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크고 작은 사건들이 베르고가에 폭풍처럼 밀려들었다.
초대장이 다시 미어터질 듯 들어왔고, 그중에는 그레이와 헤이먼 앞으로 온 개인적인 초대장도 꽤 많았다.
장남인 티온이 받은 초대장도 하나 있긴 했다.
‘참된 군 지도자 모임’
티온은 쌓여 있는 초대장 중에서 헤이먼과 그레이의 이름이 적힌 것을 확인했다.
‘헤렘린 백작가의 오찬에 헤이먼 공자님을 초대합니다.’
‘마가레트 자작가 티파티에 그레이 공자님을 모십니다.’
심지어 그레이의 초대장은 진한 적갈색 봉투에 은색 실링 왁스로 초대하는 가문의 문양이 찍혀 있었다.
그레이를 좋아하는 이가 신경 써서 만들었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그에 비해 티온의 것은 아무런 무늬도 없는 하얀 봉투였다.
게다가 실링 왁스는 검은색.
멋들어지게 적힌 티온 폰 베르고라는 이름도 왜인지 반갑지 않았다.
초대장을 손에 들고 가만히 내려다보던 티온은 무심한 얼굴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때마침 거실을 지나던 사용인들이 그를 보곤 흠칫 놀라며 자연스럽게 뒷걸음질 쳐 사라졌다.
“……협박 편지라도 받으셨나.”
“감히 누가 티온 공자님께 그런 걸 보내겠어요. 살려 달라는 편지면 또 몰라.”
저들끼리 작게 소곤거렸지만 티온에게까지 다 들린 탓에 매서운 눈매가 한층 더 날카로워졌다.
그는 저도 모르게 인상을 쓴 채 2층으로 올라가 솔레아의 집무실 문을 노크한 후 안으로 들어갔다.
솔레아의 침실에 종이며 책들이 쌓이다 못해 넘치는 탓에 공작님이 따로 만들어 준 집무실이었다.
“웬일이야? 얼굴이 왜 그래.”
……내 얼굴이 무섭게 생겨서 그렇구나.
티온이 어색하게 웃으려는 순간 책상에서 일어난 솔레아가 티온의 앞으로 다가왔다.
“왜 그렇게 울상이야, 마음 아픈 일 있었어? 누가 괴롭혔어?”
티온은 꿈에도 모르겠지만 정령들이 매번 ‘아가 불곰 귀여워, 아가 불곰 상처받아서 마음 아야 해, 아가 불곰 쪼끔 슬퍼! 울적해!’라고 떠든 탓에 어느새 솔레아의 머릿속에 티온은 ‘아가 불곰’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솔레아의 따듯한 말에 마음이 사르르 녹아내린 티온은 솔직하게 말했다.
“막내야, 나 여기 가기 싫은데 뭐라고 거절해야 하지……?”
“뭐야 이게? 참된 군 지도자 모임? 군대 이끄는 사람들 모아서 파티하는 거야?”
“응……. 근데 여기 가면 다들 사람 죽인 얘기를 자랑스레 떠드니까, 물론 나라와 가족을 지킨 건 기쁘고 자랑스럽지만 나는 그래도…… 내 손으로 죽인 사람들 얘기를 자랑처럼 떠들고 싶진 않은데…….”
저를 가만히 올려다보는 솔레아의 맑은 자안을 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따듯해졌다.
내 동생.
티온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자연스럽게 담겼다.
티온은 남에게 한 번도 꺼낸 적 없던 얘기를 솔레아에게 줄줄 쏟아 냈다.
해도 될 것 같았다.
우리 막내는 공녀님 아니고 가족이니까.
이곳에 입양됐을 때 공작저에 남을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해서 검을 배우게 됐고, 다행히 가죽 공장에서 무두질을 한 덕분에 체력이 좋아 금방 익혔다고.
기사 작위를 받은 후 모두의 걱정 어린 반대를 무릅쓰고 전쟁에 참전했다가 제 검에 베인 사람이 피를 쏟아 내는 걸 처음 목격하곤 저도 모르게 기절했던 날의 얘기도.
다른 이들이 ‘베르고에서 쓸모없는 똥개를 주웠네.’ 하고 떠드는 걸 언뜻 잠결에 들어 버려 눈을 뜨자마자 안경을 부쉈다는 말도.
시야가 흐려지니 판단력도, 동정심도 무뎌져서 차라리 다행이었다고.
얼굴에 큰 상처가 생기고, 그게 흉터가 될 만큼 긴 시간이 지난 후에 좀 더 ‘베르고에 걸맞은 종’이 되었다며 상관이 말했을 때 마음을 놓았다고.
이야기를 들은 솔레아는 부드럽게 웃으며 티온의 손을 맞잡았다.
“그 상관이란 새, 아니 그분 지금 어디 있어?”
“죽었어.”
“아, 정말 잘됐, 마음이 아프다. 어쩌다가?”
“검에 찔렸어.”
“잘 뒤졌, 슬프다. 적이랑 싸우다가 전투 중에 간 거야?”
