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1화
뜬금없는 용의 말에 소녀가 되물었다.
“왜?”
“……다리 안 좋은데 여기까지 뛰어왔으니까 힘들 거 아냐. 난 뭐 그런 말도 못 해?”
“왜 만사에 삐딱해.”
소녀는 인상을 찌푸리긴 했지만 용의 말대로 동굴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물었다.
“이제 안 아파?”
“응.”
용은 늘 앉던 자리에 앉으려다가 아주 약간, 티 나지 않을 정도로만 소녀와 가까운 쪽으로 옮겨 앉았다.
그런데 소녀의 행동이 이상했다.
눈을 한 바퀴 굴렸다가, 동굴 천장을 바라봤다가 괜히 눈을 비비기도 했다.
‘……왜 그러지? 불편한가? 눈이 아픈가? 어두운가?’
곰곰이 생각하던 용은 동굴 안이 어두침침해서 그런 거라고 확신했다.
목을 울렁거리며 커다란 불을 쏴 동굴 안을 환하게 밝혔다.
하지만 그렇게 해도 소녀의 시선은 제자리로 돌아오지 않고 사방팔방으로 날뛰었다.
“……불편하면 나가든가.”
결국 뿔이 난 용이 투덜거렸다.
진심으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소녀는 진짜로 일어났다.
아무래도 정말로 여간 불편한 게 아닌 모양이었다.
용은 그제야 홧김에 뱉었던 말을 사과하지 않았단 걸 깨달았다.
하지만…….
성장통에 원하지도 않은 도움을 받은 건 사실이고…….
먼저 도와 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도운 건 쟤고…….
지금 그냥 조금, 아주 조금 심심해서 대화 상대가 있는 게 반가운 것뿐 꼭 사과를 해서까지 붙잡아야 할 만한 존재는 아니지.
용은 제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고개를 반대쪽으로 돌렸다.
갈 거면 가고, 남을 거면 남으라는 뜻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인간의 입장에선 영생에 가까운 삶을 사는 용인데, 내가 신기해서라도 더 보고 있고 싶겠지.
속으로 코웃음을 쳤지만 용의 짐작과는 달리 소녀는 정말로 갈 생각인 듯싶었다.
절뚝거리며 동굴 입구를 향해 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보며 용은 이상하게도 가슴 언저리에 불덩이가 앉은 듯 울렁이는 걸 느꼈다.
무슨 감정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심장이 몸 전체를 가득 채운 채 뛰고 있는 것 같았다.
벽을 오르기 전, 소녀가 마지막 인사를 하려는지 뒤도는 그때, 용은 참지 못하고 분노를 터뜨렸다.
“나 이만 갈.”
“왜! 왜 가는데, 왜! 내가 사과 안 해서 그래? 내가 언제 도와 달라고 한 적 있어? 네가 네 마음대로 내 입에 풀 쑤셔 넣었잖아! 약초들도 내가 가져오라고 그랬어? 네가 여기다가 두고 갔잖아! 네가 두고 간 약초 냄새가 몇 날 며칠이 돼도 안 사라져서 계속 네 뒷모습만 생각났다고! 그거 때문에 자꾸 네 생각 나고 신경 쓰이고 짜증 나는 거잖아! 아∼ 그래! 이제 알겠다. 너 때문이네. 네 체액이 내 성장통에 영향을 줬기 때문이구나. 그래서 내가 자꾸 네 생각이 나고! 혹시 다쳐서 다시 못 오는 건가, 동굴이 너무 추워서 감기라도 걸렸나, 아니면 전에 ‘다 나 등쳐 먹을 생각뿐이지.’라고 하던데 누가 심하게 괴롭히나, 그것도 아니면 내가 완전 싫어졌나. 그런 생각들만 줄줄이 하는 거네!”
“아, 아니……. 난 그냥…….”
“갈 거면 가! 아니, 가지 마! 네가 책임져야 되는 거 아냐? 적어도 네가 잘못한 일에는 반성하는 태도를 보여야지! 네가 이렇게 만들었잖아! 너 지금 가면 난 또 산 왔다 갔다 하면서 네가 올지 안 올지 기다릴 텐데, 넌 기다리는 내 생각은 안 해? 하긴. 했겠어? 네가 내 생각을 하긴 해? 뭐, 얼마나 봤다고 생각을 하겠냐마는. 하! 다른 사람들은 평생 용 못 봐서 환장을 하던데 너한텐 그냥 지나가는 짐승 한 마리로밖에 안 보이지? 어, 그래! 나 여기서 혼자 죽으면 술이나 담가 먹어라! 비늘도 떼서 팔고! 다 팔아!”
소녀의 낯빛이 변했다.
햇볕에 바싹 말라 죽어 가는 나무줄기 같은 볼품없는 얼굴임에도 새빨개진 걸 확연히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용은 자기가 무슨 말을 했는지조차 모른 채 씩씩거리며 소녀의 얼굴을 노려봤다.
“또 뭐가 불만이길래 표정이 그따위야!”
“말 좀 예쁘게 해! 잘생겼으면서 왜 말을 그따위로밖에 못 해!”
