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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화 (100/192)

100화

“놔! 이 우매한 것들아!”

“우매한 것들? 헤이먼은 그런 말 안 써! 솔레아! 때려!”

“응!”

솔레아의 깜장 빠따가 헤이먼의 엉덩이를 강타했다.

“악!”

헤이먼이 발버둥을 치며 소리 질렀다.

“아이고, 이것들아…….”

공작은 오른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막내야, 한 번 더 쳐.”

“아, 아직 모자란가? 알았어!”

“솔레아! 팔을 크게 휘둘러서! 허리도 써!”

“알겠어!”

“막내, 손목 조심해.”

“응!”

당차게 대답한 솔레아가 다시 헤이먼의 엉덩이에 몽둥이찜질을 가했다.

“아악!”

방금 물에서 건져 올린 참치처럼 펄쩍거린 헤이먼이 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공작님, 아빠! 아버지!”

“뭐? 공작님? 헤이먼은 가족끼리 있을 때는 아빠를 공작님이라고 안 불러! 솔레아! 한 대 더 때려!”

“알았어!”

“얘들아, 그만해라!”

공작이 만류했지만 남매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이 와중에 정령들이 나타났다.

어디서 가져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색색깔의 깃발을 든 채 공중에서 몸을 흔들어 대며 춤을 췄다.

“맞을 때마다 개수를 스스로 세게 하자!”

“좋아!”

“몇 대 맞을 건지 물어보고 자기가 말한 개수만큼 때리자!”

“‘건방져서 죄송합니다!’라고 인사도 하게 하자!”

“아니, ‘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하자!”

“이왕이면 손바닥으로 때려 줘!”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손바닥만 한 정령들에 놀란 티온과 공작이 입을 벌렸다.

그레이는 한 번 보긴 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많은 수의 정령들이 방 안을 가득 채워 반짝이는 건 신기한 듯 눈을 휘둥그레 떴다.

오직 솔레아만 인상을 찡그리고 그들을 혼냈다.

“그 장르 아니야! 너희 또 앤이 읽는 책 훔쳐보고 왔지!”

솔레아의 호통에 정령들은 깜짝 놀라 번쩍 발광했다가 뱀이 된 아무스의 옆으로 포르르 날아갔다.

“주인님! 임시 주인이 우리 책도 못 읽게 해요!”

쉬익!

“무슨 책이냐면요.”

“이상한 거 가르쳐 주지 마!”

솔레아는 빠르게 헤이먼의 엉덩이를 한 대 더 후려친 후 정령들에게 잔소리를 시작했다.

“니네는 어디서 자꾸 나쁜 것만 보고 배워 와 가지고! 읽지 말랬지!”

“임시 주인 미워!”

“임시 주인 나빠!”

“임시 주인 맨날 재밌는 거 못 읽게 하고!”

정령들은 씩씩거리며 아무스의 꼬리를 붙잡고 솔레아를 있는 힘껏 노려봤다.

물방울 같은 커다란 눈으로 노려봐 봤자 무섭기는커녕 귀여운 느낌만 가득이었지만.

“아가, 이제 그만하는 게 어떠니! 헤이먼이 너무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것 같은데.”

“그, 그래도 혹시 모르니 마지막으로 한 대만 더…….”

그때 정령 하나가 공작의 앞으로 팔랑팔랑 날아갔다.

“내 생각에는 덜 아파서 그런 것 같아! 제일 기본으로 가자!”

“……뭐라고?”

공작이 되묻는 순간 솔레아가 헤이먼을 향해 방망이를 휘둘렀다.

정령들은 빠르게 힘을 모아 방망이의 모양을 바꿨다.

얇은 회초리가 헤이먼의 엉덩이를 철썩 때렸다.

“아악!”

“꺄악! 이게 뭐야!”

솔레아가 회초리를 바닥에 떨어뜨리곤 기겁하며 뒷걸음질 쳤다.

티온도 적잖이 놀랐는지 헤이먼을 내려놓고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바닥에 쓰러진 헤이먼이 엉엉 울며 기침을 토해 냈다.

그의 입 밖으로 초록색 연기가 조금씩 새어 나왔다.

“아빠! 얘, 얘 이상한 거 나와요!”

“그냥 너무 아파서 마력이 나오는 거 아니니?!”

“죄송해요! 공작님! 왜 갑자기 회초리로 변했지?”

“얇은 거로 때려야 아프지 않나?”

“무슨 소리야! 정령들, 집중의 박수를!”

짝! 짝! 짝!

정령들이 조용해지자 방 안엔 헤이먼의 울음소리만 들렸다.

“흐엉, 흐, 아파.”

“……헤이먼, 너 맞아?”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눈물을 줄줄 흘리던 헤이먼은 살기 가득한 표정으로 솔레아를 노려보다가 공작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 말했다.

“딸을 살려 내셔야죠, 공작님.”

“헤이먼?”

그 말을 마지막으로 헤이먼의 코와 입에서 훨씬 농도가 짙은 초록색 연기가 빠져나오더니 어딘가로 사라졌다.

