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9화
고문서 해독 때문에 황궁으로 출근한 마법사 협회장 솔레아는 두 시간째 야근 중이었다.
그것도 황제 앞에서.
서류를 확인하는 두 사람의 만년필 소리만이 집무실 안을 가득 채웠다.
꽤나 긴 적막이 흐른 후 솔레아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집에 가고 싶어요, 폐하.”
“협회장은 집에 못 가.”
“그럼 공녀가 집에 갈래요.”
“공녀고 나발이고 집에 못 가.”
“……아빠 눈 한쪽이 안 보이셔서 집에 얼른 가 봐야 돼요.”
“나머지 한쪽은 멀쩡하잖아.”
“그러니까요. 하나밖에 안 남은 귀한 눈인데. 누가 과로시켜서 지금 몸져누워 계세요.”
간만의 이른 퇴근에 기뻐하며 연무장에서 셋째 아들과 목검으로 겨루기를 하고 있는 디에르고 공작이 들었다면 코웃음을 칠 얘기였다.
하지만 솔레아는 아빠의 진짜 거취야 어찌 됐든 집에 가고 싶었다.
물론 랏샤는 흔들리지 않았다.
“안 돼.”
“아이고, 우리 아빠 눈도 안 보이시는데 어떤 직장 상사는 퇴근도 안 시켜 주네.”
“우리 아빠 치매.”
“……우리 아빠는 자식 중에 친자식 아무도 없음.”
“우리 아빠는 친자식도 못 알아봄.”
“…….”
“원래 황제였는데 어떤 용 때문에 이제 그냥 치매 걸린 늙은이임.”
“……아니, 저기요. 누가 선황을 그렇게 불러요.”
“그럼 누가 금황을 저기요, 라고 부르지?”
“……이씨.”
“일해, 산윤솔.”
솔레아는 눈물을 머금고 다시 서류를 들여다봤다.
용의 얘기가 담긴 고문서 중엔 사어(死語)가 많았다.
이달론이 용의 존재를 인간들의 기억에서 지웠던 탓에 많은 문화들이 사라졌다.
하지만 헤이먼과 그레이, 솔레아가 노력한 덕분에 고문서들과 벽화, 파괴된 조각의 일부와 용을 숭배했던 신전의 터를 찾아낼 수 있었다.
고문서는 중요한 문화적 사료라 반드시 해석해야 했고, 전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솔레아는 이 일에서 빠질 수 없는 귀한 인재였다.
물론 그 시절의 기억이 있다고 해서 솔레아가 모든 언어를 해독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 시절에도 쓸 줄 아는 단어가 몇 개 없는 반까막눈이었는데.
지금 온 나라에서 가져온 문서를 해독하라니. 그게 될 리가 있냐고.
작게 투덜거린 솔레아는 다시 책상에 머리를 박고 골머리를 썩였다.
정령들이 태어나기 이전의 언어라 정령들에게 도움을 받을 수도 없었고, 아무스도 그 시절에는 인간의 글을 배우지 않았었다.
결국 문서를 해독하는 것은 오롯이 솔레아의 몫이었다.
솔레아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사전들을 이것저것 뒤지고, 해석본과 비교하며 고문서를 한 단어, 한 단어씩 풀어서 해석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문자를 해석하는 방법은 다른 언어학자들과 비슷했지만, 솔레아는 그 시대에서 쓰던 언어를 잘 알고 있었기에 문어체와 구어체를 구별해 내는 능력이 탁월했다.
다행히 전 전생의 언어 체계는 한글과도 닮아 있어 더욱 수월하기도 했다.
그래도…….
“……그냥 살아 있는 용을 한 놈 더 찾는 게 더 빠르겠다.”
“찾을 수 있으면 찾아보세요∼ 나도 그러면 너무 좋겠다∼”
“폐하 왜 말투가 점점 우리 오빠 같아지세요?”
“어느 오빠?”
“어느 오빠인지 아시잖아요.”
“재밌잖아, 그레이 말하는 게.”
솔레아의 호위 기사가 될 거라며 기사단 입단을 미루고 미루던 그레이는 최근, 결국 황궁 소속의 기사가 되었다.
비리 상단을 잡아들인 공적을 높게 평가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특이하게도 그레이는 황궁 기사단 소속임에도 독립된 체제 아래 있었다.
바로 도망친 죄수들을 잡아들이거나, 비리 귀족들의 행적을 캐내 황제에게 보고하는, 일종의 암행어사였다.
……말이 좋아 정보원이지.
대체적으로 정의롭고 간혹 비열하고 무정한 그레이에게 어울리는 직업이었다.
그리고 황제와 접점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직업이기도 했고.
솔레아는 아주 잠깐, 폐하와 그레이가 결혼하는 걸 상상했다.
