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화
분명 황제답게 멀쩡하다 못해 귀티가 좔좔 흐르는 복장으로 공간의 틈 속에 들어갔는데 회의실로 들어선 황제는 남루하기 그지없는 행색이었다.
조금 전 응접실에서 봤던 것과 같은 옷인데도 낡고 해져서 같은 옷이라는 걸 알아보기 힘들었다.
마치 수십 년을 길거리에서 거지처럼 살아온 사람 같았다.
윤기가 흐르던 금발 머리는 희게 세 버려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처럼 보였다. 황제는 주름이 져 축 처진 눈꺼풀에 반쯤 가려진 푸른 눈으로 느리게 회의실 안을 쭉 둘러봤다.
다들 경악한 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황제를 바라봤다.
카라샤펠이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폐하?”
‘폐하’라는 말에 반응하듯 황제는 굽히고 있던 등을 살짝 펴고는 그녀를 바라봤다. 그리고 곱아든 손가락을 어렵사리 움직여 그녀에게 뻗었다.
카라샤펠은 곧장 황제에게 뛰어갔다.
“폐하! 이게 대체 어찌 된……. 아버지. 이게 무슨 일입니까.”
“괜찮아, 괜찮아…….”
주름진 입가가 천천히 열리며 날카로운 송곳으로 쇠를 긁어 대는 것 같은 걸걸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황제는 모든 것을 깨달은 듯 자애로운 미소를 띤 채 회의실 안을 살펴봤다.
“그대로구나……. 모든 것이 그대로야.”
그의 눈에서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저를 부축하는 카라샤펠의 손을 잡고 다독이는 황제의 얼굴에는 더 이상 어떤 탐욕도 보이지 않았다.
“고생했다, 고생 많았다. 우리 딸. 외롭게도 컸더구나. 이런 애비를 만나 고생했어…….”
카라샤펠의 두 눈이 아까보다 더 휘둥그레 커졌다. 생전 그 비슷한 말도 들어 본 적 없다는 표정이었다.
하긴, 천상천하 유아독존 황제가 ‘나 때문에 고생했다.’라는 말을 하다니. 나 역시 너무 놀라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 건 나뿐만이 아닌지 회의실 안의 모든 사람들이 말을 잃은 채 황제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황제는 회의실 안 사람들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서서히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차이칸, 아내에게 잘해 줘야지. 자네 아내가 자네를 위해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렀나.”
“폐, 폐하?”
“가문을 이어받았어야 하는 사람인데 자네에게 오지 않았나. 자네를 그 자리에 앉히기 위해…… 정말 많은…….”
말을 하는 황제의 두 눈이 서서히 감겼다. 마치 잠에 빠진 것 같았다.
몸짓이나 특유의 표정이 세상을 다 산 노인 같았다.
“폐하.”
“……응.”
“아버지!”
크게 부르는 카라샤펠의 목소리에 황제는 두 눈을 번쩍 뜨고 다시 주변을 둘러봤다.
“끝난 거니?”
“네?”
“오, 랏샤. 너로구나. 귀한 내 딸. 널 낳고 얼마나 기뻤는지…….”
황제의 정신이 이상했다.
“돌아왔구나. 마가렛, 에시안, 퀴렐…….”
황비들에게 차례로 인사를 건네다가 영문 모를 말을 중얼거리기도 했다.
“황후는 어디 있지. 분명히 같이 있었는데 말이야.”
“황후 폐하는 11년 전에 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이후로 황후의 자리는 쭉 공석이었고요.”
한 귀족의 말에 황제는 피식 웃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랬지. 퀴렐이 황후와 닮아 비로 들였었지.”
퀴렐 황비의 얼굴이 붉어졌다. 모두 알면서도 쉬쉬했던 말이었다. 힘없는 백작가인 퀴렐 가문에서 황비가 나온 것은 이례적인 일이긴 했다.
“그런 이유로 데려왔으니 마음을 주지 못했지. 당연한 일이야. 그래, 내 잘못이지…….”
퀴렐이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짓입니까! 용의 시험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농담을 하더니. 황제 폐하가 완전히, 완전히…….”
퀴렐은 말을 잇지 못하고 덜덜 떨리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잠시 후, 그녀는 겨우 입을 열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치시지 않았습니까.”
“퀴렐. 나는 미치지 않았어. 그저 조금 오래 살았을 뿐. 한 발자국 떨어져서 보게 된 거야. 미치지 않았어. 당신의 아들을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해. ……나를 죽이려고 한 당신을 용서할게.”
황제를 죽이려 했다는 말에 회의실 안 모두의 시선이 퀴렐 황비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입을 꾹 닫은 채 고개를 돌렸다.
“……쉬고 싶구나. 카라샤펠.”
랏샤는 황제를 부축해 의자에 앉게 했다. 황제는 손을 뻗어 랏샤의 얼굴을 가만히 쓰다듬으며 말했다.