“……아니. 그 사람이 데리고 다니던 하인이 우발적으로……. 아마 듣기 힘든 말을 했나 봐. 말을 거칠게 하시던 분이었거든.”
“꼴 좋, 그랬구나. 티온도 마음이 안 좋았겠다.”
“많이 놀라고 무서웠는데 이젠 괜찮아.”
“다행이다. 그럼 티온은 이런 딱딱한 초대장만 받아서 조금 서운했겠네.”
“……내가 무섭게 생겨서 그렇지, 뭐. 괜찮아.”
억지로 입꼬리를 올려 웃는 티온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솔레아가 그의 손에서 초대장을 뺏어 들곤 쫙 찢어 버렸다.
“그럼 이거 가지 말고! 나랑 파티 가자!”
“왜, 왜 찢어?”
솔레아는 말없이 찢긴 종잇장을 휙 내 버리고는 옷걸이에 걸려 있던 검은 양모를 들고 와 티온의 어깨에 걸쳤다.
전에 봤던 것과는 다른 제품인지 붉은 실로 자수가 놓여 있었다.
티온의 눈동자 색과 꼭 닮아 그와 찰떡같이 어울렸다.
솔레아는 두 손으로 허리를 짚고 의기양양하게 외쳤다.
“오빠! 지금 내 염색 양모가 얼마나 미친 듯이 팔리고 있는 줄 알아? 우란 그 생양아치 새끼 돈 잘 번다 싶었는데 재주가 좋더라고, 아니 내가 지금 오빠 앞에서 무슨 말을? 아무튼 우리가 이때 홍보를 다녀야 한다고. 다행히 우리 큐티 쁘띠 아가 불곰은 기럭지 쫙쫙 잘 빠진 핫바디 섹시 그리즐리 베어지! 자, 가자!”
뒤에 한 말은 하나도 못 알아들었지만 어쨌든 솔레아가 저를 칭찬하는 것 같았다.
기분이 좋아진 티온은 방을 나서려는 솔레아의 옆구리를 안아 그녀를 들어 올렸다.
“아, 또 이러네! 진짜!”
“우리 막내 어떻게 이렇게 착하고 똑똑하고 멋지고 예쁘고 혼자 다 할까?”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솔레아를 한 팔로 안아 올린 티온은 왼손으로 문을 열었다.
“내가 문 열 수 있다고!”
“펜 쥐고 일하느라 손 아프잖아. 이런 건 내가 할게.”
“이놈의 집안은 대체 왜 문을 못 열게 하는 거야!”
“하하, 우리 막내 목소리 크고 쩌렁쩌렁하네. 건강해, 착하다.”
“건강해 보이면 내려 달라고! 계단은 내가 직접 내려갈게!”
“넘어지면 어떡해. 내가 안고 갈게, 괜찮아.”
계단을 내려오는 두 사람을 두 눈이 휘둥그레진 채로 바라보던 사용인들이 눈치껏 사라졌다.
와중에 솔레아를 위해 간식을 들고 오던 앤이 깜짝 놀라 입을 살짝 벌리더니 이내 윙크를 하곤 사라졌다.
‘저거 또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솔레아는 티온에게 들린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저택의 드넓은 정원을 걸었다.
티온의 기사들과 마주쳤지만 그들은 평소와 다름없는 말투로 인사를 건넸다.
“대장님. 공녀님과 나가시게요?”
“응.”
“공녀님! 좋은 아침입니다.”
“……예.”
“그런데 왜 얼굴을 가리고 계세요?”
“……쪽팔려서.”
그때 맬다와 조쉬가 진지한 목소리로 티온을 부르며 그의 앞을 막아섰다.
“대장.”
“왜?”
“공녀님 몸이 조금 기울어지셨습니다. 고쳐 안으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
짧은 신음을 뱉은 티온이 솔레아를 고쳐 안으려 하자 조쉬와 맬다가 두 팔을 겹쳐 기마 자세를 만들었다.
“아니면 저희가 저택 입구 마차까지 공녀님을 모실까요? 공녀님께서 바지를 입으셨으니 크게 불편하진 않으실 것 같습니다.”
“아니. 막내는 내가 데리고 가겠다.”
“지금 다들 나 놀리는 거지?! 어? 일부러 이래? 왜 이러는 거예요, 다들 진짜? 내가 거기 진짜 올라탈 것 같아서 그러는 거야?”
조쉬가 놀란 눈으로 솔레아를 올려다봤다.
키가 큰 티온이 팔로 받쳐 안고 있어서 솔레아와 눈을 마주하려면 머리를 한참 뒤로 꺾어야 했다.
“저는 공녀님이 발 아프실까 봐……, 아프시면 안 되잖아요. 공녀님은 소중하시니까.”
솔레아가 인상을 찌푸렸다.
“왜, 왜 이래요? 조쉬. 뭐 잘못 먹었어요?”
“저번에 공녀님이 저 구해 주셨잖아요.”
“하…….”
솔레아가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쓸어 넘기자 맬다가 흠칫 놀라 뒤로 물러섰다.
“불편하셨다면 물러가겠습니다. 조쉬, 뒤로 빠져.”
