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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화 (101/192)

101화

그레이는 퉁퉁 부은 솔레아의 눈두덩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키득거렸다.

“야, 너 눈 엄청 부었다.”

“시끄러.”

그레이의 손을 툭 쳐 낸 솔레아는 가라앉은 얼굴로 눈을 문질렀다.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어. 나는 돌아갈 거야.”

“안 보낸다니까? 그레이는 아직 동생 독립시킬 마음이 없어요.”

능청스럽게 솔레아의 말을 씹어 넘긴 그레이는 늘 그랬듯 자연스럽게 솔레아의 머리를 잡아당기고는 정수리에 뽀뽀를 했다.

“하지 마.”

“아이고, 우리 동생. 머리 언제 감았어? 그레이 입술 썩어.”

“……그레이. 막내한테는 냄새 안 나.”

“형은 얘가 무슨 요정인 줄 알아?”

“……막내한테는 냄새 안 나.”

티온은 사뭇 진지한 얼굴로 말하곤 솔레아에게 다가왔다.

그러고는 허리를 숙여 코를 킁킁하더니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막내는 냄새 안 나.”

“형이 데리고 다니는 기사들에 비하면 안 나겠지. 그래도 얘도 사람인데.”

“아니야. 안 나.”

“맞아.”

“아니야.”

“맞다고.”

“아니야.”

“형, 이런 데서 고집부리지 마.”

“……막내는 냄새도 안 나고, 용기 있고, 착하고, 똑똑하고, 엄청 가볍고, 예뻐.”

“이 몰골을 보고도 예쁘다는 소리가 나와? 형 진짜 중증이다. 그럼 얘는 뭐, 똥도 안 싸겠네?”

당황한 티온의 두 눈이 잠깐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차분해진 티온은 근엄할 정도로 단단한 목소리로 답했다.

“막내 똥은 냄새 안 나.”

“형이 그걸 어떻게 알아?”

“……안 날 거야.”

“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얼굴이 빨개진 솔레아가 소리치자 티온은 어찌할 바를 모르며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막내야, 나는 헤이먼 옮기고 올게.”

티온은 헤이먼을 다시 가뿐하게 안아 올렸다.

“같이 가자. 내가 분명히 나가기 전에 기사들한테 헤이먼을 지키라고 했는데 왜 이 지경이 됐는지 모르겠네.”

세 사람이 헤이먼의 방 앞으로 가 보니 기사들은 솔레아의 말대로 철저히 방문을 지키고 있었다.

다만 모두 기절해 있었을 뿐.

심각한 표정으로 기사들을 보던 세 사람은 일단 헤이먼을 침대에 눕힌 뒤 복도로 나와 기사들을 깨웠다.

“기상.”

티온의 묵직한 목소리에도 기사들은 쉽게 눈을 뜨지 못했다.

“기상.”

티온이 조금 더 크게 말했지만 기사들은 여전히 미동조차 없었다. 그레이는 웃음을 참으며 입술을 안으로 말아 씹다가 억지로 진지하게 티온에게 말했다.

“형. 아무래도 이달론의 마력에 당한 것 같아.”

“……그렇구나.”

“그러니까 솔레아의 회초리로 다 한 대씩 때리자.”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솔레아가 질색하며 소리쳤다.

아까 정령들이 회초리로 바꾼 몽둥이는 아직도 그 상태 그대로였다.

일단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 챙겨 나오긴 했지만 그걸 기사들에게 휘두를 생각은 없었던 솔레아는 벌게진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싫어!”

“아냐, 해 봐. 막상 해 보면 잘할 수도 있지.”

“괜찮아, 막내야. 때려.”

“그래. 신명 나게 때려.”

“싫다니까!”

“너 왜 차별하냐. 아까 헤이먼 엉덩이는 잘만 때려 놓고. 기사들 엉덩이는 헤이먼 엉덩이만큼 소중하지 않다는 거야?”

“엉덩이, 엉덩이 하지 마!”

“엉덩이가 뭐 어때서? 아니면 허벅지 때려.”

“허벅지도 싫어!”

“그럼 다들 누워 있는 김에 등을 때려.”

“왜 그래, 진짜!”

아무도 그를 데려가지 않은 탓에 혼자 열린 문틈으로 열심히 빠져나온 뱀무스가 복도를 기어 왔다.

그가 입을 벌려 샤아악 소리를 내려던 찰나 그레이와 눈이 마주쳤다.

그레이는 천천히 눈을 감고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뱀무스는 입을 벌리려다 말고 갸우뚱 머리를 기울였다.

“야, 이리 와. 고귀한 용이 왜 바닥을 기어 다니고 있니.”

전에 없이 다정한 목소리에 뱀무스가 바닥을 기어 그레이에게로 다가갔다.

쉬이익.

