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0화 (90/192)

90화

티온의 시장 패션쇼가 지역 일간지에 실리며 염색 양모는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

워낙 고가의 제품이라 몇 개만 팔아도 매출이 1000만 제르를 훌쩍 넘었다.

산체스 우란은 물건이 팔리면 팔릴수록 은근하게 올라오는 짜증을 감출 수가 없었다.

“50%나 베르고의 공녀에게 돌려줘야 한다니. 여기저기 오고 가며 물건을 판 건 난데 말이야.”

물론 발품을 팔아 직접 염색 공장과 거래하고, 사람 하나하나를 영입한 공녀가 들으면 어이없어할 말이었지만 우란 입장에선 어쨌든 억울했다.

“……돈 벌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가만히 앉아서 돈을 벌다니. 이건 억울하지, 그럼.”

우란은 금화 몇 냥이 들어간 돈 자루를 들고 마차에 올라탔다.

“마력만 때려 박으면 그까짓 거 흉내 못 낼 것도 없지.”

위대한 마법사 이달론은 공녀의 오빠인 헤이먼 공자의 스승이니 거래에 응하지 않을 것이다.

산체스는 이달론 다음으로 유명한 마법사를 찾아갔다.

“다르반 휴 남작님. 처음 뵙겠습니다. 산체스 우란이라고 합니다.”

“……음.”

꽤 깐깐한 얼굴의 그는 책을 읽고 있다가 힐긋 우란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법사들은 왜 하나같이 콧대가 높은지.

우란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다르반 휴 남작에게 이야기를 시작했다.

남작님이 조금만 도와주시면 돈방석에 앉는 건 일도 아니라고. 그냥 숨결을 불어 넣듯 완성된 양모에 마력을 넣어 주면 된다고.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작은 읽고 있던 책을 책상에 엎어 놓고 우란을 향해 몸을 돌렸다.

번지르르한 말을 늘어놓은 우란이 가방 속에서 계약서를 꺼내려는 순간, 남작은 손을 들어 그의 행동을 막았다.

“……왜 그러십니까?”

“공녀님께서 데리고 계신 마법사가 죽기라도 했나?”

“……그렇다기보다는 제품이 워낙 좋으니 여러 곳에서 생산하면 제국 전체에 이익이 될 것 같아 드린 말씀입니다. 베르고와는 아무 연관도 없고요.”

남작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더니 고개를 저었다.

“돌아가게.”

“예?”

“그런 짓은 할 수 없네.”

“완전히 다른 제품입니다! 비슷하게는 생겼겠지만 마력이 영구적으로 보관되지는 않는 보급형 제품을 판매할 겁니다. 가격이 조금 저렴해졌으니 중산층 귀족들까지 소비자층을 확대할 수 있어 잘 팔릴 거란 말입니다. 장사만 몇십 년을 했는데 제가 이런 간단한 흐름도 못 읽겠습니까!”

“양심 얘기가 아니야!”

씩씩거리며 우란의 말을 끊은 다르반 휴 남작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래, 애초에 난 그만큼의 마력은 없으니 만들어 봐야 한 달 정도 마력이 유지되는 양모겠지. 하지만 내가 걱정하는 건…… 공녀님께서 데리고 계신다는 그 마법사야.”

우란은 눈살을 찌푸리며 서대륙에서 왔다는 마법사를 떠올렸다.

남색 머리카락에 덩치가 크고 건방지게 굴던 그 마법사가 뭐 어쨌다고?

“그자가 이 대륙에 온 이유가 ‘로 마하탐’이라며.”

“예? 아, 뭐. 그 비슷하게 말하긴 했지만.”

“돌아가.”

“뭡니까?!”

“복수를 위해 자기 인생과 가족들을 모조리 내버릴 정도의 각오가 된 사람이야! 복수에 목숨을 걸고 있고, 복수를 하는 데 거슬리는 건 전부 죽여 버린다고! 국적도 없는 마법사를 뭘로 제재할 텐가! 공녀님의 밑에서 일한다는 건 그게 복수와 관련이 있다는 건데! 난 그런 일에 끼지 않겠네!”

불같이 화를 낸 남작은 더 이상 얘기조차 듣고 싶지 않다면 우란을 밖으로 쫓아냈다.

계약금이나 수수료에 대한 얘기를 본격적으로 꺼내기도 전에.

우란은 마차에 올라타기 전 남작저를 향해 가래침을 퉤 뱉었다.

“로 마하탐인지 뭔지가 뭐가 무섭다고. 하여간 마법사 놈들이란.”

“주인님, 다시 저택으로 돌아갈까요?”

멍청하게 묻는 시동의 따귀를 후려친 우란은 분에 차 소리 질렀다.

“내가 빈 계약서를 가지고 집에 돌아가는 거 본 적 있어?! 마법사가 여기밖에 없는 줄 알아?!”

“……죄송합니다. 주인님.”

하지만 우란은 그 이후로도 몇 번 더 유명한 마법사들에게 거절당했다.

