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7화 (137/192)

137화

* * *

‘날 믿고, 널 믿어.’

아무스의 마지막 말과 묘하게 굳어 있던 표정이 잊히질 않았다.

왜 갑자기 그런 얘길 했지?

불안한 마음에 손톱의 거스러미를 쥐어뜯기 시작하자 그레이가 황녀에게 말을 걸며 내 손을 덥석 쥐었다.

“전하, 궁에 가면 제 방은 어느 걸 주실 겁니까?”

“그레이 자네는 동생 옆 방.”

“그럼 제 동생 방은 어느 걸 주실 건데요?”

“영애는 내 궁에서 제일 좋은 방을 써야지.”

“제일 좋은 방은 전하 방이잖……. 아, 뭐야! 차 돌려!”

“하하하! 집엔 자네만 가지 그래! 난 영애랑 같이 방을 쓰겠다!”

“솔레아는 절대 안 됩니다, 전하. 지금도 얘한테 온갖 머리 쓰는 일들을 시키고 싶어서 드릉드릉하시는 게 눈에 훤히 보이는데 무슨. 차라리 저랑, 아 무슨 얘길 하는 거야. 미친 새끼!”

황녀의 말에 반박하던 그레이는 자신의 말실수를 깨닫고는 갑자기 오른손을 들어 제 뺨을 후려갈겼다.

다행히 황녀는 그레이의 그러한 기행을 기이하다 여기지 않는 듯했다.

카라샤펠은 비릿한 미소를 지은 채 손을 들어 그레이의 뺨을 한 대 더 쳤으니까.

“……전하는 저 왜 때리세요?”

“자네가 나와 한방을 쓰고 싶다는 과분한 꿈을 꾸기에. 건방지잖아.”

“……아니, 그래서 제가 지금 반성하는 의미로 제 뺨을 쳤잖아요. 아무런 뜻도 없었고, 생각 없이 말한 저를 제가 혼냈다고요.”

“나도 혼낸 거야.”

“……전하. 저도 우리 아빠 귀한 자식이에요.”

“귀하기로 따지면 황제 폐하 다음이 나다. 이 제국에서 내가 두 번째로 귀한 사람이야.”

“……폐하한테나 귀하겠지.”

“뭐라고?”

황녀님과 그레이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서로를 타박하며 말을 나누고 있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그래, 쎄했다.

내 손을 잡고 있는 그레이의 손바닥이 약하게 떨렸다.

얘가 어지간해선 떠는 애가 아닌데 갑자기 왜 떠는 거지?

문득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그런 나를 발견한 황녀가 얼른 그레이에게 말을 걸었다.

“이봐, 공자. 겁이 왜 그리 많아. 바들바들 떨고 있네. 안 잡아먹어.”

아, 쎄한데.

랏샤가 눈치가 빠른 사람이란 건 원래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레이가 떠는 걸 알아챘겠지. 그러니까 놀린 거고.

……근데 그레이가 떨 이유가 있나? 아무리 황녀 전하가 꺼림칙해도 지금껏 몇 번이나 얼굴을 봤고, 소풍에 같이 가자고 부른 것도 본인이면서.

이렇게 극혐할 정도로 싫어하진 않을 텐데.

뭐라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모호한 ‘쎄’의 기운이 나를 감쌌다.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나도 모르게 자꾸만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가 천천히 내쉬었다.

내 상태를 눈치챈 그레이가 황녀에게 말을 걸었다.

“전하, 바로 궁으로 가지 마시고 시장에라도 들렀다 가시는 게 어떠십니까? 제 동생이 밖에 나온 게 오랜만이라서요.”

“오! 좋은 생각이군! 정적이 차고 넘쳐서 매일 피살의 위험을 안고 사는 내게 사람이 많아 나를 지키기 어려운 시장에 놀러 가자니. 날 죽이려는 생각이라면 아주 좋아.”

“그런 의미 아닙니다. 아니, 그리고 호위 기사들도 방금 다 따라붙었잖아요!”

“이제 기사들의 기운도 느끼나? 어차피 솔레아가 호위 기사로 임명도 안 해 주는데 그냥 황궁 기사단에 들어오지 그래?”

“싫습니다. 레아, 시장 갈까?”

카라샤펠 황녀의 스카웃 제의를 단번에 거절한 그레이는 내 손을 꾹꾹이 하듯 힘주어 쥐었다가 놓길 반복하며 말을 걸었다.

그냥 빨리 궁으로 가 쉬고 싶은 마음에 거절하려 고개를 젓는데 그레이의 검이 눈에 들어왔다.

시장의 그 할머니.

용의 존재를 알고 있는 듯했지.

“그레이! 시장으로 가자!”

나는 황녀와 그레이의 대답도 듣지 않고 마부와 통하는 마차 내부의 작은 창을 열었다.

“아저씨! 시장이요! 베르고 중앙 시장이요! 입구에 세워 주세요! 빨리. 더 빨리 마차를 몰아 주세요!”