……으.
싫었다.
두 사람이 잘 맞는 건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비슷하기 때문이었다.
같이 세워 두면…… 그야말로 용호상박이 따로 없었다.
그림체가 비슷한데, 포지션도 비슷할 거 같다고.
그러니 랏샤가 제 새언니가 되는 건 절대 반대였다.
솔레아는 랏샤와 가족으로 엮이는 것보다는 지금처럼 친구 관계인 게 더 좋았다.
“……그레이 코 골아요.”
“너도 코 골아. 엎드려서 쪽잠 잘 때.”
“……저요? 정말? 그, 아닌데. 아무스가 저 잠버릇 없댔는데.”
“아무스랑 잠을 같이 자나 봐. 공작은 알고 있나?”
솔레아는 입을 다물었다.
잠깐의 적막 후 솔레아가 짓씹듯 말을 내뱉었다.
“랏샤는 결혼하지 마세요. 누굴 고생시키려고.”
“너네 오빠.”
“악! 진짜!”
“하하하하!”
랏샤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멎어 들고 난 뒤 솔레아가 조심스럽게 운을 뗐다.
“설마 진짜로 그레이를 좋아하시는 건 아니죠……?”
“그럼. 난 그런 고분고분한 남자는 별로야.”
“다행. 아니, 우리 그레이가 어디가 어디가 어때서 별로라는 거예요?”
“그래? 그럼 마음에 들어 해 볼까?”
“……됐어요. 저 그냥 일할게요. 말하지 마세요.”
“네가 먼저 말 걸었어.”
왜 자꾸 말리는 것 같지.
솔레아는 씩씩거리며 다시 일에 집중했다.
한 단어, 한 단어씩 겨우 해독하던 중 알 수 없는 글자에 막혀 버렸다.
‘……를 찾으면, 일어난다? 깨어난다? 울음을 운다? 울음을 운다가 무슨 뜻이야. 작은……, 큰…… 만남이 생기면 새로운 것이 오래된 모양으로…….’
솔레아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폐하. 고어 해석 조금은 할 줄 아시죠?”
“너랑 비슷할걸.”
“이것 좀 봐 주세요.”
랏샤는 솔레아가 내민 종이를 받아 들고 한참 바라보다가 고개를 갸웃 꺾었다.
“이게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요.”
“너도 모르는 말이야?”
“……네. 처음 봐요.”
그동안은 느리긴 했어도 문서를 꾸준히 해석해 왔는데, 이렇게 무슨 뜻인지 짐작도 가지 않는 글자들은 처음이었다.
가만히 종이를 내려다보던 랏샤는 목을 꺾으며 스트레칭을 하다 시계를 확인했다.
“이만 퇴근할까? 이건 내일하고.”
“와! 예!”
솔레아는 냉큼 문서를 내던지고 책상에서 멀어졌다.
겉옷을 챙긴 후 재빠르게 랏샤에게 걸어가 짧은 포옹을 나눴다.
“갈게요!”
“마차 불러 줄게. 차 한잔하고 가.”
“아니요. 아무스가 데리러 올 거예요. 아무스!”
천재 마법사 협회장은 마법진도 그리지 않고, 주문을 외우지도 않고서 시공간을 열었다.
모두 함께 있는지 시공간 너머의 공작저는 시끌벅적했다.
“짝! 지금 갈까?”
“산윤솔! 나도 갈까?”
“막내야! 나도 갈까?”
“아빠도 갈까?”
“레아, 옷 따듯하게 입었어?”
솔레아는 밝게 미소 지으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다 같이 오면 오래 걸리니까 아무스만 와. 나 바로 퇴근하고 싶으니까.”
몇 초 뒤 황궁 정원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꺄악!”
“네 자가용 왔네.”
“저 가 볼게요! 전, 폐, 아니, 랏샤!”
“그래, 잘 가.”
솔레아가 떠나고 난 뒤에도 랏샤는 한참을 더 앉아 일했다.
어차피 기다리는 가족도 없었다.
선황의 황비들은 모두 궁을 나갔고, 배다른 형제들은 어릴 때 죽거나 최근에 죽었다.
아까 솔레아에게 건넨 농담처럼 하나 남은 가족인 아비는 제 딸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상태고.
봐야 할 서류를 다 보고 난 이후에도 꽤 오랫동안 자리를 지킨 랏샤는 늦은 밤이 되어서야 몸을 일으켰다.
황제는 작은 램프를 들고 선황의 방으로 향했다.
그는 창가에 가만히 서 있다가 그녀가 들어오니 놀란 눈으로 바라봤다.
“실례지만 누구십니까?”
“주무실 시간이라 옛날이야기를 해 드리려고 왔어요.”
