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4화 (124/192)

124화

이달론으로 인해 자아를 잃었다가 다시 찾는 과정에서 솔레아는 아무스와 많이 친해졌다.

그래서 용을 타고 하늘을 나는 것쯤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마력으로 제 주변을 둘러싸 그리 춥지도 않았고, 적당한 바람만 통하도록 해 오히려 시원하기도 했다.

근데 앤에게는 아니었나 보다.

“흐그아아악! 아갓쒸!”

“앤. 좀 조용히 가자.”

솔레아의 허리를 터뜨릴 듯 붙잡은 앤은 눈을 떴다가 도로 질끈 감았다가 굳이 다시 뜨길 반복했다.

“너무, 너무 높아요! 아가씨!”

“응, 높지.”

“흐, 어어, 으어어. 만약, 만약에 떨어지면, 떨어지면요? 만약에요. 네? 아가씨!!”

솔레아는 잠깐 고민했다.

아까 앤의 집에서처럼 얘 입을 막을까.

아니야. 그래도 그건 좀 아니지.

한숨을 푹 내쉰 솔레아는 제 허리를 졸라 죽일 것처럼 안고 있는 앤의 손을 차분히 다독이며 말했다.

마력으로 바람 소리를 잠깐 차단하자 솔레아의 조곤조곤한 목소리만 앤에게 전해졌다.

“너 절대 죽게 안 둬. 날 위해 그렇게 울어 준 사람인데 내가 너 죽는 거 가만히 보겠어?”

“……아가씨…….”

앤의 떨림이 서서히 멎었다.

그리고 앤이 솔레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 왔다.

“……전 진짜 아가씨가 너무 좋아요. 평생 아가씨 따를래요.”

“응. 그래라. 나도 너 좋아.”

너 좋을 대로 해라, 라는 의미로 무감하게 대답했다.

평범한 대화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아무스가 입을 살짝 벌리더니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그르렁거렸다.

“왜 그래, 아무스? 무슨 일 있어?”

솔레아가 걱정스레 물었지만 아무스는 대답도 않고 갑자기 한쪽 날개를 접더니 오른쪽으로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으, 꺄아아악!”

“아무스!”

직선으로 날아가면 될 것을 굳이 사선으로 내려가 바다로 향하더니 이번엔 하늘로 치솟았다.

“야! 너 왜 그래! 약 먹었어?”

“아가씨! 아가씨! 자가용 님이 이상하세요! 꺄아악!”

“알아, 나도 아니까 앤 조용히 해!”

“네흐어업!”

앤은 혼란 속에서 애써 입을 꾹 다물고 솔레아를 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구름에 닿을 만큼 날아오른 아무스는 하얀 구름 사이를 천천히 유영하다가 이번에는 두 날개를 완전히 접고는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무중력 상태가 된 솔레아와 앤의 몸이 순간적으로 공중에 붕 떠 버렸다.

“읍!”

너무 놀라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 건지 앤은 숨을 들이켰다가 그대로 기절하고 말았다.

솔레아는 그런 앤을 어깨에 대충 둘러메곤 제 마력을 이용해 아무스에게서 떨어져 나와 허공에 발을 디디고 섰다.

“야! 왜 그래! 뭐 때문에 화나서 그래! 말을 해야 될 거 아냐! 용 처음 타는 사람 놀라잖아!”

하강하던 아무스는 솔레아가 화내는 목소리를 듣고 다시 그녀의 앞까지 날아왔다.

그런데도 쉽사리 입을 열지 않고 눈을 피하기만 했다.

“왜 그러냐고. 아무스. 응? 말을 해.”

순식간에 사람의 모습으로 변모한 아무스는 검은 날개를 꺼내 제 몸을 감췄다.

제발 인간화할 때 몸을 당당하게 내보이지 말라고 솔레아에게 등짝을 수십 번 맞아 가며 교육받은 덕이었다.

아무스의 긴 검은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에 흩날렸다.

그는 입술을 짓깨물었다가 인상을 찡그린 채 투덜거리듯 말했다.

“난 바보야.”

“어? 네가 왜 바보야? ……네가 비록 인간사를 잘 모르긴 하지만 가르치면 알아듣잖아. 너 바보 아니야.”

“……그런 약속 하지 말걸.”

“무슨 약속. 너 왜 그러는데.”

“짝 미워.”

“우리 대화가 안 되는 거 알고 있니?”

그때 기절했던 앤이 깨어났다.

무심코 고개를 들어 올린 앤은 자신이 아직 허공에 떠 있으며, 심지어 망망대해 위라는 걸 알아차렸다.

“흐억, 아가, 아가씨! 여기 바다, 밑에 바다! 아가씨! 저 사람 깨벗었는데요! 아니, 우리 저택에 머물던 그 사람이잖아! 아이고, 사람한테 날개가 달렸네! 세상에, 용이었구나!”

하지만 솔레아는 아무스와 싸우느라 앤에게 대답할 새가 없었다.

“아무스! 말을 하라고. 답답한 게 있으면 말을 해야 알지.”