“예!”

마부는 말의 고삐를 당기며 마차의 속도를 올렸지만 온 땅을 울리며 달리는 말들의 말발굽 소리가 무색하게도 나는 시간이 갈수록 더욱 초조해졌다.

이젠 그레이가 잡고 있는 손뿐만 아니라 온몸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솔레아, 너 왜 그래? 괜찮아?”

“어, 괜찮아. 걱정 마. 괜찮아. 뭐 하나만 확인해 보고.”

이윽고 마차가 시장 입구에서 멈추자마자 나는 문을 박차고 밖으로 뛰어내렸다.

“솔레아!”

“영애!”

뒤에서 나를 부르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돌아보지 않고 앞으로 달려갔다.

마력을 이용해 사람들을 옆으로 조금씩 이동시키자 내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악!’, ‘으억!’, ‘방금 누가 나 밀었어?’ 하고 소리쳤지만 그런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레이와 함께 갔던 무기 상점의 간판이 보이자마자 그곳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어디에도 노파는 보이지 않았다.

“사장님! 헉, 사장님!”

“네∼ 나가요.”

여유로운 대답과 함께 사장이 등장했다.

“사장님! 저, 몇 달 전에 오빠랑 여기 왔었는데요. 헉, 저, 베르고요. 베르고의 공녀 솔레아. 헉. 그때, 왜, 할머니가! 오빠한테 검을 줬는데, 헉.”

숨을 헐떡이며 말하는 나를 바라보는 사장의 입이 점점 벌어졌다.

내가 엉망으로 말을 뱉어 내는 동안에 나를 알아본 모양이었다.

“공녀님! 이 누추한 곳에 어쩐 일로 오셨어요!”

“그 할머니 어디 계세요? 사장님 어머니요. 여쭤볼 게 있어요!”

가게 안의 커다란 의자 위엔 뜨개질 상자가 놓여 있었지만 먼지가 쌓인 걸 보니 최근엔 사용하지 않은 듯했다.

사장은 내 질문에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녀님. 저희 어머니는 한 달 전에 돌아가셨어요. 워낙, 연세가 많기도 하셨고…….”

“아……. 죄송합니다. 상심이 크셨겠어요.”

“……잘 추슬러야죠. 괜찮습니다. 오히려 저희 어머니를 기억해 주셔서 감사하네요. 하하…….”

사장은 제 팔을 만지작대며 힘없이 웃었다.

그때 상점의 문이 벌컥 열리고 황녀를 짐짝처럼 어깨에 짊어진 그레이가 안으로 들어왔다.

“야! 너 미쳤냐! 왜 혼자 뛰어가!”

“……너를 죽이겠다, 그레이.”

“아이고, 죄송합니다, 전하. 전하께서 달리는 속도가 워낙 느리셔서 어쩔 수 없이.”

그레이가 얼른 카라샤펠을 바닥에 내려 주었다.

사장은 갑자기 들이닥친 황녀와 그레이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건넨 후 다시 내게 물었다.

“그런데 공녀님, 저희 어머니는 왜 찾으세요? 그때 드렸던 검에 무슨 문제라도 있나요?”

“아뇨. 그게 아니라……. 그때 어머님께서 용을 직접 봤다고 하셨는데, 그 이야기가 듣고 싶어서 찾아왔어요.”

“아, 그거요?”

사장은 추억에 젖듯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기름이 묻은 제 손을 앞치마에 슥슥 닦고는 이어 말했다.

“사실 그거, 어머니도 다른 사람한테 들으신 얘기예요.”

“……직접 겪으신 게 아니라요?”

“네.”

추억에 젖듯 웃음기를 살짝 머금은 사장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냈다.

“엄마가 어릴 때, 어떤 여행가가 검은 용의 전설이라면서 얘기해 줬대요. 이 세상엔 잠들어 있는 검은 용이 있다고. 용을 잡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달려들었고, 그중 누군가가 비늘을 뽑아 검을 만들었다……. 하지만 용은 아직 죽지 않았고, 어딘가에서 조용히 잠을 자고 있다. 누군가가 깨워 주길 기다리고 있다, 그런 내용이요. 애들이 좋아할 만한 이야기죠. 저 어릴 때도 엄마가 저 재운다고 몇 번이나 얘기해 주셨어요. 그러다 나이가 드신 이후론 마치 그 일을 본인이 겪으신 것처럼 말씀하셨고요. ……허무맹랑한 옛날얘기죠. 하하하.”

“아……. 그렇군요.”

직접 겪으신 게 아니구나. 살아 계셨다 한들 아무런 답도 얻을 수 없었겠네.

실망한 내가 가게를 나서려는 찰나 사장이 작은 목소리로 의아하다는 듯 말했다.

“……용 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네요.”

나는 재빠르게 몸을 돌려 사장의 코앞까지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 말고도 누가 또 용 얘기를 물어봤어요?”

당황한 사장은 눈동자를 빠르게 굴렸다.