“암, 내 뒤를 이을 사람은 너밖에 없지. 너뿐이란다, 랏샤. 나보다 훨씬 잘할 거다.”
그 순간, 허공이 다시 한번 열렸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시커먼 어둠을 본 사람들이 흠칫 놀랐다.
그때 검은 공간에서 용의 커다란 머리가 서서히 빠져나오기 시작했다.
“아무스.”
이름을 부르자 아무스는 날 다시 봐서 기쁘다는 듯 커다란 얼굴을 내게 비벼 왔다.
“다녀왔어, 솔레아.”
용이 실재한다는 사실에 놀랐는지 귀족들이 술렁거렸다. 그들 중 하나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소리쳤다.
“저 용의 시험에 들었다가 폐하께서 이상해지신 것 아닙니까!”
아무스는 검은 공간 밖으로 빠져나오며 인간으로 변했다. 다행히 옷을 입고 있는 채였다.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그저 그에게 여러 생을 보여 줬을 뿐이다. 그 안에서 무엇을 느끼고 어떻게 변하는지는 모두 그가 선택한 것이다.”
그사이에 또 잠들었는지 황제가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러다 퍼뜩 놀라 눈을 뜨곤 카라샤펠에게 말했다.
“랏샤. 페르곤 후작은 제 아들을 대공으로 받아들여 주지 않으면 서대륙과의 무역권을 제멋대로 끊을지도 모른다는구나. 성정이 뱀 같은 자니 조심하렴.”
“예?”
회의실에 앉아 있던 페르곤 후작이 두 눈을 커다랗게 뜨고 눈살을 찌푸렸다.
황제는 또 말을 이었다.
“랏샤, 우리 딸. 일리단에서 온 고기 때문에 제르노아에 전염병이 돈단다. 올해는 고기를 모두 폐기하렴. 아, 타이온 공작은 아내를 패 죽였으니 그의 아들과는 결혼하지 말거라. 아, 참. 그 공자에게는 이미 사생아도 있어. 대장장이의 딸을 억지로 취해 자식을 만들어 놓고는 책임도 지지 않는 파렴치한 자가 너를 넘보다니. 말도 안 되지.”
그리고 또 잠이 들었다.
타이온 공작이 소리를 지르며 일어났다.
“모함입니다! 폐하께서 미치신 게 틀림없다고요!”
황제가 가끔 눈을 뜰 때마다 하는 말은 주변인을 향한 사과와 드물지만 누군가를 용서하는 말, 그리고 그 외에는 미래에 일어나는 일에 대한 것이었다.
“모함이 아닙니다. 저 또한 그곳에 다녀왔으니까요. 폐하께서 하신 말씀은 모두 진실일 겁니다. 제가 증인이 되겠습니다.”
내 말에 놀란 이들이 나를 바라보긴 했지만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 와중에도 황제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누가 누구를 죽이려고 했다, 또는 누가 누구를 죽였다, 협박을 했다, 뇌물을 줬다, 등등.
카라샤펠은 황제의 모든 발언에 대한 조사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귀족들의 반발이 있었지만 그녀는 뜻을 꺾지 않았다.
“이 모든 게 명백한 사실로 밝혀져야 폐하께서 미치시지 않았다는 걸 증명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가리지 못하시니 지금 두서없이 하신 말씀들이 적어도 거짓말은 아니라는 뜻이죠. 아비가 미쳐서 빈자리가 된 황좌에 제가 앉게 된 게 아니라, 정당하게 제 자리를 물려받은 것이어야 합니다.”
“어차피 황녀 전하가 적자 아니십니까! 그렇게까지 해서 귀족들을 뒤엎으시려는 이유가 뭡니까! 그 혼란을 어찌 책임지시려고요!”
“어느 누가! 제 아비가 미쳤단 소리를 듣고도 가만히 있겠습니까! 내겐 딸로서, 아버지의 결백을 밝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당신들 모두 아까부터 폐하가 미쳤다고 떠들고 있잖아!”
카라샤펠이 진심으로 흥분해서 악을 지르는 건 처음 봤다.
씩씩거리던 카라샤펠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느리게 내뱉은 후 말했다.
“……허나, 폐하께서 정상적으로 업무를 처리하실 수 없는 것은 사실이므로 지금 이 순간부터 내가 폐하의 대리인으로서 국정을 책임지겠다. 방금 말했듯 귀족들의 비리에 대한 조사도 들어갈 예정이니, 지금부터 다들 최선을 다해 숨겨 보든지, 알아서 자수하든지 해라.”
말을 마친 후 카라샤펠은 황제를 부축해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회의실에 남은 귀족들 중 몇몇이 말도 안 된다며 화를 냈다. 그러자 황제에게 언급되지 않은 귀족들이 새로운 황제 폐하가 즉위하시면 귀족들의 지위가 바뀌는 것은 흔한 일인데 뭘 그리 성을 내냐며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결백함에서 나오는 태연함이었다.