“다들 짝 좋아해! 짝도 다 좋아하고 아끼고…… 근데 내 차례가 안 오잖아.”

“이게 무슨 유치한 소리야.”

“알아, 유치한 거. 근데 나도 오래 기다렸단 말이야…….”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네가 정령들도 아니고 애같이 왜 그래.”

“기다리기로 했지만……. 짝 요새 나를 짐 싣기 좋은 마차로만 생각하잖아.”

“내가 널 언제 그렇게 생각했어.”

“엊그제! 우란 상단 엿 먹인다고 웬프론 협곡에서 마차 강도 짓 할 때! 내 등에 양모 실어서 공장까지 날아갔잖아!”

“아무스, 그때 분명히 설명했잖아. 워낙 오랜만이라 물류 창고에 빈자리가 있는지 없는지 내가 잘 몰라서 그냥 보냈다가 창고 터질 수 있으니 일단 물건을 들고 가 봐야 한다고!”

“공간 찢어서 가로질러 가면 되지!”

“그래서 공간 찢어서 네 등에 싣고 갔잖아! 몇 분 가지도 않았구만 거참 되게 생색내네!”

“생색이 아니라……, 씨! 짝 미워! 내가 무슨 말 하는지 모르겠어?”

“저, 두 분. 내려, 내려가서 싸우시면 안 될까요? 제발, 제발요…….”

앤은 두 팔로 솔레아의 어깨를 끌어안은 걸로도 모자라 두 다리까지 솔레아의 허리에 둘러 솔레아에게 매달린 상태였다.

솔레아는 손을 휘휘 저으며 말했다.

“야, 야! 됐어! 따로 가! 나이를 천 살 넘게 먹었으면서 저리 배려심이 없나.”

아무스의 턱이 벌어졌다.

“내, 내가! 내가 천 살이나 넘은 건! 솔레아 네가 기다리라고 했으니까! 다시 온다고 했으니까!”

“내가?”

“됐어! 따로 가! 나도 짝 안 봐!”

단단히 삐진 듯 휙 몸을 돌린 아무스는 커다란 검은 용으로 변해 멀리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너 어디 가!”

솔레아가 불러도 아무스에게선 답이 없었다.

“어유! 저놈의 승질머리! 갑자기 왜 화를 내는 거야! 이해가 안 되네.”

앤은 솔레아에게 매미처럼 달라붙은 상황에서도 오들오들 떨며 말했다.

“제, 제가 보기엔요, 아가씨……. 제가 이래 봬도 로맨스 소설 프로거든요.”

“갑자기 네 책 취향이 왜 나와?”

“아니, 들어 보세요. 그, 제가 보기엔 자가용 님이 질투를 하신 것 같, 같거든요. 아가씨, 근데 저 너무 무서워서 눈물 날 거 같아요.”

“어어, 걸어가자.”

솔레아는 주머니에서 작은 칼을 꺼내더니 단번에 크기를 키웠다.

제 키만 한 검을 휘둘러 공간을 찢은 솔레아는 빛도 없는 어둠 속을 터벅터벅 걸어갔다.

“아가씨! 아가씨. 저, 저 여기도 너무 무서운데요. 아가씨. 저 이런 마법은 처음 봐 가지고, 세상에. 아가씨. 무슨 일이 있으셨던 거예요. 저 너무 무서워요. 아무것도 안 보여요.”

“괜찮아. 네가 죽일 듯이 조르고 있는 거 내 목이랑 내 허리야. 이리로 가면 더 빨라서 그래.”

“아가씨, 제가 아가씨 등에 업혀 가는 게 진짜, 정말 송구한데, 저 솔직히 이 공간도 너무 무서워서…….”

“응, 응.”

솔레아는 대충 대답하며 앞으로 척척 걸어갔다.

마력으로 앤을 받치고 있어서 그다지 무겁지도 않았다.

잠시 후에야 앤이 마음을 가다듬고 말했다.

“아무튼 아가씨, 제가 보기엔 용 님이 질투를 하신 것 같아요.”

“무슨 질투를 해? 왜 갑자기?”

“제가 아가씨 평생 따른다고 하고, 아가씨도 저 좋다고 하시고…….”

잘 걷던 솔레아가 우뚝 멈춰 섰다.

“너…… 그런 의미로 나를 따른다고 한 거였어?”

“아니요, 아니지만! 물론 아가씨께서 생각이 있으시다면 저도 고려는 해 보겠지만, 아니 아무튼. 세상은 넓고, 다양하고요! 1,000년을 살았으니까 용 님은 다양한 인간을 봐 왔을 거고, 마음이 열려 있으실 테니까요! 그런 부분에서 조금 서운하셨던 게 아닐까요?”

“그럼 고작 그것 때문에 오해를 해서 온갖 썽을 다 내고 지 혼자 삐져서 날아갔단 말이야?”

“용 님이랑 아가씨랑 서로 좋아하시는 관계니까 충분히 화내실 수 있죠. 사귀는 사이에선 사소한 걸로도 서운하잖아요.”

“우리 안 사귀는데?”

“예?”

