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0화 (178/192)

외전 10화

랏샤는 뒷걸음질 치지 않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몇 번 들어 본 울음소리였다.

마수의 울음소리와 닮아 있었지만 그보다 울림통이 더욱 깊었다. 훨씬 크고, 웅장한…….

“……용?”

“사피?”

“뭐?”

저도 모르게 대답한 랏샤는 주변을 둘러봤지만 소리의 진원지로 추정되는 곳은 보이지 않았다.

겹쳐진 종이 두 장 사이에서 들려오는 게 분명했다.

몇 초가 더 흐르자 이젠 빛뿐만 아니라 바람까지 느껴졌다.

종이 속에 다른 세상이 있는 것 같았다.

“……사피.”

목 깊은 곳을 긁어 내는 듯한 소리가 먼 저편에서부터 들려왔다.

“누군데 나를 그리 부르지.”

짧게 혀를 찬 카라샤펠은 턱을 당긴 후 종이를 한껏 노려보며 물었다.

불쾌하기 그지없었다.

“사피. 거기 있었구나.”

“묻는 말에 대답해라.”

“겨우 만날 수 있게 됐어……!”

“사파테아도!”

카라샤펠은 겹쳐져 있던 종이를 떼어 냈다.

빛은 사라지고 더 이상 바람도 불지 않았으며 이름을 부르던 남자의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카라샤펠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이맛살을 찌푸렸다.

새로운 것을 알아내는 것은 재밌지만, 이렇게 피곤할 때는 영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게다가 그다지 쓸모 있어 보이지도 않는데.

‘카라샤펠 로즈 폰 사파테아도 드 제르노아.’

랏샤의 이름에는 여러 사람의 이름이 담겨 있었다.

카라샤펠은 랏샤라고 불리던 외할머니의 애칭을 변형해 지은 것이고, 로즈는 어머니의 이름에서 따왔다.

마지막으로 사파테아도는 이 나라를 세운 첫 번째 황제의 이름이었다.

그러니까 이 종이 속 남자가 찾는 것은 아마도 첫 번째 황제일 것이다.

종이에서 느껴지는 세월의 흔적으로 보나, 그르렁대는 울음소리로 보나 분명히 사라진 용들 중 한 마리겠고.

이달론이 모든 용을 죽인 건 아닌가 보군.

아무스가 반쪽짜리 용 주제에 다른 용들보다 힘이 훨씬 강해 따돌림을 당했다는 얘기는 저번에 언뜻 들었었다.

그래서 이달론이 기를 쓰고 다른 용들의 힘을 흡수해 가며 아무스에게 복수하려고 했었다지.

그래도, 사라진 역사 속에서 찾아낸 용들이 몇 마리인데.

그놈들을 다 죽였다는 게 말이 안 되지.

한 놈 정도는 처자다가 이제야 기어 나왔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하다가 이제서.

아무리 좋게 생각을 하려 해도 짜증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종이 속에 갇혀 있었든 자고 있었든 누굴 기다리고 있었든, 솔직히 제 알 바는 아니었다.

해독하지 못했던 문장도 방금 종이 두 장을 겹치면서 읽을 수 있게 됐고.

몰랐던 단어들은 사전에 추가하면 될 일이다.

랏샤는 몸을 돌려 창고에서 나가려다가 문득 깨달았다.

……저 용한테 고어 해독을 시킬 수 있지 않나?

그러면 솔레아도 일찍 퇴근할 수 있고.

일찍 퇴근한 솔레아를 따라 공작저에 놀러 갈 수도 있겠지.

일찍 퇴근한 솔레아는 평소보다 여유롭고 다정할지도 모른다.

어쩌면 ‘갈게요!’라는 말과 동시에 사라지는 무례를 멈출지도 모르지.

랏샤는 긴 고민을 끝내고 다시 발길을 돌렸다.

다시 종이 두 장을 겹치자 건너편에서 다급하게 말을 뱉어 냈다.

“사파테아도! 사파테아도! 끊지 마! 사피! 끊지 마! 할 말 있어! 제발!”

“닥치고 네가 누군지부터 밝혀라. 감히 누구 앞이라고 목소리를 높여.”

“사피, 나야.”

종이를 뗐다.

시간을 질질 끄는 것은 질색이었다. 다음번에 종이를 붙였을 때 또 ‘나야.’ 따위의 로맨스 소설 속 남주 대사 같은 헛소리나 지껄이면 종이를 불에 태울 작정이었다.

랏샤는 종이 두 장을 양손에 한 장씩 나눠 들고 보물 창고 안을 천천히 거닐었다.

제국의 온갖 귀한 보물들이 이곳에 가득 넘쳐흘렀다.

역시 돈이 아주 많아.

귀중한 역사의 보고의 가운데 서 있는 기분은 아주 짜릿하군.

황제만이 느낄 수 있는 기분을 양껏 즐긴 랏샤는 다시 종이를 겹쳤다.