“진짜 이달론 맞았네!”

“어디로 간 거지?”

그레이와 티온이 연기가 사라진 방향을 두리번거리는 동안 공작은 머릿속으로 ‘아직 아가씨의 몸이 멀쩡하잖습니까!’라던 마르실라의 외침을 떠올렸다.

마르실라의 가족들은 몸이 부패돼 있어 살리지 못했다면, 솔레아는?

공작은 걱정스레 헤이먼의 안색을 살피는 솔레아를 바라봤다.

‘저 아이가 솔레아의 몸에 들어가 몇 달을 살아 준 덕분에 솔레아의 몸은 건강하다. 살아 있는 것과 다름이 없어. ……이달론에게 방법만 있다면.’

기묘하게 바뀐 공작의 표정을 본 그레이가 목소리를 내리깔고 물었다.

“아버지. ……이상한 생각 하시는 거 아니죠?”

“뭘.”

“솔레아를…… 살릴 수 있다거나.”

그레이가 말을 뱉자마자 티온이 솔레아를 잡아끌어 제 뒤에 숨겼다.

“……아버지. 그건, 아니에요. 정말 아니에요.”

공작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딸을 살리고 싶어 하는 게 뭐가 이상한 일이라고! 내가 보기엔 너희들이 더 이상해! 네 동생이 죽었어! 너희들이 아끼던 동생이 죽었다고! 근데 어떻게 멀쩡하게 저 아이를 감싸! 저, 가짜를!”

“아버지!”

티온이 큰 소리로 외치며 그의 말을 가로막았다.

공작 역시 생각하고 뱉은 말은 아니었는지 놀란 얼굴로 입을 틀어막았다.

“……미안하다,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

목에 핏대가 설 정도로 흥분해 있었지만 겨우 목소리를 가라앉힌 그레이가 으르렁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니는 출신이 아니라 함께 나눈 시간과 추억이 가족을 만드는 거라고 하셨어요.”

“그럼 솔레아는? 18년을 함께했는데! 죽었다는 걸 인정하고 새로운 사람을 가족으로 받아들이는 게 그리 쉽니?”

“그 뜻이 아니잖아요!”

“내가 보기엔 똑같아!”

솔레아는 티온의 뒤에서 빠져나와 디에르고에게 예의 바르게 허리를 숙였다.

“공작님 말씀이 맞습니다. 여기는 제가 있을 자리가 아니에요.”

“야.”

그레이가 굳은 얼굴로 솔레아의 손목을 붙잡았지만 그녀는 생긋 웃기만 했다.

기절했는지 헤이먼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정령들은 헤이먼의 근처를 날다가 공작의 옆으로 가 그의 귀에 장난이라도 치듯 속닥거렸다.

“쟤 마력이 없어.”

“분홍 머리의 마력을 다 빼다 썼어!”

“누가 그랬게?”

“이달론이 그랬지!”

솔레아는 난처함을 숨기지 못하고 공작에게 한 걸음 다가가 정령들에게 말을 걸었다.

“얘들아. 이달론의 거처는 알아냈어?”

“자꾸 옮겨 다녀. 없어졌다가 생겼다가 해.”

공작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정령들과 아무스를 노려보다가 솔레아에게 말했다.

“……아가야. 네가 좋은 아이라는 걸 안다.”

한참 망설이던 공작은 겨우 입을 뗐다.

“이달론을 찾으마. 그리고 헤이먼의 목숨을 두고 더 이상 괴롭히지 않도록 약속을 받아 낼 것이고…… 그다음엔, ……다음엔.”

공작은 차마 다음 말을 꺼내지 못하고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려 버렸다.

“네게도 돌아갈 곳이, 가족들이 있을 거 아니니.”

마르실라의 차에 조종당했던 당시를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 꺼낸 말이었다.

그레이가 화가 난 얼굴로 끼어들기 전 솔레아가 먼저 대답했다.

“네, 공작님. 저도 가족이 있어요. 돌아가야죠.”

“그렇구나.”

그제야 안심했다는 듯 공작은 미미하게 미소 지었다.

“나도 완전히 믿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확인은 해 봐야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아서…….”

“네, 이해해요. 공작님. 어느 누구도 자식을 대신할 순 없잖아요. ……저는 제가 있던 곳으로 갈게요.”

말끔하게 웃는 솔레아의 얼굴에 미묘한 그늘이 져 있었다.

그녀에게 뭔가 더 말을 하려 했지만 딱히 꺼낼 만한 말이 없어 공작은 더 이상 대화를 이어 가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대신 그는 바위처럼 굳은 듯 서서 자신을 바라보는 티온에게 말했다.

“티온, 헤이먼을 방에 데려다 누이렴. ……네가 직접 약도 좀 발라 주고. 왜 이런지 설명할 방법이 없잖니.”

“예.”

무언가를 억누르듯 낮은 목소리로 답한 티온을 물끄러미 보던 공작은 도망치듯 방을 나와 버렸다.