모두 하나같이 로 마하탐 마법사의 눈에 거슬리고 싶지 않다는 이유를 댔다.

“썅, 됐어. 마력 그딴 거야 반짝거릴 정도로만 넣으면 되고 중요한 건 자수지. 자수만 잘 놓으면 돼. 바느질하는 아줌마들 구워삶는 거야 일도 아니지.”

일이었다.

매우 고된 일이었다.

심지어 실패한 일이었다.

피고름을 짜내며 자수를 놓고 있을 거란 우란의 예상과는 다르게 그들은 아침 일찍 출근했다가 해가 지면 곧장 베르고의 마차를 타고 각자의 집으로 돌아갔다.

굉장히 안락해 보였다.

“……바느질하는 사람들을 위해 개인 마차를 빌려준단 말이야?! 게다가 휴일까지 있어? 휴일이 있으면 어떡해! 자영업자가!”

“예, 그렇다고 하더라고요. 공녀님은 정말 다정하신 것 같아요.”

밝은 모습으로 말하는 어린 시동의 머리를 때린 우란은 마음을 가다듬은 뒤 돈 자루를 들고 직공의 집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아, 남편분이신가 보군요. 저는 우란 상단의 단주 산체스 우란입니다. 아내분과 긴밀하게 나눌 얘기가 있어서 찾아왔습니다.”

“우란 상단!”

두 눈을 휘둥그레 뜬 남자는 아내의 이름을 부르며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래, 이런 환대가 있어야지. 내가 누군데.

픽 웃은 우란은 마치 제집처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제닌이라 불린 여자는 자다 나왔는지 잠이 덜 깬 눈이었다.

“아직 저녁 식사 시간 전인데 쉬고 있었나 봅니다.”

“에, 일이 고돼서요. 상단에서 제게 직접 찾아올 이유가 없을 텐데…… 어쩐 일이세요?”

일이 고돼다니 불만이 많겠군.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우란은 본격적으로 얘기를 꺼냈다.

고개를 끄덕이며 얘기를 듣고 있던 제닌은 우란이 들이민 돈 자루를 열어 안을 살폈다.

오늘 하루 종일 돌아다니며 만난 사람 중 금액을 확인한 사람은 이 여자가 처음이었다.

그러나 우란의 기대와는 다르게 제닌은 코웃음을 치더니 옆에 서 있는 남편에게 돈 자루를 벌려 보여 줬다.

남편 역시 크게 웃었다.

“……지금 뭐 하는 짓…….”

당황한 우란이 말도 제대로 잇지 못하자 제닌은 깔깔 웃다가 눈물을 닦으며 말했다.

“이게 계약금이라니. 내 월급보다도 적네요.”

“뭐야?! 과장도 정도껏 해야지! 누가 바느질하는 직공한테 돈을 그만큼 준다고!”

남편이 들고 있던 커다란 식칼을 테이블에 쿵 내리찍었다.

“제닌은 직공이 아니라 ‘장인’입니다. 제닌 특유의 바느질 문양이 있고, 작업물을 포장할 때 명함도 함께 넣습니다. 그래서 요새는 제닌을 지정해서 주문하는 손님도 있다 들었는데 제품을 판매하는 상단주가 그런 것도 모릅니까? 혹시 가짜인가?”

제닌의 남편이 우란에게 흉악한 얼굴을 들이밀었다. 눈이 멀었는지 왼쪽 눈동자가 희멀건했다.

“가, 가짜라니! 제품 포장이야 베르고 쪽에서 하는 거고! 우린 주문을 받고 판매를 도와주는, 그, 그런……. 그리고! 바느질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큰돈을 줄 리가 없지, 그쪽이야말로 거짓말하는 거 아닌가!”

맞은편에 앉아 있던 제닌은 남편이 가져다준 차를 마시며 고상한 척 말했다.

“그걸 공녀님은 하시더라고요. 덕분에 우리 남편도 이제 험한 일 접고 집안일해요.”

이제 보니 남편의 귀가 뭉친 밀가루 반죽처럼 부풀어 있었다. 무슨 험한 일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알고 싶지도, 엮이고 싶지도 않았다.

“우란인지 계란인지 개소리 말고 나가!”

테이블에 꽂혀 있던 식칼을 빼 든 남자가 소리를 질렀다. 우란은 오늘만 해도 몇 번째인지 모를 푸대접을 받으며 문밖으로 뛰쳐나왔다.

다른 직공들에게도 찾아가 봤지만 모두 똑같은 반응이었다.

어떤 직공은 우란이 소유한 건물에 살고 있길래 일부러 협박 비슷한 으름장도 놓았다.

“여기서 계속 살고 싶으면 내 말을 따르는 게 좋을 거야.”

하지만 풍채 좋은 여자는 어깨를 떨며 껄껄 웃더니 구경하던 아이들에게 큰 소리로 말했다.

“얘들아∼ 짐 싸라∼ 이사 가게.”

“이, 이사라니! 집을 구하는 게 그리 쉽나!”

“그동안 공장에서 자죠, 뭐.”