“넌 왜 나 잘생겼다면서 그냥 가는데!”
“이게 지금 무슨 소리야! 잘생겼어도 재수 없으면 갈 수 있지!”
잘만 떠들던 용이 입을 꾹 다물었다.
앙다문 입술이 파르르 떨리고, 용의 커다란 노란 눈동자가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이리저리 흔들렸다.
“……나 재수 없는 거 아는데 그래도 좀 쉬었다 갈 수도 있잖아.”
“그럼 말을 곱게 해. 좀 사근사근하게. 경계심 안 가지도록. 그렇게 화만 내고 말 싸가지 없게 하면 누구라도 도망가겠다.”
“……이렇게 해야 다들 시비 안 건다고.”
두 다리를 모아 안으며 용은 작게 투덜거리듯 대답했다.
예쁘게 말하라고 가르쳐 준 이도 없었거니와 사근사근하게 말해 봤자 만만하게 생각하는 놈들만 더 늘어날 뿐이었다.
소녀는 그런 용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그 자리에 쪼그려 앉으며 답했다.
“나도 그래. 딱 봐도 보이잖아. 네가 왜 너를 반쪽이라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날 봐. 누가 봐도 반쪽이잖아. 그래서 사람들이 나만 보면 피해. 옮는다고.”
씁쓸한 표정으로 살짝 미소 지은 소녀는 허름한 바지를 만지작거리며 덧붙였다.
“그래도 언젠가…….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그때는 진짜 아껴 줄 거야. 완전 소중하게 여기고, 내가 가진 것 중에 제일 귀한 것처럼 아낄 거야.”
막연한 미래를 꿈꾸며 소녀는 볼을 붉혔다.
“그리고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나 이거 전염병 아니야. 어릴 때, 아마 엄마겠지? 누가 날 폐수에 버려서 그래. 어떤 수녀님이 간신히 건지긴 했는데, 그때 크게 앓아서 몸 반쪽이 이렇게 된 거야. 안 옮으니까…… 너는 괜찮을 거야.”
용은 소녀를 힐끗 보다가 고개를 휙 돌렸다.
“그게 뭐 어때서. 인간이 용의 비늘을 가진 것처럼 멋지기만 한데. 회색 용은 강해. 서해 쪽에 가면 있어. ……다음에 같이 가면 내가 보여 줄게. 친하진 않지만, 어디 사는지는 알아.”
땅바닥만 뚫어져라 보느라 용은 미처 알지 못했지만 소녀는 두 귀를 빨갛게 물들인 채 애꿎은 제 옷만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소녀가 말했다.
“그리고, 아까 가려고 했던 건 네가…… 옷을 안 입고 있어서 그랬어.”
음?
내내 소녀에게 삐져 있던 용의 두 눈이 커졌다.
그는 저절로 시선을 움직여 제 아래를 내려다봤다.
으음……?
소녀는 고개를 돌려 동굴 입구를 바라보며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그, 용이니까, 물론, 위대한 용이라는 건 나도 알지만, 알아. 사람들이 다 칭송하고, 응. 알지…… 근데 지금은 사람 모습이라서 조금 그래. 어, 많이 그래.”
용은 몸을 돌려 소녀 쪽으로 완전히 돌아앉았다.
모으고 있던 다리까지 활짝 편 채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나 인간 모습 별로야?!”
용이 돌아앉는 소리에 무심코 시선을 내렸던 소녀가 얼른 고개를 쳐들었다.
“아니야! 아까 말했잖아! 잘생겼다고!”
“근데 왜 그래? 뭐가 조금 그렇다는 거야? 말을 똑바로 해. 우물거리지 말고.”
“네, 네 다리가 조금 그래.”
“다리가 왜?”
“그 다리 사이가 조금…….”
소녀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빌어먹게도 동굴은 아직 용이 쏜 불꽃으로 인해 과하도록 환했다.
“내 다리가 흉해? 인간치고는 너무 매끈거려서 그런가. 나도 비늘이 있는 쪽이 좋긴 한데.”
용은 두 다리를 앞으로 쭉 뻗었다.
소녀가 냉큼 뒤돌았다.
“또 어디 가려고!”
“옷 좀 입어, 제발!”
“옷? 너처럼 그런 천으로 만들어진 걸 입으라고? ……불편해 보일뿐더러 그다지 좋아 보이지도 않는데.”
“내 옷이 좋은 옷이 아니라서 그래. 아니면 차라리 용으로 있든가.”
“그건 싫어.”
“왜?”
왜인지는 말할 수 없었다.
정확히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소녀와 비슷한 나이 또래로 보이며, 비슷한 생김새를 가진 지금이 더 좋았다.
인간의 피가 흐르는 반쪽 용이라 그런 걸까?
하지만 대부분의 용은 인간화를 할 수 있는걸.
더 연습하면 다른 파충류로도 변신할 수 있고.
마음 안에서 어떤 대답도 찾지 못해 용은 조용히 고민만 곱씹었다.
그동안 소녀는 제 셔츠를 벗어 용에게 던졌다.
