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화
몇 주가 정신없이 지나갔다.
황제 대리인이 된 카라샤펠 황녀는 어떠한 뇌물도 받지 않고 청렴하게 황제가 증언한 내용에 따라 모든 귀족들을 빠짐없이 조사했고, 그 과정에서 수많은 귀족들이 작위를 박탈당하거나 영지를 몰수당했다.
황녀는 일이 이렇게 늘어난 건 내 용 때문이니 베르고에서 책임지라 말했다.
그 때문에 공작님은 원래도 바빴는데 이젠 매일 황궁에 출퇴근하며 얼굴 보기도 힘들어졌다.
게다가 나도 매일 랏샤가 황궁으로 불러 일을 시키는 통에 잠이 부족할 지경이었다.
“랏샤! 나는 그렇다 쳐도 우리 아빠 좀 쉬게 해 줘요! 이제 눈도 한쪽밖에 못 뜨는데!”
“야. 니네 아빠 한쪽 눈이라도 멀쩡한 게 어디냐. 우리 아빠는 옳은 말만 한다 뿐이지, 사람도 못 알아봐. 가서 일해.”
……맞는 말이네.
황녀의 집무실에서 빠져나가려다 다시 붙잡혔다.
“솔레아. 이거.”
“……또 뭔데요.”
“뭐긴 뭐야. 일이지. 가져가. 바빠.”
예전부터 내 일솜씨가 탐난다고 하던 랏샤는 이제 마음껏 부려 먹을 수 있겠다 싶으니 나를 전보다 더 편하게 대했다.
“마법사 협회? 이게 뭐예요.”
“이달론 네가 죽였잖아. 마물 부리고, 용 부리고 하는 사람이 마법사 협회장 돼야지. 그럼 누가 돼? 빨리 가서 정리하고 와.”
“랏샤! 난 지금 상단 일이랑 전하가 명령한 문화 재건 사업만으로도 바빠서 죽을 거 같은데!”
“그걸 시킨 랏샤도 바빠. 우리 일에 치여 죽지 말고 다시 만나자. 안녕, 솔레아.”
랏샤의 시녀인 로빈이 다소 애잔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며 집무실 바깥으로 이끌었다.
자주 보다 보니 그녀와도 친해졌다. 로빈은 집무실 문을 소리 나지 않게 닫고는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마법사 협회 측에서 이달론이 못된 놈인 건 알겠는데 빈자리는 어떻게 하실 거냐고 하도 괴롭혀서요. 사실 공녀님 말고 누가 그 자리에 앉겠습니까.”
맞는 말이긴 했다.
다만 모든 일들이 해일처럼 밀려와 적응이 힘들 뿐.
로빈은 안쓰러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두 손을 모아 빌기 시작했다.
“우리 전하 좀 도와주세요, 공녀님. 지금도 너무 바쁘셔서……. 용이 실존한다는 것 때문에 외국에서도 자꾸 사절단을 보내겠다고 난리고, 그동안 해석하지 못했던 오래된 문화재들도 다시 살펴보시느라 정신이 없으세요. 전하가 삐딱하게 말씀하시긴 해도 공녀님을 많이 의지하고 계세요. 네? 부탁드려요.”
“아유……. 로빈이 잘못한 것도 없는데 왜 빌어요. 알았어요. 일하면 되죠. 제가 협회장…… 일단 가서 말해 볼게요. 대신 우리 아빠 잠만 제때 잘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럼요. 그건 제가 잘 말씀드릴게요.”
로빈은 그제야 안심한 듯 나를 보며 싱긋 웃었다.
처음 봤을 땐 그저 딱딱하고 무섭기만 한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정이 많은 사람이란 말이야.
나는 황제 대리인인 랏샤의 직인이 찍힌 마법사 협회장 임명장을 들고 빠르게 황궁을 빠져나왔다.
‘왕주인!’
“왜?”
‘방금 로빈이 집무실 안으로 들어가서 랏샤한테 ‘말씀드린 대로 마음이 약해지시도록 싹싹 빌었습니다. 흔쾌히 협회장 자리를 맡겠다고 하셨습니다.’라고 말했어!’
“……하, 시발. 속았네.”
하여간 이 요망한 랏샤.
이래서 아빠가 친구를 잘 사귀라고 한 거구나. 내 팔자려니, 해야지. 어쩌겠어.
궁 밖으로 나오자 넓은 정원 잔디에 몸을 웅크리고 엎드려 있는 나의 검은 용이 보였다.
“아무스! 공작저면 몰라도 여기선 변신하면 안 된다고 했잖아. 황궁 정원은 잔디 망가지면 우리가 물어 줘야 된단 말이야.”
“다 들었어. 마법사 협회 본부로 가야 하지? 날아서 가자.”
이제 검은 공간의 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내가 그곳을 꺼려 하는 걸 알기 때문인지 아무스는 더 이상 검은 공간을 열지 않았다.
아무스의 꼬리부터 차근차근 밟아 등 위로 올라가는데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공녀님! 안녕하세요!”
“악! 깜짝, 아, 오빠!”