“사람이 집이 있어야지. 공장에서 잠을 잘 수 있나!”

“아, 모르시는구나. 공장 뒤편에 우리를 위한 생활관이 마련돼 있어요. 휴식 시간에 거기서 잠도 자고 그러거든요. 애들 데려와서 놀라고 해도 돼요. 그리고 공녀님이 부득이하게 집을 나와야 할 상황이 생기면 참지 말고 나오라 하시더라고요. 남편한테 맞아서 나온 헤일로에게는 공녀님이 아예 집을 새로 얻어 주셨어요. 물론 조금씩 월세를 받기야 하시지만 그래도 그렇게 깔끔하고 좋은 집을 그 가격에! 훠우! 정말 대단하시죠? ……하긴 그쪽이야 직원들 복지를 챙겨 본 적이 없으니 알 턱이 있나.”

짐을 싸러 들어갔던 아이가 물이 가득 담긴 커다란 잔을 낑낑거리며 들고 왔다.

“엄마! 뿌려요?”

“응, 뿌리렴.”

“뭐?”

우란이 멍청하게 되묻는 순간 아이는 제 얼굴보다 큰 잔을 우란에게 던졌다.

손에 힘이 없어서 잔에 가득 찬 물을 뿌리지 못하고 우란의 발 근처에 던지듯 떨어뜨린 모양이었다. 쨍그랑 소리와 함께 사방으로 튄 물이 우란의 구두를 적셨다.

“이 망할……!”

“엄마, 잔 깨 버렸어요……. 죄송해요.”

“괜찮아, 아가. 엄마는 이제 돈이 많잖니. 다치진 않았고?”

“엄마는 멋져요!”

아이는 엄마의 품에 파고들었다.

이미 그들에게 우란은 안중에도 없었다.

축축하게 젖은 구두의 물기를 탈탈 턴 우란은 문을 발로 차고 나왔다.

“망할 것들……. 조만간 내가 제대로 쓴맛을 보여 주지.”

그날 우란은 처음으로 텅 빈 계약서를 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 * *

우란이 요즘 뒤로 호박씨를 까고 다닌다는 얘기는 당연히 솔레아의 귀에 고스란히 들어갔다.

“아가씨, 어떡할까요?”

솔레아가 사 준 안경과 솔레아가 사 준 구두와 솔레아가 또 사 준 시계를 굳이 양손에 나눠 찬 라트엘이 매끄럽게 물었다.

“릴홉 신문사에서 개지랄 떠는 거 영상석으로 찍어 뒀죠?”

“예, 산체 개스끼 얼굴 잘 나오게 찍어 뒀습니다. 예쁘게 편집해서 신문사로 보낼까요?”

“네. 계약서대로 신변에 큰 이상이 생기도록 만들어 줘야겠네요. 참, 그 집 어린 시동의 어머니는요?”

“좋은 병원으로 옮겨서 치료를 받게 했습니다. 점점 차도를 보이고 있다고 합니다.”

“다행이네요. 우란의 아내는요?”

“연기력이 좋던데요. 오늘 아침에 우란 상단의 비자금 리스트를 복사해서 가져왔습니다.”

“아, 행복하다. 손 안 대고 코 풀었네!”

라트엘이 질겁하는 얼굴로 솔레아를 내려다봤다.

“가능하면 코는 손 대고 푸십시오. 손수건을 사용하시고요.”

“무슨 말을 못 해!”

라트엘은 부드럽게 풀어진 얼굴로 웃었다.

“참, 공작님께서 찾으십니다. 티타임을 가지자 하셨습니다.”

“네, 어디 계세요?”

“저택 부지 내 언덕으로 가시면 됩니다.”

라트엘이 말해 준 언덕으로 올라가니 하얀 테이블과 의자가 두 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며 가만히 서 있던 디에르고 공작은 솔레아를 발견하고 따스하게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었다.

“아빠!”

“그래, 어서 와서 앉으렴.”

함께 차를 마시고, 바삭바삭한 쿠키를 먹었다.

공작은 늘 그랬듯 솔레아의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집중해 들으며 대답했고, 솔레아는 최근 일들을 자랑하듯 얘기했다.

그레이가 괴롭힌다며 어리광을 부렸다가, 잊고 있던 게 생각났다는 듯 박수를 짝 치곤 티온의 두 팔을 묶어 놓는 게 좋겠다며 자꾸 사람을 들어 올린다며 쉴 새 없이 종알댔다.

요새 헤이먼이 힘이 없어 보여 걱정이 돼서 같이 피구를 했는데 공을 잘만 피하더라. 결국 나만 일찍 공 맞고 죽었다. 깡마른 줄 알았더니 헤이먼이 보기보다 힘이 좋다고 말하는 솔레아의 얼굴엔 생기가 가득했다.

솔레아의 말이 끝날 때마다 눈을 접으며 소리 내 웃던 디에르고 공작은 목이 마른지 차를 한 모금 들이켰다.

그러고는 멀리 시선을 던지며 평소와 다름없이 매끄럽고 따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내 딸은 어디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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