이번엔 말도 걸지 않았다.

다행히 상대방은 아까 전보다는 눈치가 늘어난 듯했다.

“저는 엘루입니다. 용이고요. 사파테아도와 친구였습니다. 사파테아도처럼 보이는데 사파테아도가 아니신가요?”

랏샤는 1대 황제 사파테아도의 초상화 앞으로 걸어가 섰다.

환한 은발에 녹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였다.

“내가 남자로 보이나?”

“아닙니다.”

종이를 몇 번 붙였다 뗐다 했더니 건너편의 남자는 굉장히 공손해졌다.

“사파테아도는 여자입니다.”

그럴 리가 없다.

황제 사파테아도는 남자였다.

아홉 개의 왕국을 모두 통일하고 제르노아 제국을 세운 위대한 황제인데.

“……네가 말하는 사파테아도가 누군지 설명해라.”

“……여기 제르노아 아닌가요? 사파테아도는 제르노아, 라리온, 카슬란, 안디라노, 지그티카, 가르크, 날리반, 푸스케이만, 알테이몬을 통일한 황제입니다. 정말로 긴 금발에 푸른 눈을 가진 여자였습니다. 제 친구였고요. ……사피, 아니야?”

랏샤의 동공이 흔들렸다.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풀려 종이들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만약 건너편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역사는 잘못 기록된 채로 계승되고 있었다.

잠시 동안 멍하니 서 있던 랏샤는 허리를 숙여 종이 두 장을 주워 들었다.

그러곤 고개를 들어 초상화를 바라봤다.

“……사파테아도.”

낮은 목소리로 초대 황제의 이름을 불렀지만 초상화 속 남자는 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카라샤펠은 문양이 겹치지 않도록 종이 두 장을 포개고 돌돌 말아 품에 넣었다.

곧장 황실 도서관으로 빠르게 걸어간 랏샤는 허공을 향해 명령했다.

“초대 황제에 대한 자료를 모조리 찾아와. 역사서, 초상화 사본, 업적, 그의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들어간 건 뭐든지 좋다.”

“예.”

허공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황제를 지키는 어둠이 조용히 움직였다. 몇 분 후 그는 온갖 문건들을 들고 모습을 드러냈다.

“이리 내.”

진지한 얼굴로 앉아 있는 황제 앞에 자료들이 켜켜이 쌓여 갔다.

랏샤는 날이 밝을 때까지 모든 자료들을 살피고, 또 살폈다.

어둠의 기사가 가져온 초대 황제에 대한 자료들은 방대한 양이었지만 랏샤의 눈꺼풀은 감길 줄을 몰랐다.

이른 아침 도서관에 출근한 사서는 깜짝 놀라 황제에게 인사를 올렸다.

“미천한 자가 제국의 위대한 빛을 뵙습니다!”

“자네 미천하지 않으려면 날 좀 도와줘야겠어.”

“예, 예? 어떤 것을 도와드릴까요, 폐하?”

“초대 황제부터 역대 황제들에 관한 자료들을 모두 들고 와.”

“네!”

사서는 책장과 황제가 앉아 있는 책상 사이를 몇 번이나 왔다 갔다 하며 자료들을 옮겼다.

그녀는 폐하께서 갑자기 왜 역대 황제들에 대해 알아보시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어렸을 때부터 역사 교육을 받아 오셨으니 그분들에 대해 모르실 리는 없을 텐데.’

얼마 지나지 않아 10인용 책상이 자료들로 가득 찼다.

“폐하. 도서관에 있는 것은 이게 다입니다. 황실 자료 보관실에도 다녀올까요? 근데 거긴 보안이 되어 있어서 폐하의 승인이 있어야…….”

“아니. 거긴 다녀왔어. 내 어둠이 책이 꽂힌 자리는 잘 몰라서 약간 헤매더라고. 다들 육체파라 그런가. 아무튼 고마워. 이제 됐으니 자리로 돌아가.”

“……예.”

‘내 어둠?’

사서는 폐하께서 어디가 아프신 게 아닐까 생각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며 역대 황제들을 조사하시다니.

사서는 구석에서 도서관의 일을 처리하며 황제 폐하를 조심히 살폈다.

고개 한 번 들지 않은 채 이쪽저쪽 손을 옮겨 가며 계속해서 문서들을 읽어 내려가고 계셨다.

몇 시간 뒤 베르고 공작님과 그레이 공자님, 솔레아 공녀님이 나란히 도서관에 등장하셨다.

아마 집무실로 출근하셨다가 폐하께서 여기 계시다는 소리를 듣고 함께 이리로 오신 거겠지.

꽤 반가우셨는지 폐하는 반색을 표하며 그들에게 작은 목소리로 짧게 말씀하셨다.

베르고 공작님은 뒤로 두어 발자국 물러나다가 이마를 짚으셨고, 그레이 공자님은 입을 쩍 벌리셨다.