그리고 공작님 역시 태연하다 못해 차분한 얼굴로 내게 말했다.
“전하를 따라가 보렴.”
“혼자 여기 계시게요?”
“그래. 전하 혼자 폐하를 부축하기엔 힘에 부치실 게다. 아무스는 남고. 용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자들이 아직도 있는 듯하니 조금 더 대화를 해 봐야겠구나.”
“그래도 아빠. 지금 귀족들 다 너무 흥분해 있어서 걱정돼요…….”
“랏샤는 네 친구잖니.”
공작님의 입에서 나온 ‘랏샤’라는 이름에 나는 결국 몸을 움직였다. 회의실 밖으로 나가 복도를 빠르게 걷다 보니 앞서 걷고 있는 카라샤펠과 황제 폐하가 보였다.
“랏샤. 여기가 어디지?”
“황궁이에요. 지금 폐하의 침실로 가는 중입니다.”
“……엇, 당신 눈엔 제가 보이십니까? 여기가 어디요? 내가 또 어디로 와 버린 거지.”
울음을 참는 듯 카라샤펠의 두 어깨가 파르르 떨렸다. 차마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 수 없어 얌전히 뒤를 따라 걷기만 했다.
“아까 용의 시험을 받겠다고 하셨을 때 제가 말리지 않아서…… 저를 원망하진 않으세요? 제가 황좌에 눈이 멀어서 아버지를 사지로 내몬 미친년 같지 않냐고요.”
랏샤의 목소리에 울음기가 약하게 섞여 있었다.
“누구십니까?”
황제는 카라샤펠에게 잡힌 팔을 빼내고는 낯선 자를 보듯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다가 갑자기 빙그레 웃으며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우리 딸과 똑 닮았네. 우리 랏샤. 똑똑하고 야무진 내 딸. 날 많이 닮은 내 사랑하는 딸, 랏샤.”
“……랏샤를 사랑하세요?”
“그럼. 사랑하고말고. 너무 사랑하지. 황제로 태어나지 않았으면 더 많이 표현했을 거요. 내가 보고 왔으니까 단언할 수 있습니다. 어릴 땐 랏샤도 지금보다 훨씬 순수했는데. 아. 이건 비밀인데, 내 딸은 조금 약았습니다. 욕심도 있고, 무서울 정도지요. 그래도 자기 자리를 지키려다 보니 그렇게 된 거라…… 평범하게 컸으면 달랐겠지요.”
떠돌이가 여행지에서 만난 이에게 말을 건네는 것처럼 추억에 젖은 말투였다.
랏샤는 눈물 젖은 얼굴로 픽 웃었다.
“……욕심도 있고, 무섭고, 약은 그 랏샤도 사실은 아버지를 사랑한대요.”
황제의 두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진심으로 기쁜 듯 검은 공간에서 돌아온 이후 처음으로 눈에 이채가 어렸다.
“랏샤를 아십니까? 우리 딸이 지금은 좀 무서워도 어릴 땐 정말 순수했답니다.”
황제는 긴 복도를 걸으며 랏샤에게 끊임없이 제 딸이 처음으로 뒤집기를 했을 때와 자신을 ‘아빠’라고 불렀을 때 얼마나 감격스러웠는지를 반복해서 얘기했다.
황제라는 자리가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딸이라는 존재가 사랑스러웠다고.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부담과 흐르는 세월에 감정이 마모되어 표현하지 못한 게 미안하다고 말했다.
그래도 용이 보여 주는 세월 속에서 타인이 된 것처럼 인생을 몇 번이나 보고 나니 알 수 있었다고.
외로움이나 원망. 사랑 같은 수많은 감정들을.
“제 딸을 만나게 되면 꼭 전해 주세요. 사랑한다고.”
랏샤는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따님이 벌써 알고 있대요.”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황제는 안심이라는 듯 제 가슴을 쓸어내린 후 제 방으로 들어갔다.
잠자리를 봐 주려는지 랏샤도 그를 따라 들어갔다. 잠시 후 방 밖으로 나온 랏샤의 눈가가 살짝 붉어져 있었다.
“공녀의 용 덕분에 평생 못 들을 줄 알았던 말을 들었군. 황위도 생각보다 빨리 물려받게 될 것 같고 말이야.”
나는 말없이 랏샤를 끌어안았다.
“뭐야. 왜 이래.”
“친구끼리는 가끔 이래요. 그냥, 좀, 위로가 필요하지 않을까 해서.”
“하! 아빠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처음 들어 본 사람을 처음 봤나.”
“무슨 이럴 때도 그런 농담을 하세요.”
“그래? 난 처음 봤는데.”
나를 꼬옥 끌어안은 랏샤는 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조금 울었다.
아주 조금 울고, 언제 그랬냐는 듯 귀족들에 대한 대대적인 조사를 시작했다. 역시 적이 되면 안 될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