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작은 정령은 말을 채 끝마치지 못하고 내 눈앞에서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정령아?”
사라진 정령을 불러도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이제껏 불러도 오지 않은 적은 많았지만 지금처럼 말을 하다가 중간에 사라진 적은 없었다.
“얘들아! 얘들아!”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갑자기 심장이 찢어질 듯 아려 왔다.
내 몸을 가득 채우고 있던 아무스의 마력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안, 안 돼…….”
곧장 검은 공간을 열고 그곳으로 발을 들이려는데 그레이가 나를 붙잡고 돌려세웠다.
“솔레아! 기다려!”
“뭘 기다리라는 거야! 너도 들었잖아! 이달론이 살아 있어! 심지어 돈의 몸을 이용해서 사람들을 해치고 있잖아!”
“그러니까 기다리라고!”
내 손목을 붙잡은 채 망설이던 그레이가 겨우 입을 열었다.
“……지금 아마 다른 사람들이 이달론을 잡기 위해 출발했을 거야. 위험하니까 기다려. 조금만 기다리면 아무스가…….”
“왜 자꾸 기다리라고만 하는 거야!”
“네가 지금 가면! ……아버지랑 우리는 또 가족을 잃는 거야. 제발, 지윤아. 레아, 제발……. 우리한테 널 지킬 기회를 줘.”
그레이의 회색 눈에 맑은 물방울이 차올랐다.
하지만 그레이가 말하고 있는 와중에도 내 몸을 가득 채웠던 아무스의 마력은 조금씩 빠져나가고 있었다.
이 가족을 지킬 기회가 매 순간 줄어들고 있다는 생각에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나는 나를 붙잡고 있던 그레이의 손을 떼 내고 나지막이 말했다.
“나도 똑같아. ……가족을 잃고 싶지 않아. 버티기만 하는 건 이제 지긋지긋해.”
그대로 몸을 돌려 안으로 뛰어들었다.
“솔레아!”
나를 따라오는지 그레이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지만 지금은 그를 챙길 정신이 없었다.
이 검은 공간을 지나갔을 아무스의 남은 흔적을 쫓아야 했다.
“아무스! 아무스!”
그를 부르며 무작정 앞으로 뛰어갔지만 걸음을 뗄 때마다 아무스의 기운은 조금씩 사라졌다.
“……내가 부르면 온다고 했잖아! 아무스!”
그의 마력이 사라질수록 공간 안에서 방향을 가늠하기 힘들어졌다.
“솔레아! 어디 있어! 혼자 가지 마! 솔레아!”
내 이름을 부르던 그레이의 목소리가 어느 순간 멀어졌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그레이의 목소리가 완전히 들리지 않게 되고서야 내가 이곳에 온전히 혼자 남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레이?”
걸음을 멈추자마자 몸이 아래로 천천히 떨어졌다.
아닌가? 어딘가로 올라가고 있는 건가?
……그것도 아니면 그저 떠다니고 있는 건가?
그때 무언가가 내 옆에서 반짝였다.
정령들이 아무스의 마력으로 만들어 준 검이었다.
오른손에 검을 쥐고 있다는 것조차 까먹을 정도로 온몸이 긴장한 상태였다.
이 검에 담겨 있는 마력은 아직 다 빠져나가지 않은 듯했다.
검을 더 꽉 말아 쥐자 아무스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할 수 있어. 넌 해낼 거야.’
‘너를 일으키는 건 언제나 너 자신이야.’
‘너는 네 힘으로 뭐든지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널 믿어.’
‘날 믿고, 널 믿어.’
마치 아무스가 내 등 뒤에 서 있는 것 같았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검은 공간 안에서 일순간 그의 온기가 느껴졌다.
그는 내 뒤에 선 채로, 검의 손잡이를 잡고 있는 내 손을 겹쳐 잡으며 내게 확신을 불어넣어 주었다.
‘넌 뭐든지 할 수 있어.’
그제야 알았다.
왜 아무스가 내게 습관처럼 그런 말들을 해 왔는지.
아침에 후원을 걸을 때, 앞서 걷는 내 걸음걸이를 따라 하며 걸을 때, 내가 뒤돌아보고 우리의 두 눈이 마주칠 때, 네가 입꼬리를 올려 반달 모양으로 활짝 웃으며 보폭을 넓혀 내 옆으로 올 때, 나란히 걸으며 소소한 이야기를 나눌 때, 저택에서도, 밖에서도, 내가 기억을 잃었을 때도, 내가 나를 다시 찾았을 때도.
너는 항상.
곪아 터진 내 속이 이 새카만 어둠을 닮은 걸 알고서도 도망가지 않고, 내게 스스로 빛날 수 있다고 말해 줬구나.
나는 숨을 가다듬고 천천히 읊조렸다.
“……그래, 난 뭐든지 할 수 있어.”
그 순간 내게서 뿜어져 나온 빛이 시커먼 공간을 환하게 밝혔다.
