 좋겠다. 갑자기 결정한 외출을, 그리고 그를. 전자는 바람이고, 후자는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 얼마나 많은 순진한 아가씨들이 겉모습은 그럴듯한 신랑에게 폭 빠져 헤어나질 못하던가. 소렐 이드리스의 입장에서도 딱히 나쁘지는 않은 일이다. 그녀가 그저 그를 믿고만 있다면 안전한 울타리 안에서 하고 싶은 건 뭐든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몇 시간 후, 소렐 이드리스는 그와의 약속을 미뤄버렸다. * 매그놀리아 칼리지는 철저히 여학생들로만 구성되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칼리지와 교류가 없는 건 아니다. 아무리 추기경까지 있는 도시라 해도, 글래스턴 대학의 학생들은 대학생답게 급진적이고 개방적인 구석이 있었다. 그건 교수진들도 장려하는 바라, 매그놀리아 칼리지라고 해서 완전히 금남의 구역인 건 아니었다.
“요즘 시대에 촌스럽게 남자를 못 만나게 한다고 해서 만나지 않을 여러분이 아니란 걸 잘 알고 있답니다.”
교수의 말에 여학생들이 까르르 웃었다.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데 뭐하러 막나요. 저는 개인적으로 막으면 더 부작용이 심하다고 생각합니다. 매그놀리아 칼리지는 매학기마다 다른 칼리지와 교류하면서 수업을 진행합니다. 특히 이번 수업은 반드시 함께 들어야만 하는 수업이지요.”
소렐은 멀뚱하니 듣기만 했다. 또래 남자애들이 뭐? 그냥 다 똑같은 사람 아닌가. 아, 물론 저들 중에는 평범한 인간이 아닌, 눈을 빛내며 입맛을 다시는 뱀파이어가 있을 수도 있다. 혹은 엘펜하임 소속의 성기사나 마법사, 마녀가 있을 수도 있고 수인도 마찬가지다.
‘뱀파이어 냄새가 나고 있어.’
소렐은 저절로 냄새를 맡고 움츠러들려는 어깨를 애써 폈다. 라이킨이 곳곳에 심복들을 심어놓았다고 했다. 그러니 아마 그의 수하들일 거다. 걱정하거나 겁낼 필요 없었다. 그녀의 피를 마시고 싶었다면 진작 달려들었겠지.
“자, 그럼 자유롭게 토론해볼까요?”
그나저나 그녀는 위험할 때만, 사람들을 밀어내고 막는 식으로밖에 마법을 쓰지 못하나 보다. 소렐은 조금 시무룩해지고 말았다. 아빠는 별것도 아니라는 표정으로 공격이나 방어 위주의 마법뿐만 아니라, 아주 사소하면서도 집안일에 도움이 되는 조그만 마법들도 많이 사용했다. 그런 재주를 부릴 줄 알았다면 얼마나 좋을까?
“저기, 같이 할 사람 없으면 같이해도 될까?”
소렐은 어느새 불쑥 다가온 그림자들에 퍼뜩 고개를 들었다. 그러곤 제 옆의 친구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친구들은 오히려 그녀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왜?”
“물어보잖아.”
“나?”
나한테 물어보는 거라고? 소렐은 슬쩍 웃으며 다가온 남학생들이 그녀를 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어, 뭐…….”
소렐 이드리스가 앉아 있는 주위로 유난히 많은 남학생들이 몰렸다. 그들도 예비과정을 듣고 있는 학생들인가, 했는데 알고 보니 글래스턴 대학 2학년생이란다. 소렐이 입학하면 3학년으로 올라가는 선배들이었다.
“뭐 궁금한 건 없어?”
교수님이 하라는 토론은 안 하고 학교 식당에서 절대로 시키지 말아야 할 음식, 몰래 데이트하기 좋은 명소 등이 줄줄 쏟아졌다. 얼굴이 빨개진 여학생들은 벌써부터 꾸물꾸물, 남학생들과 뭔가를 교환하고 있었다. 정작 소렐은 그저 말간 얼굴로 눈만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왜 토론을 안 해?’
하긴 남자애들이랑 여자애들이 모였는데 수업이 진행될 리가 없지. 교수님도 대충 알고 계시는 모양이다. 소렐은 잠시 친구들 뒤로 슬쩍 빠졌다.
“저기요.”
한가하게 구석에 기대서 제멋대로 싸구려 소설을 읽고 있던 남자가 고개를 슬쩍 들었다.
“여기 앉아도 되나요?”
“……괜찮아요.”
소렐은 그 키가 훌쩍 크고 체구가 단단한 검은 머리 뱀파이어 옆에 다섯 발자국 정도 떨어져 앉았다. 뱀파이어는 ‘그럴 거면 뭐하러 허락을 받은 거냐’라는 표정으로 그녀를 보았지만, 그녀에겐 무척 중요한 거리였다. 동시에 그녀를 자꾸 쳐다보는 남자애들의 시선도 움푹 들어간 벽감을 통해 차단이 되는 묘한 자리이기도 했다.
“저기요.”
소렐은 또 뱀파이어를 불렀다. 그 남학생은 뱀파이어답게 잘생겼다. 매그놀리아 칼리지 여학생들은 그가 소설책에 코를 박고 있어서 그의 얼굴을 전혀 보지 못했다.