“나 쟤랑 그런 사이 아니야.”

숨통을 조르듯 솔레아에게 매달려 있던 앤이 서서히 몸을 미끄러뜨리며 바닥으로 내려왔다.

검은 공간을 디디고 선 앤이 솔레아를 낯선 사람 보듯 바라봤다.

“근데, 근데 되게 막…… 아가씨는 용 님이 자기 것인 양 부려 먹으셨고, 저 용 님은 아가씨를 짝이라고 부르신 것 같은데…….”

“그러게. 왜 그러는지를 모르겠네.”

“계, 계기가 있을 거 아니에요?”

“……음. 내가 힘들 때 쟤가 옆에 있어 주긴 했어. 의지가 많이 됐어.”

“요, 용 님이 고백도 하셨고요?”

“음…….”

솔레아는 기억을 곰곰이 더듬었다.

‘짝 좋아!’

‘짝 너무 좋아!’

‘뽀뽀해도 돼?’

‘짝이 날 좋아해 주면 돼.’

“어. 많이 했네.”

앤의 목소리가 점점 떨려 왔다.

“그, 그때 아가씨는 뭐라고 대답하셨는데요?”

‘어, 그래.’

‘잠깐만. 보던 거 마저 보고.’

‘공작님께 갔다 올게.’

‘아무스. 우리 오빠 옷 좀 찢어 먹지 마.’

‘아무스. 헤이먼은 이제 완전히 괜찮은 거지?’

눈을 감고 회상하던 솔레아가 다시 눈을 뜨곤 앤의 시선을 회피하며 답했다.

“정확한 답은 안 했지…….”

앤의 두 눈이 왕방울만큼 커졌다.

“세상에! 좋아한다는 확답도 듣지 못했는데 저렇게 헌신적으로 아가씨 옆에 남아서! 저렇게! 이 먼 카스탈리아까지!”

“너 찾으러 왔잖아.”

하지만 이미 과몰입한 앤에게 솔레아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이럴 거면 여지도 주지 말았어야죠! 잘해 주시지 말았어야지! 나빠요, 아가씨는 쓰레기야! 후회물 주인공이나 돼 버려라! 데굴데굴 굴러라!”

무슨 말인지 모를 소리를 뱉어 낸 앤은 눈물을 흩뿌리며 앞으로 뛰어나갔다.

“앤! 앤! 너 길은 알고 뛰는 거야? 앤!”

한참 후, 검은 공간 어딘가에서 눈물을 훌쩍이는 앤을 발견했다.

‘우리 아가씨가 개아가공이라니……. 믿을 수 없어. 완전 다정여주인 줄 알았는데. 내 주식 망했어. 후회여주나 돼라…….’

그만 좀 중얼대라고 한 대 쥐어박으려다가 꾹 참고 베르고 공작저까지 데려갔다.

공작저에 데려다 놓자 앤은 자연스럽게  레아의 전속 하녀 방으로 올라가 옷을 갈아입고 다시 현관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두 눈엔 여전히 솔레아를 향한 실망감이 들어차 있었다.

“앤. ……내가 죽었다고 했을 때 그렇게 울었으면서 내가 로맨스 쓰레기라고 날 원망하는 거니.”

“하지만……. 하지만, 아가씨는 사람 마음을, 아니 용 마음을 갖고 놀았잖아요!”

그때, 그레이가 방문을 벌컥 열고 복도로 뛰어나오더니 난간을 붙잡고 아래층 현관을 향해 소리쳤다.

“솔레아! 얘 왜 이래!”

“응? 뭐가?”

제대로 된 대답을 듣기도 전에 커다란 검은 꼬리가 그레이의 방에서 튀어나왔다.

검은 꼬리는 그레이의 허리를 휘감더니 재빠르게 그를 다시 방 안으로 데려갔다.

“억!”

“아무스?!”

몇 초 뒤, 알몸의 남자가 검은색 긴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그레이의 방에서 나왔다.

하얀 피부에 커다랗고 긴 눈, 오똑하게 솟은 콧날, 조각처럼 빚어 놓은 온몸의 근육들과…… 그것.

앤이 조용히 두 손을 올려 입을 가리고 감탄했다.

“앤. 눈을 가려야지.”

“아, 맞다.”

솔레아의 말에 앤이 얼른 눈을 가렸다.

아무스는 호기롭게 외쳤다.

“나도 오늘부터 그레이 방에서 잘 거야!”

그레이가 이불을 들고 복도로 뛰어나와 아무스의 몸을 둘러쌌다.

“옷 좀 입으라고! 그리고 네 방으로 가! 원래 지내던 손님방 있잖아!”

“싫어!”

아무스가 씩씩거리며 그레이를 들쳐 업었다.

“나도 이제부터 다른 사람이랑 친하게, 막, 업히고! 업어 주고! 다 할 거야!”

“하, 참 내! 그래라!”

솔레아의 말에 앤은 식겁하며 솔레아를 바라봤고, (우리 아가씨는 쓰레기예요.) 그레이는 머리를 싸맸다. (나가서 싸워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