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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화 (142/192)

142화

용은 소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좋았다. 

ㅅ을 발음할 때 혀가 공중에 떠 있는 것도, ㅏ 소리를 내기 위해 입술이 살짝 벌어지는 것도, 받침인 ㄴ 때문에 혀 끄트머리가 앞니 뒷부분에 살짝 닿는 것도, 모두 다 좋았다.

산.

산.

산.

용은 누가 듣고 훔쳐 갈세라 소녀의 이름을 소리 없이 몇 번 부르다가 이내 참지 못하고 소녀의 이름을 듣고 싶어 동굴에서 홀로 되뇌었다.

“산.”

커다란 동굴 안에서 용의 음성은 벽에 부딪쳐 메아리치며 돌아왔다.

이 넓은 동굴 안에서는 소녀의 이름을 한 번만 불러도 아주 많은 사람들이 소녀를 부르는 것처럼 느껴졌다.

용은 눈을 감고 상상했다.

많은 사람들이 산을 부르고, 산의 곁에 있고, 산이 웃고, 환하게 웃는 얼굴로 저를 마주하고.

“산.”

메아리가 멎으면 용은 다시 소녀의 이름을 불러 빈 자리를 메꿨다.

고작 소녀의 이름 하나 덕에 용은 홀로 남아 있을 때도 더 이상 외롭지 않았다.

이름이 네모난 물건이라면 용의 입 안에서 몇 번이고 굴려져 동그랗게 변하다 못해 닳아 없어질 정도의 시간이 흘렀다.

작은 산이, 산이 되었다.

날개뼈 아래에서 달랑이던 머리카락은 이제 허리까지 자라났고, 얼굴과 몸의 흉터들도 그에 맞춰 커졌다.

“젠장, 어른 되면 껍질 벗겨지듯이 휙 변할 줄 알았더니 똑같네.”

어느 날 동굴에 놀러 온 산이 투덜거렸다. 하지만 용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멋진데 왜 그래.”

산은 용의 말에 픽 웃고 말았다.

“네가 인간들이 사는 마을을 몰라서 그래. 거기 사람들은 자기랑 다르게 생긴 사람을 쉬쉬하면서 피해. 욕하는 사람들도 있고.”

“그럼 동굴에서 살면 되잖아.”

“하하. 그럴까. 너랑 여기서 살면서 가끔씩만 약초 팔러 내려갈까. 하긴, 매일 오르락내리락하는데 그것도 나쁘진 않겠다.”

용은 소녀의 말에 한참이나 두근거렸다.

얼떨결에 뱉은 말이지만 나쁘지 않은 제안 같았고, 소녀 역시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듯했다.

용은 소녀가 언제 찾아올지 몰라 마른풀을 동굴에 넓게 깔아 뒀다.

여기서 같이 지낸다면 추위를 많이 타는 소녀가 불편해할 것 같았다.

그다음 날, 소녀가 산으로 올라왔을 때 용은 자꾸만 삐죽삐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내리며 동굴로 향하는 길을 힐끔거렸다.

이제 곧 해가 지는데. 그럼 어두워지니까 그 전에 올라가야 할 텐데.

나는 괜찮지만 인간은 밤눈이 어두워서 길을 찾기 힘들 텐데. ……나랑 같이 있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가?

하지만 소녀는 동굴로 올라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한참 약초를 캐다가 허리를 편 소녀는 땀을 닦으며 말했다.

“이제 슬슬 내려가야겠다.”

“……왜, 왜?”

“집에 가야지. 너도 이제 집에 가고.”

아.

내 동굴은 너의 집이 아니구나.

소녀가 내려간 뒤 밝은 보름달이 산 여기저기를 비출 때, 용은 커다란 호수에 제 모습을 비춰 보았다.

아직 두 번째 성장통을 맞지 않아 앳된 청년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용은 소녀와 나란히 선 제 모습을 가만히 떠올렸다.

항상 소녀의 뒷모습만 보고 있느라 한 번도 못 느꼈는데, 아마 다른 이들이 본다면 누나와 동생쯤으로 알 것 같았다.

전에는 소녀와 나이가 비슷해 보였는데, 이제는 인간 같아 보인다는 것 말고는 비슷한 구석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용의 긴 눈꼬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래서 나랑 같이 안 사나? ……내가 인간이 아니라서?”

그는 처음으로 인간 쪽이 아닌 용 쪽의 피가 조금 야속하게 느껴졌다.

물론 그런 스스로를 알아채자마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첫 번째 성장통 때 받은 영향이 너무 오래가네.”

성장통 때 인간의 체액을 섭취한 용들은 다들 이럴까.

답답한 마음에 용은 벌러덩 바닥에 드러누웠다.

시간이 더 많이 흘러서 제 몸을 괴롭히는 인간의 독이 모두 사라지면, 가슴을 가득 채운 답답한 열기도 사라지겠지.

더 이상 소녀를 볼 때마다 배 안에서 나비가 날갯짓을 하듯 간지러운 기분도 느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소녀를 더 이상 그리워하지 않을 수 있겠지.