“그거 재미있어요?”
사실은 무척 재미있어 보였다. 어른들은 절대로 못 읽게 하는 자극적이고 오싹오싹한 이야기들이 잔뜩 담긴 싸구려 소설이 뱀파이어의 발치에 서너 권이나 쌓여 있었다.
“……재미는 있는데 이건 좀 별로네요.”
약간 부스스하지만 휙 넘어가는 검은 머리카락에 연한 푸른색 눈을 가진 남학생은 읽고 있던 책표지를 슬쩍 들어 보였다.
“뭐가 재미있어요?”
“음, 이거.”
그는 허리를 숙여 아래에 놓인 책 한 권을 또 들어 보였다.
“이런 거 어디에서 사요? 저기 책 파는 뒷골목에 가면 있어요?”
뱀파이어는 슬쩍 웃었다.
“귀한 아가씨가 그런 거 궁금해해도 되나요?”
“저는 그냥 책을 뭐든지 읽어보고 싶을 뿐인데요.”
그러니까 라이킨의 수하에게 슬쩍 물어보는 건데, 뭐가 불만이람.
“싫으면 가르쳐주지 마요.”
소렐은 고개를 팩 돌리고 제 책을 폈다. 뱀파이어들이란! 까칠하고, 적대적이고, 뭐만 하면 비꼰다. 그러니까 위험하다고 따로 특별 취급을 받지! 아, 라이킨은 예외지만. 아버님도, 샤를렌도 예외였다. 그러고 보니 라이킨이 오늘 좋은 곳으로 데려가준다고 했는데, 거기가 어딜까?
“자.”
그녀의 재미없는 책 위로 싸구려 소설이 툭 떨어졌다. 방금 무척 재미있었다고 한 책을 정확하게 소렐 앞에 떨어트린 뱀파이어는 책을 길쭉하고 두툼한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읽어요.”
“……그쪽 거 아니에요?”
“난 다 읽었으니까요. 그냥 가져요. 별거 아니니까.”
소렐은 싸구려 소설을 쳐다보았다.
“진짜요?”
남학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리며 작은 소설책을 들어 올려 보더니, 가방을 뒤적거렸다.
“……나 주는 거?”
뱀파이어는 불쑥 내밀어진 초콜릿을 보고 물었다.
“지금 가지고 있는 게 이거밖에 없어서…….”
“이런 거 안 줘도 괜찮은데.”
내민 손이 무안해질 정도로 딱 자른 뱀파이어는 다시 소설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래도 꿋꿋이 내미는 초콜릿에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약간 미소를 지었다.
“나는 단 거 안 좋아해요.”
그럼 말고. 소렐은 내밀었던 손을 내려버렸다. 어쩐지 무안해졌다.
“근데, 그거 연작인데.”
응? 소렐은 고개를 들었다.
“그런 책 어디서 파는지 궁금하다고 했죠?”
남학생, 아니, 뱀파이어는 곰곰이 생각하다가 소렐을 보며 씩 웃었다.
“이따가 한번 가볼래요?”
“어딘데요?”
“이 근처. 책 파는 거리 뒤쪽. 위험한 데는 아니에요. 학생들 다 다니는 곳.”
소렐은 조금 의심스럽다는 듯 남학생을 바라보았다.
“같이 가볼래요?”
“……이름이 뭐예요?”
“루벤.”
루벤은 웃었다.
“루벤 실베스터.”
*
“어딜 간다고?”
라이킨은 고개를 들어 조슈아를 바라보았다. 경호가 강화된 이래로 조슈아가 직접 그와 동행하며 자세한 일을 보고했다. 뱀파이어들은 알게 모르게 글래스턴 대학 전역에 촘촘하게 깔려 있었다.
“싸구려 소설을 파는 책방에 가보신답니다. 셋이 이미 따라붙어 밀착경호 중입니다.”
말 그대로 공주님이라, 소렐은 뱀파이어들의 경호를 받고 있었다. 물론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섬세하고 조용하게.
“그래서 늦으실 것 같다고, 미안하지만 다음에 같이 가자고 하시는군요.”
조슈아는 이 지랄 맞은 상관의 심기에 거슬리지 않게, 헬레인 공주에겐 꼬박꼬박 존칭을 붙였다. 지금은 특히 더 조심해야 했다. 라이킨은 지금 막 한입거리도 안 되는 토끼에게 바람을 맞았으니까.
“누구랑 가는데? 여학생들끼리 가나?”
“아뇨, 남학생이랑 갑니다. 이미 신원파악도 마쳤습니다.”
“누군데?”
조슈아는 약간 난처하다는 듯 잠깐 주저하다 대답했다.
“루벤 실베스터요. 그래도 같은 편이니 괜찮…….”
콰당탕, 하는 소리와 함께 라이킨이 연구실 안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조슈아는 부서질 듯 열린 문을 보고 말을 마쳤다.
“……지 않을까요? 아이고, 또 왜 저러실까.”
같은 뱀파이어고, 서로 사이가 조금 껄끄럽다는 건 알지만 여태까지는 냉정하게 잘 처신하신 분이. 아무리 생각해도 라이킨은 그 토끼 공주님에게 뱀파이어들이 기본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훨씬 더 관심을 기울이는 게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