“내가 그런 걸 좋아하나?”
“그럼요. 아주 좋아하실걸요. 욕심 많은 남자가 가족을 갖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이상하네. 썩 좋아하는 주제는 아닌데…….”
“이리 오세요. 침대에 누워서 들으시면 잠이 잘 오실 겁니다.”
경계하는 눈빛을 보내던 선황은 이내 얌전히 침대로 가 누웠다.
늙어 버린 그는 사람을 제대로 못 알아보는 주제에 잠이 들 때만큼은 랏샤가 곁에 있지 않으면 잠들기를 거부했다.
이걸 알아본다고 해야 할지, 단순히 사람 애먹이는 아집이라고 해야 할지.
랏샤는 침대 옆 작은 스툴에 앉아 이야기를 시작했다.
“아주 먼 옛날, 욕심 많은 남자가 살았습니다. 그는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데려와 아내로 삼았어요.”
“오, 그 여자도 그걸 원했습니까?”
“글쎄요……. 그다지 즐거워하진 않았던 것 같네요. 제 기억상으론.”
“낭패군요. 남자가 힘이 셌나 봅니다.”
“그럼요. 전국에서 가장 강한 남자였어요. 그에게 거역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죠. 시골에서 살던 여자는 높은 지위를 갖게 되었지만 늘 자기가 살던 푸른 산과 맑은 시냇가를 그리워했어요.”
“……저기.”
“네, 말씀하세요.”
“모든 이야기에는 결말이 있잖습니까. 그 여자는…… 고향으로 돌아갔나요?”
선황의 눈에는 동정이 가득했다.
랏샤는 다소 무정한 눈빛으로 그와 눈을 맞추다가 싱긋 웃었다.
“물론입니다.”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나 고향에 묻혔다.
그 당시 선황에게는 입 안의 혀처럼 구는 다른 황비들도 많았으니 고향으로 돌아가는 건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선황은 랏샤의 웃음을 보고서야 안심한 듯 마주 웃었다.
“그것참 다행입니다. 이제 안심하고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군요!”
아니. 당신은 늘 그랬듯 이 이야기의 결말을 듣지 못하고 잠들 것이다.
아직도 이어지고 있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어찌 알겠는가.
당신의 뒤를 이은 나도 모르는데.
랏샤는 책장을 넘기며 제 아비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계속 이어 나갔다.
역시나 선황은 이야기가 무르익기도 전에 잠에 빠져들었다.
랏샤는 그가 잠든 것을 확인하고서 방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다시 집무실로 걸어갔다.
시녀가 다가와 ‘폐하, 이미 늦은 시각입니다. 주무셔야죠.’라며 걱정 어린 소리를 해 댔다.
“안 죽어.”
괜찮다는 뜻이었다.
정말로 괜찮았다. 과로로 죽을 것 같지는 않았다.
죽기 전에 누군가는 저를 살려 놓을 테니.
이젠 적도 없고, 후손도 없는데 황제를 죽게 내버려 둘 리가 있나.
제 목숨이 제 것이 아니라는 씁쓸함을 뒤로하고 외로운 황제는 집무실의 문을 닫았다.
아까 솔레아가 풀지 못한 문장이 기록돼 있는 고문서에 손이 갔다.
그것을 한참 훑어보던 랏샤는 구석에 그려진 특이한 문양을 발견했다.
분명 본 적 있는 문양이었다.
“……내가 이걸 어디서 봤더라.”
제자리에 서서 골똘히 고민하던 랏샤는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지하의 황궁 보물 창고로 향했다.
어릴 적, 고문서들을 모아 놓은 이곳에서 혼자 숨바꼭질을 하다가 본 것 같았다.
아닌가. 암살자들을 피해 숨어 있었던 때였나.
언제든 무슨 상관인가.
어둠 속에서 빛나던 글자를 본 건 사실인데.
랏샤는 각종 보물들이 쌓인 먼지 가득한 창고를 살폈다.
그때, 구석에서 작은 빛이 어른거렸다.
“누구냐.”
빛은 자기를 봐 달라는 듯 빠르게 깜빡거렸다.
그곳으로 걸어간 랏샤는 오래되어 찢어지기 직전으로 보이는 종이를 발견했다.
솔레아가 해석하지 못한 문서에 그려진 것과 같은 문양이 그 종이 구석에도 그려져 있었다.
랏샤가 문양이 겹쳐지도록 두 종이를 갖다 붙이자 빛이 커졌다. 그녀는 무언가에 홀린 듯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눈물 어린 자가 표식을 찾을 때 깨어날 것이다. 큰 인간. 작은 엘루. 새롭게 다시 만나자. 오래된 인연으로 다시 만나자.”
그 순간 종이 너머에서 그르릉 하는 울음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