용은 몸을 옆으로 둥글게 만 채 호숫가에서 잠을 청했다.

산이 동굴에서 쉬었다 가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었고, 어느 순간부터는 더 이상 동굴에 오지 않게 되었다.

그래도 산은 매일 약초를 캐기 위해 산으로 올라왔고, 용은 그것으로도 족했다.

“산.”

“왜?”

커다란 낡은 가방을 메고 약초를 캐던 소녀가 허리를 펴며 대답했다.

“산.”

“왜 자꾸 불러. 바쁜데.”

“왜 바쁜데?”

“곧 축제거든. 다른 지역에서 사람들이 많이 오니까 약초도 잘 팔려.”

“그래서 온 산의 약초 씨를 말릴 작정이야?”

용의 말대로 소녀의 가방은 이미 가득 담긴 약초들로 미어터질 듯했다.

소녀는 조금 민망한 듯 가방을 고쳐 메며 어색하게 웃었다.

“하하. 한 며칠 동안은 산에 안 올라오고 계속 팔아야지.”

“왜? 왜 안 올라오는데?”

“축제라니까. 산에 올라와서 하루 종일 약초 찾아다닐 겨를이 없어. 축제 시작 전에 잔뜩 준비해 놨다가 다 팔아야지. 사람들 엄청 많이 온다니까?”

용의 눈썹이 비스듬히 올라갔다.

“네가 내 성장에 영향을 준 거에 대한 책임은? 그건 이제 아무 상관도 없단 건가?”

눈이 부신 건지, 아니면 화가 난 건지 소녀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하, 참 내. 그게 벌써 10년 전인데 왜 이제 와서 그래.”

10년?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흘렀나?

……인간이 보통 몇 년을 살지?

팔짱을 낀 채 소녀를 노려보던 용의 동공이 빠르게 흔들렸다.

하지만 소녀는 아랑곳 않고 다시 허리를 숙여 약초를 캐기 시작했다.

“그동안은 사람들이 다 나를 피하고, 말도 안 걸고 하니까 늦은 밤에 약초상한테만 약초를 싸게 팔았는데 올해부턴 내가 직접 팔아 보려고. 그게 더 돈이 되거든. 천으로 얼굴을 감싸면 괜찮을 거 같기도 해.”

“……산에 들어올 때처럼?”

“아, 봤구나. 응. 그때처럼.”

어떤 모습인지 알고 있었다.

요즘엔 매일 소녀가 산으로 올 시간만 되면 산을 내려가니까.

그녀는 산 중턱에 오르기 전까지 절대 얼굴을 내보이지 않았다.

커다란 천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 턱 밑에 매듭을 두 번이나 단단하게 맸고, 머리엔 모자까지 꾹 눌러썼다.

혹여 고개를 들었다가 하얗게 멀어 버린 왼쪽 눈을 사람들에게 보일까 걱정됐는지 오직 땅만 보며 산을 올랐다.

그러다 산 중턱에 오르고, 주변에 사람이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면 그녀는 모자도 벗고, 뒤집어쓰고 있던 천의 매듭도 풀어 버렸다.

그럴 때면 소녀의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이 산바람을 만나 물결치며 흩날렸다.

초록이 가득한 산길 한가운데에서 바람을 맞으며 땀을 식히는 산의 얼굴을, 그녀에게 깃든 잔잔한 미소를 용은 지난 몇 년간 매일 지켜보았다.

‘그걸 앞으로 며칠 동안 못 본단 말이야? 고작 60년 겨우 넘는 인간의 생 중에서 며칠이나 뺏겠다고? 앞으로 남은 날도 30년을 겨우 넘는 주제에 며칠이나 산을 오지 않겠다니.’

생각만 해도 아찔해 손에 저절로 땀이 배어났다.

태연하게 약초를 캐는 소녀의 태도가 서운하다 못해 분하기까지 했다.

“나한테 미리 말 안 했잖아!”

버럭 소리를 지르는 용의 태도에 소녀는 어이없다는 듯 머리를 쓸어 넘기며 용을 마주 봤다.

“뭘 미리 말을 안 해. 지금 하잖아.”

“……더, 더 미리 말해야지! 왜 이제 와서 말해!”

억지인 건 알고 있었지만 한번 터진 말은 멈추지 않았다.

“여태 안 가다가 왜 가는데! 여태까진 인간들이랑 섞여 지내지도 않고, 매일 산에 오르고, 괜찮았잖아! 그대로도 좋았잖아! 왜 굳이 가는데!”

“아까 말했잖아! 돈 더 벌려고 직접 가는 거라고!”

“거짓말하지 마! 내가 약초 더 많이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했을 때 거절했었잖아! 싫다며! 네 힘으로 할 수 있으니까 신경 쓰지 말라며! 네가 진짜 돈이 필요했으면 나한테 비늘을 떼 달라고 했겠지! 돈 때문에 가는 거 아니잖아!”