모든 시간과 공간이 교차하고 있는 듯 내가 지나온 시간들이 마구잡이로 얽혀 사방팔방에서 나를 스쳐 지나갔다.
한 줄기씩 들여다보면 내 추억들이 보였다.
“……나 이제 보여, 아무스. 이젠 내가 널 찾을 수 있어.”
검의 끝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의 흐름도 보였다.
“솔레아! 어디 있어!”
아까는 전혀 들리지 않았던 그레이의 목소리도 들렸다.
전에는 검은 공간에서 내 감으로 길을 찾아서 걸어 다녔던 거라면 이젠 훤히 눈에 들어와 알 수 있었다.
그레이가 디디고 선 추억은 공작부인이 죽은 그날이었다.
‘그레이. 울지 마. 괜찮아. 엄마 이제 하나도 안 아파.’
‘엄마. ……안 아프면 그냥 눈 안 감으면 안 돼? 눈 뜨고 계속 안 자고 있으면 되잖아. 그럼 안 죽잖아. 어? 엄마. 엄마…….’
‘……우리 아들. 착한 우리 아들.’
에일린 공작 부인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는 장면이 되풀이될수록 그레이의 목소리에는 더 짙은 공포가 서렸다.
“솔레아! 어디 있냐고! 솔레아! 혼자 가지 마! 솔레아!”
내가 바로 앞에 서 있는데도 그레이는 나를 보지 못하는 것처럼 목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또다시 가족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그를 어둠에 가두고 길을 잃게 만든 모양이었다.
“그레이. 나 여기 있어.”
그레이의 손을 잡고 잡아당겼다.
놀란 눈으로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레이는 잠깐의 침묵 후 말했다.
“그래. ……가자.”
그와 함께 검의 마력이 흐르는 방향을 따라 걸었다.
여러 추억들을 지나 밖으로 향하는 틈을 찾아 열어젖히자마자 누군가의 끔찍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으아아악!”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괴기스러운 비명 소리였다.
늘 한 단어씩 떼어 말하던 차분한 돈의 목소리 같으면서도, 어딘지 모르게 아무스와도 닮아 있었다.
하지만 끊이지 않고 질러 대는 비명 소리 어딘가에 서려 있는 묘한 웃음기는 둘 중 누구의 것도 아니었다.
이달론의 것이었다.
“하하아아아하학!”
“아무스! 돈!”
쏟아지는 마력이 아지랑이처럼 퍼져서 아무스와 이달론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솔레아. 오지 마. 가.”
“아무스!”
휘어지는 공간 속에서 그들은 세 사람처럼 보이기도 하고, 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아무스는 휘청거리며 제 뒤에 붙어 있는 돈을 떼어 내려 몸부림쳤다.
돈은 입을 찢어져라 벌린 채 소리를 지르다가 뚝 멈췄다가 다시 소리를 지르다 환희에 가득 찬 얼굴로 웃기를 반복했다.
“으아아악! ……아가씨! 아가씨! 도와주, 아악! ……하하하하하학! 으히히힉!”
돈의 두 눈은 고통에 젖어 울고 있는데 입은 활짝 웃고 있었다.
그는 아무스에게 들러붙어 한 손으론 목을 조르고, 다른 한 손은 아무스의 벌어진 상처 틈에 집어넣어 헤집으며 기이한 목소리로 계속해서 말했다.
“키히히힉. 나도 이제 영원히 살, 살려 줘. 아가씨. 살려 주세요. 히히. 이름이 두 개면, 영혼을 나눌 자리가 하나 있다는 거야.”
이달론은 돈의 가죽을 쓴 채로 아무스의 마력을 모두 뺏을 작정이었다.
전에 나를 이용하려고 했다가 실패했으니, 이번엔 본인이 직접 하려는 거구나.
단번에 날려 버리고 싶었지만 아무스의 마력이 흔들리는 탓에 섣불리 공격했다간 아무스가 크게 다칠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이미 역린을 찔린 상황인데.
그때 어딘가에서 날아온 공격에 아무스를 둘러싸고 있던 아지랑이가 잠시 걷혔다.
공작님이 검으로 돈의 머리를 통째로 베기 위해 가까이 다가간 것이었다.
아주 잠깐 동안 시야가 선명해진 틈을 놓치지 않고 공작님은 빠르게 공격을 이어 갔다.
“이달론!!”
살기를 띤 공격을 알아챈 이달론이 몸을 틀며 공격을 피하려 했지만, 원래 몸의 주인인 돈이 버텼는지 검을 완전히 피하진 못했다.
돈의 왼쪽 윗부분 머리 살점이 날아갔다. 홍수로 범람하는 강처럼 피가 온몸을 적시는데도 돈의 입은 웃고 있었다.
“으햐하학! 아악! 살려 주, 하학! 살 수 있지! 조금만 더! 영원히! 히히힉!”