“얼른 대답해요!”

“고, 공녀님. 정말 별 얘기 아니었어요. 그냥 가게에 오신 어떤 젊은 남자분이 저희 엄마가 중얼거리는 얘기를 들으시더니…… 더 자세히 얘기해 달라고 하셔서 말 상대 몇 번 해 드린 것밖엔.”

“……젊은 남자? 혹시 어떻게 생겼어요? 초록색 머리였어요?”

“솔레아, 왜 그래. 이만 가자.”

“이거 놔! 그레이!”

그레이는 내 어깨를 잡아 돌리며 사장을 닦달하듯 묻는 나를 만류하려 했지만 나는 가슴속에서 들끓는 불안 때문에 돌아 버릴 지경이었다.

아까부터 심장이 지끈거리며 쿵쿵 뛰고 온몸의 혈관들이 제각기 소리를 지르는 것 같았다.

그레이를 밀쳐 내고 다시 사장을 붙잡았다.

하지만 그녀는 내가 흥분한 이유를 몰라 당황한 듯 고개를 천천히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니요, 초록색 머리는 아니었어요. 검은색 머리였던가? 약간 푸른 기가 돌았던 거 같기도 하고…….”

이달론이 아닌가? 내가 너무 예민했나?

그래, 내가 직접 죽였는데 살아 있을 리 없지. 아닐 거야.

“아! 남색 머리칼에 검은 눈동자를 가지신 분이었는데, 엄청 잘생기셔서 기억이 나요. 근데 열심히 훈련을 받은 기사님이신지 손이랑 팔에 흉터가 유난히 많더라고요. 아닌가? 검을 쥐는 법도 모르셨으니 기사님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억을 더듬던 사장이 박수를 짝 하고 치더니 말을 덧붙였다.

“참. 꼭 무슨, 수갑이라도 오래 차고 있던 사람처럼 양 손목에 큰 흉터가 있었어요. 노예처럼 보이진 않았는데. 혹시 범죄자인가요?”

사장을 붙잡고 있는 내 두 손이 덜덜 떨려 왔다.

검은 머리, 남색 눈, 자잘한 흉터들과 두 손목에 남은 수갑 자국. 돈이었다.

……돈이 왜?

나는 곧장 허리춤의 검을 꺼내 크기를 키웠다. 순식간에 가게 안의 공간을 찢고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레이와 황녀가 나를 뒤따르려 했지만, 나는 그들이 오지 못하도록 재빨리 공간을 닫았다.

무의 공간 안에서 또다시 마력을 이용해 공간을 접고, 또 접으며 접점을 만들어 순식간에 퀘들턴에 도착했다.

“헉, ……헉, 흐, 헉.”

목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갈증과 손끝과 발끝이 해진 것처럼 쓰라린 고통은 수백 년 동안 홀로 조금씩 사라져 가던 그때와 닮았다.

하지만 이렇게 정신을 빼 놓고 있을 순 없었다.

“돈! 문 열어! 돈!”

내가 마련해 준 돈의 집.

붉은 벽돌로 지어진 아름다운 그곳엔 아무도 살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는 이달론의 사람이었던 건가?

“돈! 문 열라고! 안에 있으면 문 열어, 이 미친 새끼야! 문 열어!”

‘본명을 쓰긴 좀 그래서 집주인의 이름이 던이라고 말해 뒀어. 비슷하지?’

머릿속에서 내가 그에게 했던 말이 스쳐 지나갔다.

아니야. 내 잘못이야.

내가 돈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 줘서 그래.

나는 다시 검으로 공간을 가르고 몇 번이나 어둠을 접어 무기 상점으로 되돌아갔다.

“……하……. 우, 욱!”

“솔레아!”

디디고 선 바닥이 흔들리는 것 같은 느낌에 휘청거리자 그레이가 손을 뻗어 나를 붙잡았다.

“어디 갔다 온 거야? 솔레아?”

“다들 알고 있었지? 아까 그 들판에서 뭔가 본 거야. 그래서 나만 모르게 하고 몰래 안전한 곳으로 빼돌리려고 한 거지?”

그레이와 카라샤펠을 노려보며 이를 악물고 물었다.

그들은 답이 없었다.

“당신 어머니가 그자에게 뭐라고 말했어요? 우리한테 해 준 얘기를 똑같이 얘기했어요?”

“그, 그, 그냥 평소처럼 용의 전설에 대한 얘기를…… 하다가, 아! 그 용의 역린에 대해 얘기해 줬어요. 남자가 용에 대한 다른 얘긴 없냐고 엄청 캐물어서……. 그제야 그 남자가 박수를 치면서 엄마한테 고맙다고, 덕분에 즐거웠다고 인사를 했고…….”

역린.

이달론이 아무스의 역린을 알고 있다.

온몸의 피가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에 빠르게 돌아서려는데 정령 하나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다.

“임시 주인! 제발! 도와……줘…….”

정령의 죽음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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