“이거로 좀 덮어.”
“왜? 민소매 차림으로 있기엔 추워 보이는데 네가 입지.”
“너 때문에 하나도 안 추우니까 괜찮아.”
“아. 내가 불을 쏴서 그런가? 필요하면 말해. 나 너 없는 동안 연습 많이 했거든. 다시 왔을 때 네가 또 춥다고 할까 봐.”
“민망해서 몸에 열이 훅 올라서 안 춥다고 말한 거였는데.”
“인간은 민망하면 몸에 열이 오르나?”
아랫도리를 덮지 않으면 소녀가 그대로 떠날 것 같아 용은 그가 준 셔츠로 일단 아래를 덮었다.
그제야 소녀가 시선을 마주쳐 왔다.
소녀의 오른쪽 눈은 끝도 보이지 않을 만큼 깊은 호수처럼 시커먼 검은색이었다.
제 머리색과 똑 닮은 색이라 용은 살짝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내가 가방이랑 바구니 돌려줄게.”
“당연히 돌려줘야지. 원래 내 거잖아.”
용은 소녀의 말을 무시하고 제안했다.
“대신 내 성장통에 영향을 준 거 책임져.”
“뭘 얼마나 큰 영향을 줬다고 자꾸 그래.”
“네가 끼어들어서 뭔가 잘못된 거야. 그게 아니고서야 내가 이렇게 될 리가 없어.”
인간이 제 곁을 비우고 가 버리는 게 이렇게 서운할 리 없었다.
이 마른 여자애는 가족도 아니고, 시끄럽기만 한데.
저 검은 눈에 비친 제 모습이 어떨지 궁금했고, 작은 머리 안에서 저를 어찌 생각하고 있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호기심과 기대감에 흠뻑 젖은 용과는 달리 소녀는 실의에 빠진 표정이었다.
“나 때문에 네가 아파도 나는 도와줄 수 있는 게 없는데…….”
용은 잠깐 생각했다.
내가 아픈가?
그래, 이건 병이었다.
왜 지난 며칠 동안 산을 몇 번이나 내려갔다 왔는지.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이 작은 체구의 여자애 생각에 몇 번이나 심장이 콩콩 뛰었는지.
이 동굴이 왜 평소보다 넓게 느껴졌는지.
병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었다.
소녀는 옷깃을 만지작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나 돈 없어. 하루 벌어서 하루 먹고살아. 게다가 며칠 산 못 타서 지금 거지야. 원래 알거지긴 하지만 아무튼 요 며칠은 진짜 그래.”
“말이 많아. 내가 비싼 약초 다 찾아 놨어.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마.”
소녀가 거절할 의사를 넌지시 내비치자마자 공격적으로 말을 내뱉은 용은 노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내 병이 다 나을 때까지, 이 독이 몸에서 빠져나갈 때까지는 넌 계속 이 산에 와서 날 만나야 돼. 알았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소녀가 매일 자신과 눈을 마주쳐 주지 않으면 성장통과는 다른 고통이 찾아올 것 같았다.
소녀는 다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이후, 용은 소녀가 산에 오를 때마다 그녀를 찾아다녔다.
용 기준에선 소녀가 동굴로 걸어오는 속도가 너무 느려 기다릴 수가 없었다.
용은 다행히 땅을 울리는 진동의 차이로 소녀가 산에 나타난 걸 알 수 있었다.
가끔 다른 인간 놈들이 이 험한 산에 나타나긴 했지만 구별할 수 있도록 매일 연습한 덕에 헷갈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소녀가 앞서 걸을 때면 그녀의 걸음걸이와 진동의 크기를 기억해 뒀다가 혼자 있을 때 내내 곱씹었다.
걸을 때 통통 흔들리는 갈색 머리카락과 나무를 쓸고 지나가는 작은 손, 이젠 발목이 다 나아서 빠르게 땅을 박차듯 앞으로 나가는 힘찬 걸음걸이.
젖은 흙냄새를 담은 손끝의 향기와 머리카락 끄트머리에서 풍기는 짙은 나무 냄새.
소녀가 산의 어디로 들어오든 알 수 있도록 산 전체로 범위를 넓혀 후각과 청각을 집중하는 법도 익혔다.
하지만 몇 달이 지나도 가슴의 독은 빠지질 않았다.
여전히 소녀를 볼 때면 가슴이 뛰었고, 새카만 오른쪽 눈과 하얀 왼쪽 눈을 볼 때면 손끝 발끝이 간질거렸다.
용의 비늘을 닮은 멋진 피부를 만져 보고 싶었고, 작고 도톰한 입술에서도 산의 향기가 날까 궁금했다.
“……넌 이름이 뭐야.”
용의 질문에 약초를 찾느라 숙이고 있던 허리를 편 소녀가 활짝 웃으며 대답했다.
“몇 달 만에 물어보네. 난 이름은 딱히 없고 사람들은 날 그냥 작은 산이라고 불러. 맨날 산을 타니까 그런가 봐.”
산.
나의 작은 산.
용은 소녀의 이름을 조용히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