“보여 주십시오. 보여 줘요!”

‘도서관에선 정숙해야 하는데……. 아니 근데 뭘 보여 달라고 하시는 거예요?’

라고 생각하던 찰나, 그레이 공자님이 황제 폐하의 가슴팍을 풀어 헤치기라도 할 것처럼 손을 뻗으셨다.

‘헉!’

물론 공작님이 뜯어말리곤 혼내셨지만.

“이놈아! 폐하가 나중에 보여 주겠다고 하셨잖니! 지금은 이것부터 살펴보면서 진실을 밝혀야지!”

‘폐, 폐하께서 대체 뭘 나중에 보여 주겠다고 하셨는데요! 옷을 풀어 헤치면 그 안엔 속살 뿐인데……!’

사서는 입을 틀어막았다.

그때, 솔레아 공녀가 한숨을 푹 내쉬며 질린 표정으로 걸어왔다. 사서는 빨개진 얼굴로 물었다.

“무,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야사…….”

“야한…… 사료?”

“예?”

“예?”

아차. 내가 지금 무슨 소리를.

사서는 고개를 휘휘 저으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그레이 공자의 때아닌 박력 있는 미친 모습에 정신을 놓아 버렸다.

“야사(野史)는 황실 도서관에는 없습니다.”

“그럼 뭐, 민간 설화나 전해 내려오는 전설 모음집이나 동화책은요?”

“동화책은 엄선된 작품들만이 이곳에 보존되어 있습니다.”

“대충 엄선한, 백성들이 휘뚜루마뚜루 보는 그런 건 없다 이거죠? 알겠습니다.”

말을 마친 솔레아 공녀님은 ‘어우, 일하기 싫어. 쇼킹하다. 근데 일하기는 싫어.’라고 중얼중얼하셨다.

솔레아 공녀님은 황제 폐하 앞으로 가더니 ‘저 좋은 책방 알아요. 온갖 것들이 다 모여 있는 곳인데 이렇게 된 김에 쇼핑 좀 하고 올게요.’라는 말을 남기고 금세 사라지셨다.

일하기 싫으시다더니 그대로 집으로 가신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레이 공자님도 비슷하게 생각하셨는지 공녀님이 사라진 곳을 향해 나도 데려가라며 소리치셨다.

하지만 그는 공작님과 폐하와 함께 책상 위에 산처럼 쌓인 자료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분류할 뿐이었다.

대체 다들 뭘 찾으시는 걸까?

* * *

솔레아는 곧장 리치의 그랜트 서점으로 향했다.

건물주가 된 리치 그랜트는 옆 건물까지 사들여 서점을 확장하고 바닥에서 먼지만 쌓여 가던 책들을 책장에 곱게 꽂아 두었다.

이젠 그랜트 서점이 제르노아 제국에서 가장 잘나가는 서점이 된 것이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예, 어서오, 악! 공녀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솔레아는 리치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책장들 사이로 들어섰다.

리치는 귀한 손님을 대접하기 위해 솔레아 뒤를 졸졸 쫓았다.

“찾으시는 책이 있으십니까? 제가 바로 찾아 드릴 수 있는데.”

“그럼…… 어느 나라 것이어도 좋으니까 백성들이 쓴 야사랑 전설, 민담, 설화 같은 거 종류별로 다 주세요.”

“다요?”

“네. 오래된 거면 오래된 것일수록 좋아요. 아. 동화 전집도요.”

“전집을요.”

“예, 전집을요.”

간만에 온 대박 손님에 신이 난 리치 그랜트는 아내와 함께 책들을 이고 지며 서점 밖의 수레에 가져다 날랐다.

“그런데 공녀님, 이걸 어찌 들고 가시려고요?”

공녀는 싱긋 웃었다.

“저 마법사잖아요.”

아차.

리치가 바보 같은 얼굴로 멍때리는 순간 공녀는 빠르게 인사를 건넸다.

“가 볼게요, 사장님. 그리고 우리 앤한테 야한 책 너무 많이 추천하지 마시고요.”

“예? 아! 예! 명심하겠습니다!”

리치가 대답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공녀는 사라졌다.

황실 도서관에 공녀가 거대한 짐수레와 함께 번쩍 나타났다.

“어디에 흔적이 남아 있을지 몰라서 다 끌어모았어요. 역사엔 기록돼 있지 않아도 전설이나 민담, 설화 같은 것에는 흔적이 남아 있겠죠, 여자 영웅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아니면 야사에 ‘∼였을지도 모른다.’라고 남아 있을 수도 있어요.”

“그래. 네 말이 맞아. 찾아보자고.”

베르고의 세 사람과 사파테아도의 이름을 물려받은 황제는 열심히 책을 파기 시작했다.

종이 속에 갇힌 용이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그의 말을 완전히 신임할 순 없다는 이유였다.

카라샤펠에게 그 용은 아직 그냥 종이 보이스 피싱일 뿐이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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