그레이였다.
“왜 여기 있어? 전하가 오빠 너도 일하래?”
“야, 너어는 반말을 할 거면 반말을 하고, 오빠라고 할 거면 오빠라고 하지. 듣는 그레이 헷갈리게 말투가 그게 뭐냐.”
“뭐야, 나 바빠. 빨리 말해! 궁엔 왜 왔어! 너까지 일 시킨다고 하면 전하한테 가서 따질 거야!”
뒤에 사람들을 줄줄이 달고 온 그레이는 씩 웃으며 말했다.
“전하가 용에 관한 사라진 문화를 다시 찾고, 되살리는 일을 베르고한테 맡기셨잖니. 근데 캬, 이런 머리 쓰는 일을 누가 하겠니. 큰형은 검만 쥐어 본 데다가.”
“헤이먼이 하면 되잖아. 헤이먼이 더 머리 좋은데 왜 네가 해?”
“너어는 또 오빠를 무시하는구나. 그게 아니라, 헤이먼은 지금…….”
랏샤가 창문을 열고 소리쳤다.
“솔레아! 너 빨리 안 가! 나 바쁘다고 했지! 마법사 협회 본부에서 오늘까지 임명 안 하면 축제 날짜 미룬다고 했다고!”
“아, 알았어요! 간다고요! 성질이 왜 저래! 나라 꼴 잘 굴러간다!”
“너 내 호위 기사들한테 죽고 싶어?!”
“안 죽일 거면서!”
“하여간 자기 주제를 아주 잘 알고 똑똑하고 건방져! 빨리 가!”
“네!”
얼른 아무스의 등을 타고 올라 목 위에 앉았다.
“그레이! 아무튼 열심히 해!”
랏샤가 준 종이들 가운데 마법사 협회 본부 위치가 적힌 종이를 골라 아무스에게 내밀었다.
“기사님. 여기로 가 주세요. 빨리요.”
“손님. 여기는 용이 못 들어가는 골목이에요. 몸을 돌릴 수가 없잖아요.”
내가 지윤이었을 때의 기억을 모두 알고 있는 아무스는 내가 자기 위에 탈 때마다 하는 상황극을 매번 받아 주었다.
“크흐흐.”
“손님. 내려서 다른 용 타고 가세요. 내가 돈 안 받을게.”
“아, 진짜 택시 기사님 같잖아!”
한참 낄낄 웃은 아무스는 다정한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짝. 이제 출발할까?”
“응. 가자.”
아무스가 날개를 펼치기 일보 직전 그레이가 외쳤다.
“야, 잠깐. 잠깐.”
그레이 뒤에 있던 누군가가 커다란 짐 가방에서 긴 천을 꺼내 그레이에게 전달했다. 그레이는 돌돌 말린 붉은 천을 들고 우리에게 다가왔다.
“이거 좀 묶자.”
“처형. 불편하게 왜 이러는지 모르겠군. 싫다.”
“처형이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하는지 나 원 참.”
투덜대면서 그레이는 긴 천의 양 끝단을 아무스의 발톱에 묶었다. 아무스가 날아오르면 천이 아래로 펼쳐지며 글자가 나타날 모양이었다.
“오빠. 거기 뭐라고 썼어?!”
“그런 게 있어! 다 내가 너 생각해서 준비한 거다.”
뭔가 불안했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해가 지기 전에 마법사 협회 본부에 도착해서 황제 대리인인 랏샤가 찍은 직인을 보여 주고 협회장 자리를 받아야 했다.
물론 거기서도 또 할 일이 있겠지만.
일단 아무스의 긴 뿔 끝을 양손으로 잡았다. ‘날자.’는 우리만의 신호였다. 아무스는 순식간에 두 날개를 펴고 크게 움직였다. 단 한 번의 날갯짓만으로도 빠르게 지면에서 멀어졌다.
새빨간 천이 펄럭이며 아래로 펼쳐졌지만 내가 앉은 자리에선 잘 보이지 않았다.
“아무스. 천에 뭐라고 적혔는지 보여?”
“잘 안 보이는데?”
정령들에게 소리쳤다.
“집중의 박수를!”
‘왜!’
‘왜?’
‘분홍이랑 놀고 있었는데!’
‘분홍이 지금 일하느라 바빠서 도와주고 있었는데!’
‘은발 놈도 일하러 가고, 아가 불곰도 일하러 가고, 꼬마 처형도 일하러 가서! 우리 분홍이 혼자 저택에서 일하고 있는데!’
‘우리 왜 불렀어!’
바쁜 건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하긴, 마물들이 잘 따르는 티온은 마물의 인식 개선을 위해 영상석에 마물들과 함께 노는 모습을 찍어 여기저기 유포하곤 했다.
마물을 갑자기 마주쳤을 때 어떻게 행동해야 공격받지 않고 그들과 유대감을 쌓을 수 있는지에 대해 여러 상황별로 영상석에 찍느라 아빠와 다른 의미로 얼굴 보기가 힘들었다.