세로로 갈라진 혀를 길게 날름거리며 의기양양하게 복도를 기어 오는 모습이 마치 ‘이제야 나를 용이라고 부르는군.’ 하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 와중에 티온은 엄정한 표정으로 기사들을 가지런히 복도에 엎드려 눕혔다.

“때려, 막내야.”

“……티온까지 왜 그래.”

“나는 깨울 힘이 없으니까……. 막내가 하기 힘들면 내가 해 볼까?”

“아, 아니……. 오빠가 때리면 영원히 못 깰 것 같은데.”

그레이가 솔레아의 등을 다독이며 말했다.

“그냥 때려, 솔레아. 기사들을 계속 여기 송장처럼 눕혀 둘 수도 없잖아.”

울상을 지어 봤지만 그레이의 말대로 기사들을 이렇게 계속 복도에 둘 수는 없었다.

결국 솔레아는 회초리를 고쳐 쥐고 한숨을 쉬었다.

“나중에 나한테 뭐라고 하지 마.”

“괜찮아, 아까 헤이먼 바지 벗겨 봤는데 엉덩이에 상처 하나도 안 남았더라.”

솔레아를 먼저 방에서 내보낸 뒤 티온과 그레이가 헤이먼에게 상처가 남았는지 확인하고 나왔으니 믿을 수 있었다.

상황이 궁금했는지 정령들이 그레이의 뒤에서 살짝 모습을 드러냈다.

멘붕이 온 솔레아는 회초리를 들고 우물쭈물하느라 정령들을 발견하지 못했다.

활짝 웃은 정령들은 저들끼리 상의를 마친 뒤 기사의 등을 내려치려는 솔레아의 회초리를 다른 모양으로 바꿔 버렸다.

끄트머리에 작은 네모 모양의 패들이 달려 있던 회초리가 순식간에 긴 술이 여러 개 달린 얇고 긴 회초리로 변했다.

솔레아는 회초리 모양이 바뀐 줄도 모른 채 팔을 크게 휘둘러 기사의 등을 힘껏 때렸다.

“꺅! 이게 뭐야!”

“어이쿠야. 모양이. 또. 바뀌었네.”

솔레아는 그레이를 노려봤지만 그는 웃음기를 머금은 얼굴로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정령들이 좀 더 효과가 좋은 버전으로 바꿨나 보다.”

그레이의 어깨 너머에서 화려한 후광이 비치는 걸로 봐선 분명히 정령들이 그 뒤에 숨어 있는 거 같긴 한데, 커다란 검은 뱀 아무스를 어깨에 두른 채 후광을 뿜뿜 내뿜는 그레이의 모습이 너무 홀리해서 차마 따질 수가 없었다.

솔레아는 분을 참으며 이상한 모양의 회초리를 마구 휘둘렀다.

이렇게 된 이상 빠르게 기사들을 깨울 수밖에 없었다.

“일어나세요! 빨리! 눈 떠!”

철썩철썩 소리가 복도에 울려 퍼졌다.

갑자기 분위기가 싸해져서 솔레아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복도 저 멀리 중앙 계단을 올라와 이쪽을 향해 걸어오다 말고 멈춰 선 두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찻잔을 얹은 쟁반을 든 앤과 신문을 품에 안은 라트엘이 차갑게 식은 눈으로 솔레아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야!”

솔레아가 다급하게 외쳤지만 라트엘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났다.

“……아가씨가 어제 명령하신 대로 신문 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잘, 잘했어요. 근데 이건 그런 게 아니고, 설명하자면 되게 긴데…….”

앤이 감격한 얼굴로 끼어들었다.

“드디어! 진정한 자기 자신을 찾으셨군요, 아가씨!”

“왜, 왜 2층에 올라온 거야!”

“공작님이 1층으로 내려오셨길래 얼른 올라왔어요! 아가씨 씻겨 드리려고 했는데, 어, 플레이를 마저 끝내신 뒤에 씻으시겠어요?”

“조용히 해, 앤! 그런 거 아니라고! 너 내려가!”

“넵!”

라트엘은 밝게 대답하는 앤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아가씨의…… 취향에 대해 뭐라고 할 마음은 없지만, 복도에서는 자제해 주셨으면 합니다. 뒤에서 도련님들도 보고 계신데.”

“오빠들이 시켰어요!”

솔레아가 무심코 회초리로 뒤에 서 있는 티온과 그레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지만 그레이는 능청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고, 티온은 화들짝 놀라더니 느리게 뒷걸음질 쳐 헤이먼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리 와! 어디 가, 티온! 이 무책임한 놈아!”

솔레아가 쪽팔림에 방방 뛰고 있는데 기사들이 하나둘씩 깨어났다.

“아이고, 머리야…….”

“등이 왜 이렇게 아프지?”

“……난 엉덩이도 아픈데?”

“왜 쓰러져 있는 거지, 우리.”

머리를 감싸 쥐고 자리에서 일어난 기사들은 자신들을 이상하게 바라보는 라트엘에게 시선을 주다가 뒤를 돌아봤다.