그런데 자꾸만 아이의 보라색 눈이 어른거렸다.

꿋꿋하게 대답하는 모습에 오히려 더 마음이 쓰였다.

……이달론을 찾아야 했다.

솔레아를 살릴 수 있다는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더 이상 시간을 끌고 싶지 않았다.

그레이는 공작이 나가자마자 솔레아의 몸을 돌려세웠다.

“야, 너 솔직히 말해. 원래 세상에서 살 때 어땠어?”

“어떻긴 뭐가 어때, 평범했지.”

솔레아는 그레이의 시선을 피하며 대충 대답했다.

“평범했다는 애가 아버지가 소리 지를 때마다 그렇게 발작을 해?”

“발작?”

헤이먼을 들어 올리던 티온이 깜짝 놀라 그를 떨어뜨렸다.

헤이먼이 바닥에 부딪치며 쿵! 소리가 났다.

“형! 아무리 놀라도 그렇지, 헤이먼을 떨어뜨리면 어떡해. 팔이든 다리든 어디 하나 부러졌겠다.”

“아이고, 미안.”

티온은 헤이먼을 다시 가볍게 안아 들어 일단 소파에 눕혔다.

그러고는 솔레아를 안아서 공중으로 높이 들어 올렸다.

“뭐 해, 티온.”

“솔직하게 말해 주기 전까지 안 내려 줄 거야.”

“나 진짜 평범하게 살았어.”

티온의 옆에 선 그레이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오빠들한테 거짓말하지 마. 야, 그레이도 눈치가 있어요.”

“남들이랑 똑같았어. 엄마 있고, 아빠도 있고.”

“너 자꾸 거짓말하면, 어, 티온이 계속 안고 다니고, 내가 너 손 잡고 다니고, 피구할 때도 너 혼자 팀 하라고 한다. 그리고 시장에도 안 데려갈 거야. 너 춤 못 추는 거 들키게 파티에서 일부러 고급스러운 음악만 튼다? 빨리 대답해.”

그래도 솔레아가 대답하지 않자 그레이가 티온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티온은 어색하게 연기를 시작했다.

“아, 아. 팔. 아. 파. 막내가. 빨리. 말해 줬으면.”

“형, 연기가 그게 뭐야. 진짜!”

핀잔을 들은 티온의 눈꼬리가 시무룩하게 내려갔다.

그의 눈꼬리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형? 울어? 아니 그거 좀 놀렸다고 울어?”

“……나, 나 안 울었는데?”

둘은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솔레아가 얼굴을 일그러뜨린 채 울고 있었다.

“평범했다고. 나, 흑, 평범했단 말이야……. 엄마가, 소풍 갈 때 도시락 싸 줬고, 아빠가…… 운동회 때 와서 사진도 찍어 줬어. 나도 그랬어. 고등학교 때 야자 땡땡이도 쳤고, 흑, 나, 나도 학부모 참관 수업 때 엄마 아빠 두 분 다 왔어……. 졸업식 때 부모님이랑 같이 사진도 찍었고, 나, 큰 꽃다발도 받았고…….”

티온도, 그레이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이었지만 그들은 솔레아의 말을 끊지 않고 가만히 듣고 있었다.

“또, 흑, 똑같았어. 나도 남들이랑 똑같이 살았어……. 아르바이트하려고 했는데, 엄마가, 흑, 힘드니까 하지 말라고 해서 안 하고 막, 어, 대학교 때는, 흑, 친구들이랑 해외여행도 갔었고……. 흑. 나도 남들처럼 똑같이, 섞여서 살았어. 돌아갈 거야. 갈 거라고……. 가고 싶다는데 왜 자꾸 그래……. 내가 왜 막내야, 나 너희 가족도 아닌데. 나 아니잖아……. 나 가짜잖아.”

티온은 솔레아를 바닥에 내려 준 뒤 품에 안았다.

“근데 우리가 너 보내기 싫어서 그래.”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엉엉 우는 솔레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던 그레이가 그녀의 눈꼬리를 위로 쭉 잡아 올리며 장난스레 울었다.

“이렇게 못생기게 우는 애를 어디에 보내냐. 우리가 데리고 살아야지.”

쉬익!

지켜보던 아무스가 입을 벌려 그레이의 종아리를 깨물었지만 그레이는 굴하지 않고 아무스를 쳐 냈다.

“형 빨리 결혼해. 독립해서 나가면 따라 나가게.”

“……사람들이 나 무서워해.”

“잘 찾아보면 어딘가에 한 명쯤은 안 무서워하는 사람 있겠지. 아무튼 야, 우리는 너 보낼 생각 없어. 들려? 들리냐고. 이게 또 오빠들 말하는데 듣지도 않고. 그레이 서럽네.”

“……티온도 서러워.”

어색하게 말을 따라 하는 티온 때문에 솔레아는 울다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그레이는 솔레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가족 하는 거야, 우리. 가짜 아니고 진짜 가족이라고. 알았지?”

솔레아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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