소녀가 들고 있던 작은 칼을 바닥에 내던지며 소리를 질렀다.

“그래! 돈 때문에 가는 거 아니야! 나도 좀 사람들이랑 섞여 살아 보려고 그런다! 손가락질받으면서 걷는 거 지긋지긋해서! 야,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살고 싶어. 평범하게 대화도 해 보고 싶고, 친구랑 같이 걸으면서 수다도 떨어 보고 싶어.”

울음기 섞인 소녀의 목소리에 용의 목소리 역시 아까와 달리 한층 낮아졌다.

용은 조심스럽게 소녀에게 말했다.

“너한텐 내가, ……내가 있잖아.”

가슴이 콩콩 뛰었다.

나한테 네가 유일한 것처럼, 너한텐 내가 유일하고, 우리는 서로에게 완벽하잖아.

용은 천천히 소녀 쪽으로 걸어가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니까 가지 마.”

소녀의 검고, 하얀 두 눈에서 투명한 물줄기가 주륵 흘러내렸다.

“너밖에 없잖아. 너 하나뿐이야. 내가 평생 동안 얼마나 노력했는데. ……남은 거라곤 이 작은 칼이랑, 가방, 그리고 너뿐이야.”

소녀는 못 견디겠다는 듯 바닥에 주저앉아 얼굴을 감싸 쥐었다.

일으켜 주고 싶은데. 너를 내가 일으켜 줘서, 너의 유일한 무언가가 되고 싶은데.

용은 애처롭게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로는 안 돼?”

“그게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난 그냥, 남들처럼…… 가족도 있었으면 좋겠고, 친구들이랑 소풍도 가고 싶어. 나도 그렇게 살아 보고 싶단 말이야.”

외로움이 두 어깨를 짓누르는지 소녀는 한참을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울었다.

그러다가 또 언제 울었냐는 듯 거친 손으로 얼굴을 닦아 낸 소녀는 벌떡 일어서서는 긴 숨을 들이마셨다가 아주 천천히 내쉬었다.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고쳐 묶은 소녀는 용에게 무신경하게 말을 던졌다.

“넌 이 산을 가졌잖아. 위대한 용이고, 오래 살고, 나 아니어도 얼마든지 친구를 사귈 수도 있어. 근데 난 아니야. 우리 마을 사람들은 나랑 말도 안 섞어. 심지어 약초 상점 주인도 물건만 확인하고 매대 위로 돈을 던져. 내가 전염병을 옮기는 병자인 것처럼. ……그러니까 난 외지인들이 오는 축제 아니면 아무랑도 말 못 해. 이번이 기회야.”

해 질 녘이 되어 소녀가 산을 내려갈 채비를 시작하자 용은 괜히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산을 가졌다니. 나도 여기에 혼자 남겨진 건데.

그리고 ‘산’은 한 번도 내 것이 된 적이 없는데.

결국 어린 용은 마음에 있지도 않은 말을 쏟아 냈다.

“네가 약초를 팔면 팔릴 거 같아? 다른 마을 사람들이라고 해서 네 약초를 사 갈 거 같냐고!”

용의 분노에도 소녀는 그를 무시했다.

큰 천으로 머리를 감싸 턱 아래에 단단히 매듭을 묶었고 모자를 썼다.

얼굴이 드러나지 않도록 왼쪽의 천을 당겨 볼을 조금 더 가렸다.

“진짜 갈 거야? 축제를 며칠 동안 하는데? ……약초 하나도 안 팔리면 다 팔릴 때까지 계속 팔 거야? 그럼, 그러면 언제 다시 산에 올 건데!”

“안 와.”

“뭐?”

“안 팔리면 다른 곳으로 떠나야지. 네 말처럼 다른 마을 사람들도 나를 봐 주지 않으면 다른 지역으로, 거기도 안 되면 더 큰 산을 넘어서 또 다른 곳으로 갈 거야.”

소녀는 미련 없이 발걸음을 옮겼다.

처음 동굴에서 빠져나왔을 때처럼 당당한 걸음걸이였다.

“미안해. 산,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산, 다시 올 거지? 늘 만나던 그 언덕에서 해가 가장 높이 있을 때 만날 거지?”

사과를 들은 산은 뒤돌아보며 힘없이 웃었다.

“너한테 화나긴 했는데, 그것 때문에 떠나는 거 아니야.”

“그럼 왜 떠나는데?”

“여기엔 내 삶이 없잖아.”

“내가, 내가 네 삶이 될게. 내가…… 곁에 있을게.”

산은 그런 용을 가만히 보다가 천천히 답했다.

“그 누구도 다른 이의 삶이 될 수 없어.”

용에게 두어 번 손을 흔든 산은 후련한 걸음으로 터벅터벅 산길을 내려갔다.

홀로 남은 용은 산의 마지막 말을 이해하기엔 너무 어렸다.

그리고 그게 산이 마지막 말이 되었다는 걸 받아들이기에도 너무 어렸다.

산은 죽어서 산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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