친오빠가 갑자기 백만 구독자를 가진 유튜버가 된 기분…… 낯설다.
그러니 우리가 원래 공작저에서 하던 일은 당연히 헤이먼이 혼자 처리하게 됐다.
나라가 급변하고 있는 이 시기에 굳이 우리 가문만 뼈가 갈리도록 바쁠 게 뭐람.
눈물이 난다.
“다른 게 아니고, 아무스 발톱에 묶인 천에 뭐라고 적혔는지 말해 줄래? 그레이가 달아 줬거든.”
정령들은 빠르게 밑으로 날아갔다가 다시 내 앞으로 날아왔다.
‘‘충격! 용 진짜 있음!’이라고 엄청 크게 적혀 있어.’
“……잠깐만. 뭐라고?”
골이 띵하다.
문화 재건 사업을 한다는 놈이 그런 걸 우리 아무스 발톱에 달고 다니라고 했단 말이야?
“떼 줘!”
‘안 돼! 왕주인! 밑에 다른 글자도 있단 말이야.’
“뭔데?”
‘주의. 험악한 베르고의 공녀가 타고 있어요.’
아무스 머리 돌려서 다시 돌아갈까. 가서 그레이 한 대만 때리고 올까.
“풉.”
“……아무스. 웃겨? 재밌냐고.”
“아니야. 혹시라도 무슨 일 생기면 사람들이 너 먼저 구할 수 있을 거 같아. 네가 타고 있다고 했으니까.”
“충격! 용 진짜 있음! 이딴 말을 발에 달고도 웃음이 나오는 거야?”
“그럼. 너랑 같이 있는데 안 웃을 이유는 뭐야. 난 지금 너무 좋아.”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는 아무스 때문에 내 쪽팔림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아무스는 요즘 내 곁에서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숨바꼭질이 끝났잖아, 라며 나를 꼭 안고 있거나 아무도 보지 않을 때면 입을 맞추기도 했다.
그리고 가끔 물었다.
“얼마만큼 행복해?”
“아주 많이.”
이렇게 답하면 정말 안심이 된다는 듯 아무스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다행이야.”
한참 날던 아무스는 한 건물 옥상 위로 내려갔다.
“도착했습니다. 손님.”
“여기가 본부야?”
“응. 네가 보여 준 지도상으로는 여기가 맞아.”
뭔가 이상했다.
명색이 마법사 협회 본부인데, 너무 오래되고 낡은 건물이었다.
제르노아에 있는 마법사들의 수가 적지는 않을 텐데. 본부가 이렇게나 초라하다니.
뭔가 수상하다는 생각에 잔뜩 긴장한 채로 옥상 문을 열었다. 계단에 발을 디디기도 전, 우리가 도착한 걸 멀리서부터 봤는지 계단을 우당탕탕 뛰어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진짜 오신 거야?”
“왔다니까! 내가 봤다고!”
“오늘까지 안 보내 주시면 황궁에 찾아갈 작정이었지!”
“진짜 용을 타고 오셨어?”
“아, 속고만 살았나! 광고 문구까지 적혀 있던데 뭘! ‘충격! 용 진짜 있음!’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적은 천까지 달고 오셨어!”
……아, 쪽팔린다.
용으로 있는 모습을 보여 주는 게 더 부끄러울 것 같아 아무스에게 사람으로 변하라고 말을 하려고 고개를 돌렸다.
이미 변해 있었다.
내 용은 점점 눈치가 빨라졌다. 발에 묶인 천도 풀려는 순간 계단을 올라온 사람들과 눈이 마주쳤다.
“고, 홍, 공녀님?”
“베르고의 공녀님 맞으십니까?”
“용, 헉, 용 님을 타고 오셨죠? 먼 길 오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헉헉거리며 남은 계단을 올라온 이들은 흐르는 땀을 닦으며 내게 악수를 건네다가 얼른 다시 손을 거둬들였다.
“제가…… 땀이 좀 나서, 죄송합니다.”
“하하. 아니에요. 축제 준비 때문에 협회장을 급하게 뽑아야 한다고 전하께 말씀드렸다면서요.”
“예. 아시다시피 마법사들이 주관하는 제르노아의 오래된 전통 축제가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올해는 용의 전설이 사실로 밝혀져 많은 사람들이 호기심을 가지고 있고 하니, 용 님을 주인공으로 할까 해서…….”
마법사들은 내 옆에 서 있는 검은 머리 남자를 힐긋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난 솔레아의 것이다.”
아무스의 말에 마법사들은 내게 머리를 숙였다.
“마력을 넘치도록 갖고 계신다는 말씀은 익히 들었습니다! 공녀님! 협회장이 되어 주시고! 축제도 함께 기획해 주시고! 마법사 협회도 이끌어 주십시오!”
……아, 그러니까 또 일을 하란 소리군요.
아무스가 살짝 고개를 숙여 물었다.
“짝. 지금 행복해?”
“아니. 별로.”
아무스는 입꼬리를 내리고는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일이라니. 또 일이라니.
모든 일이 해결된 후에도 일이라니. 살려 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