“야. 너 갑자기 왜 그래?”
“공녀님을 화나시게 해선 안 돼.”
“우리 공녀님 좋으신 분이야. 마음씨 따듯하셔. 우리 숙소에 통롤러도 가져다주셨잖아.”
예상치 못한 조쉬의 저항에 맬다가 당황하며 공녀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솔레아의 얼굴이 워낙 하늘 높이 있어 역광 때문에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맬다의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화가 나신 공녀님이…… 오늘 밤 몽둥이로 우리를 쳐 죽일지도 모른다고, 이 멍청한 자식아.
“이, 이 멍청한 것아! 공녀님을 방해하지 말란 말이야!!”
조쉬의 팔을 잡아끌고 옆으로 비켜선 맬다는 허리를 반으로 접듯이 인사하며 둘을 배웅했다.
“다녀오십시오, 공자님, 공녀님.”
티온은 비장하게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걸음을 옮겼다.
그의 뒤로 검은 망토가 펄럭이고, 망토에 넣은 마력 덕분에 붉은 자수가 잔상을 만들며 파도처럼 일렁였다.
그리고 솔레아는 티온의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내려 달라고!”
“막내 발 아프니까 들고 갈래.”
“안 아파! 안 아파! 하나도 안 아프다고! 야! 티온! 안 들리냐고! 이 곰탱아! 야아아아악!”
* * *
우란이 베르고의 염색 양모를 팔기 시작했다는 소문이 돌자마자 황족들, 고위 귀족들이 구름떼처럼 몰려들었다.
수도 상점에도 염색 양모가 걸려 있는 곳이 있긴 했으나 수량이 많지 않았다.
“아저씨. 염색 양모 여기선 안 팔아요? 나 구경이라도 좀 하고 싶은데.”
“아유, 제일 싼 게 200만 제르래요. 그런 걸 어떻게 우리 가게에 들여요. 조각으로 나눠 팔아도 다 못 팔아.”
“세상에나.”
“저어기, 우란에서 직접 운영하는 곳 가면 볼 수는 있다는데 그것도 우수 고객만 들어갈 수 있는 층에 전시되어 있다네요.”
그때 다른 사람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거 팔렸대요.”
“어머, 벌써요?”
“네. 완전 목 빠지게 기다리고 있던 귀족이 있었다나 봐요.”
“나도 한번 보고 싶다.”
“양모 전체에 마력을 갖다 부어 놨대요. 그게 한 번 탁! 털면…….”
말을 하던 이가 갑자기 입을 벌린 채 말을 멈춰 버렸다.
“갑자기 왜…….”
그에게 이유를 물으며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돌린 여자까지 굳어 버렸다.
가게 안에서 창문을 사이에 두고 대화를 나누던 포목점 주인이 창밖으로 목을 쭉 빼 냈다.
“대체 뭘 봤길래 그…….”
티온 폰 베르고.
참전한 전투마다 승리를 이끌어 낸 참혹한 전장의 무법자.
고목 같은 갈색 피부에 새빨간 붉은 눈동자, 관자놀이에 크게 흉터가 난 얼굴을 마주한 이들은 하나같이 악몽을 꾼 어린아이처럼 떨어 댔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우란이 직접 운영하는 커다란 상점으로 가기 위해 시장을 가로지르는 티온의 걸음걸이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당당했으나 그 누구도 고개를 숙이거나 피하지 않았다.
모두들 티온이 걸을 때마다 붉게 타오르는 태양의 조각처럼 흔들리는 검은 양모 위의 붉은 자수를 바라봤다.
양모 자체도 엄청 고급인 듯 광이 났고, 붉은 자수는 살아 있는 그림처럼 반짝였다.
시끌벅적하던 거리가 순식간에 적막으로 가득 찼,
“엄마, 저 누나는 다 컸는데 왜 저 형아한테 안겨 있어?”
“쉿!”
젊은 여자에게 안겨 있는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적막을 깼다.
티온과 눈이 마주친 아이의 어머니는 화들짝 놀라 아들의 입을 틀어막았다.
“읍! 엄마, 왜 입 막아! 저 누나는 왜 안겨 있! 읍!”
티온은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아이 어머니에게 눈짓으로 인사했다.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티온에게 붙잡혀 또다시 강제로 들어 올려진 솔레아는 이번에도 쪽팔림을 참지 못하고 얼굴을 가렸다.
하지만 누가 봐도 공녀였다.
허리까지 흐르는 새빨간 붉은 머리카락.
거기다 티온이 안아 올리고,
“막내야, 왜 얼굴 가려? 아파?”
막내라고 부를 만한 사람은 공녀뿐이었다.
“티온, 나 죽을래.”
“막내 아파서 그래? 불편해? 업어 줄까?”
“너 때문에……. 아니다, 됐다. 업히면 양모 가리니까 그냥 이대로 가자. 대신 좀 빨리 가.”
“응.”
티온은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시장을 가로질렀다.
그는 기분이 좋았다.
모두가 막내와 막내가 만든 양모를 지켜보고 있었으니까.
우리 막내, 예뻐. 착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