시커먼 뱀을 어깨에 두르고 있는 그레이 도련님과 손에 회초리를 쥐고 있는 솔레아 아가씨가 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서 있었다.

기사들은 눈치를 살피다 일단 솔레아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겉으로만 봐서는 솔레아 아가씨가 더 많이 화나 보였다.

그게 아니고서야 평소에 그리 친절하시던 분이 저런 여러 갈래로 갈라진 괴상한 모양의 회초리를 들고 서 계실 리가 없었다.

“죄, 죄송합니다. 아가씨. 많이 화나셨어요?”

“저희도 기억이 잘 안 납니다. 헤이먼 도련님 방문이 열렸던 거 같긴 한데.”

“아니, 난 화났다기보다는…….”

그때 갓 깨어난 맬다가 자신의 양옆에서 무릎을 꿇고 있는 기사들과 회초리를 들고 있는 솔레아를 보고는 빠르게 상황 파악을 마쳤다.

잘못 파악했지만 어쨌든 마쳤다.

맬다는 잽싸게 웃통을 벗어 던지곤 뒤돌아 바닥에 납작 엎드렸다.

“아가씨께서 내리신 임무를 완수하지 못한 죄! 몸으로 갚겠습니다!”

그레이가 자꾸만 피식피식 웃음이 새 나와 올라가는 광대를 오른손으로 겨우 잡아 내리며 말했다.

“너 언제 맬다를 조련한 거야?”

“아니야! 무슨 소리야! 너 아닌 거 알면서 지금 웃겨서 그냥 가만히 보고 있는 거지?! 라트엘도 그렇게 보지 마요!”

라트엘은 처음 만났을 때처럼 무감한 눈으로 솔레아를 보며 말했다.

“저는 여태 아가씨께서 명령하신 일을 잘 처리해 왔습니다. 그러니 제겐 그런 벌을 주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나, 나 진짜 아니에요.”

맬다의 과다한 열정에 눈치를 살피며 망설이던 기사들이 하나둘씩 웃통을 벗기 시작했다.

“저, 저희도…… 죄송합니다. 다음엔 기절하는 일 없이 완벽히 명령을 수행하겠습니다……. 벌을 내려 주시면 달게 받겠습니다.”

“벌 아니라고요. 옷 입으세요, 제발.”

울상이 된 솔레아가 눈물을 터뜨리기 일보 직전이 되자 그레이가 손을 휘휘 저었다.

“용서해 준다니까 다들 돌아가. 몸에 이상한 곳은 없지?”

“예.”

엉거주춤 꿇어앉아 있던 기사들이 옷을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들은 계단을 내려가는 순간까지 솔레아의 눈치를 봤다.

기사들이 모두 떠난 후에야 라트엘이 솔레아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아침 일찍 여러 신문사를 통해 우란 상단의 갑질 기사가 실린 신문이 발행되었습니다.”

“잘됐네요.”

“……근데 그건 계속 손에 들고 계실 겁니까? 긴장돼서 보고를 할 수가 없는데요.”

“아! 미안해요!”

라트엘이 보는 앞에서 회초리의 크기를 줄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이걸 누구에게 맡길 수도 없어서 솔레아는 얼른 회초리를 등 뒤로 숨겼다.

라트엘은 탐탁지 않은 눈으로 검은색 회초리를 힐긋거리며 솔레아와 함께 그녀의 집무실로 향했다.

집무실 앞에 멈춰 선 라트엘은 목에 건 크라바트를 만지작거리다 힘겹게 입을 뗐다.

“저는 아가씨와 그런 파트너가 될 생각이 없습니다.”

“오해가 장난 아니게 쌓인 것 같은데 나도 그런 거 할 생각 없.”

“아가씨의 파트너가 오셨습니다!”

라트엘이 흠칫 놀라 뒤를 돌았다.

오늘 자 신문을 손에 든 이안이 앤의 안내를 받으며 2층 계단을 올라오다가 자신에게 꽂히는 시선을 느끼곤 우뚝 멈춰 섰다.

“……왜, 왜 저를 그런 눈으로 보세요?”

라트엘의 머리가 사선으로 살짝 기울어졌다.

이안과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던 라트엘은 의심 가득한 눈으로 솔레아를 바라봤다.

“그, 그 파트너가 아니라고요!”

단정한 검은 단발머리의 이안이 심지 굳은 얼굴로 외쳤다.

“제가 왜 아가씨의 파트너가 아닙니까! 저는 아가씨가 하라는 건 뭐든지 할 준비가 돼 있는데!”

결국 솔레아가 회초리를 던지듯 바닥에 내려놓고 머리를 싸맸다.

“아니야아아! 목적어를! 목적어를 넣고 말해! 아아악!”

엉망진창이 된 상황 속에서도 느긋하게 바닥을 기어 온 아무스가 이안을 향해 반갑다는 듯 혀를 날름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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