공작님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그들과 몇 발자국 떨어진 상태에서 틈이 보이는 대로 공격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달론을 공격하기 위해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갈수록, 이달론의 마법은 강해졌다.
평범한 인간인 디에르고 공작님이 용의 마력을 흡수한 이달론의 마력을 받아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눈을 한 번 깜빡일 때마다 공작님의 새빨간 피가 사방으로 솟구쳤다.
검을 세워 공격을 막아도 충격 때문에 벌어진 몸의 상처에서 피가 역류하듯 튀었고, 공격을 막지 못하면 새로운 상처가 생겨났다.
“아빠!”
“오지 마라! 그레이, 솔레아!”
공작님은 피범벅이 된 오른쪽 눈을 감은 채 검을 고쳐 잡고는 우리에게 소리쳤다.
오른쪽 얼굴을 가로지른 커다란 상처에서 시뻘겋고 끈적한 피가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 않은 채 검을 고쳐 쥐고 아무스의 등 뒤에 붙어 있는 돈에게 검을 휘둘렀다.
머리 한쪽이 날아간 돈은 눈동자를 빙그르르 돌리며 히죽 웃었다가 시선을 공작님에게로 고정했다.
“아빠! 피하세요!”
나는 곧장 팔을 뻗어 공작님 앞에 마력으로 방어벽을 세워 막았지만 역부족이었다.
아무스의 마력을 흡수하고 있는 이달론의 마법은 내 방어벽을 손쉽게 깨부쉈다.
창처럼 날이 선 마법은 곧장 공작님의 심장을 향했다.
몇 번이나 다시 마법을 써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방어벽을 모두 깨부순 이달론의 마법이 공작님의 심장을 꿰뚫기 직전, 앞으로 뛰어나간 그레이가 검을 이용해 이달론의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 냈다.
아무스의 마력이 거의 빠져나간 내 몸과는 달리, 그레이의 검은 아직 효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두 개의 마력이 부딪치는 순간 그레이의 검이 산산조각 났다.
쾅 소리와 함께 일어난 폭발에 내 몸은 뒤로 날아갔다.
시야를 가리던 흙먼지가 겨우 가라앉자 바닥에 쓰러진 공작님과 그레이가 눈에 들어왔다.
온몸이 피에 젖은 공작님은 시체처럼 꼼짝도 하지 못하셨고, 그레이 역시 기절한 듯 미동조차 없었다.
“히히. 크히히.”
장난스러울 정도로 가벼운 웃음에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얼굴은 내가 아는 돈이었다.
피에 절어 있긴 하지만 분명히 내 앞에서 날 향해 수줍은 듯 미소 짓던 돈의 얼굴이었다.
그 얼굴이 나를 향했다.
“네가 죽인 그 몸 말이야. 그 몸도 사실 내 몸이 아니었단다. 어느 왕자의 몸이었는데. 그 사람도 너처럼 ‘건너온 자’였어. 다시 못 돌아갔지. 크하하학. 네 껍데기도 곧 내가…….”
그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온갖 마법을 다 쏟아부었다.
하지만 그 어떤 마법도 통하지 않았다.
정령들의 검까지 휘둘렀지만 아무스의 마법을 대부분 흡수한 이달론에겐 닿지 않았다.
내 마력이 아무스의 마력이니 이달론에게 통하지 않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때 돈의 머리에서 빠져나온 축축한 녹색 영혼이 흘러내린 촛농처럼 목을 쭉 늘리더니 춤을 추듯 공중에서 너울거렸다.
이달론의 영혼이 나를 향해 돌진하는 순간 검을 힘주어 말아 쥐었다.
이달론의 영혼과 내 검이 맞부딪치기 일보 직전, 아무스가 순식간에 용으로 변했다.
새카만 비늘이 온몸을 뒤덮고 작은 저택은 한 번에 으스러뜨릴 것만 같은 커다란 네 발이 땅을 긁었다.
벌어진 입 사이로 날카로운 이빨이 번뜩였다.
그가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숨을 거칠게 몰아쉴 때마다 주변의 풍경이 뒤바뀌었다.
울창한 숲속이었다가 모래로 가득 찬 사막이었다가 드넓은 들판 한 가운데에 서 있기도 했다.
그러다 마침내 사방이 시커먼 검은 공간으로 바뀌었을 때, 아주 잠깐의 적막이 찾아왔다.
그 짧은 순간 아무스의 노랗고 아름다운 두 눈과 마주쳤다.
“괜찮아.”
무슨 뜻이냐고 되물을 틈도 주지 않고 검은 공간은 공작님과 그레이, 나를 밖으로 밀어 낸 뒤 순식간에 닫히고 말았다.
“……아무스?”
나는 베르고 공작저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나를 둘러싼 공기와 서늘한 가을바람, 주변 사람들의 비명과 피 냄새까지 모든 것이 생생한데, 다 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한데.
아무스는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