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2화 (42/192)

42화

“악!”

따귀를 맞은 돈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주변을 환하게 밝히던 불빛은 천천히 어두워지다가 이내 사라졌다.

하지만 너무 찰나여서 그런지 돈은 제가 본 불빛이 착각이라 믿는 듯했다.

돈은 눈을 껌뻑거리다가 빠르게 주변을 둘러봤다.

“제가 왜 이러고 있는 거죠?”

“나야말로 묻고 싶다. 왜 그러고 있었어?”

“배가 고파서 왔는데 이상한 냄새가 나길래 혹시 주방장님이나 다른 하인분들이 상한 음식을 버리는 걸 깜빡하셨나 했거든요. 그래서 대신 버려 드리려고 했는데……. 어라, 왜 기절했지?”

“혹시 지금도 이상한 냄새 나?”

내 질문에 돈은 코를 킁킁거렸다.

그러다 고개를 갸웃거리곤 이내 도리도리 저었다.

“지금은 잘 모르겠습니다.”

귀엽네.

눈이 커서 그런가. 두 배로 귀엽네.

“그런데 배가 고프다니? 그레이가 밥 안 줘?”

“아, 밥은 알아서 챙겨 먹어야 하는데 다른 분들이랑 같이 먹는 건 불편해서…….”

“네가 불편하다고?”

“아……. 그게, 저는 아무래도, 노예고……. 다른 분들은 저랑 다르시니까.”

“그레이가 자유인으로 만들어 준 거 아니야?”

“그렇긴 해도 출신이 다르니까요.”

돈은 민망한 듯 살짝 웃었지만 나는 웃을 수가 없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이곳의 하인들까지 출신으로 사람을 차별하다니.

게다가 밥 먹는 걸로 눈치를 줘?

세상에서 제일 서러운 게 눈칫밥 먹는 건데.

나는 분을 삭이며 돈의 팔을 잡고 일으켰다.

“일어나. 주방 가서 뭐라도 먹게.”

“아뇨! 아가씨! 저 이제 괜찮아요! 배 안 고파요!”

손사래를 치며 금방이라도 도망갈 폼을 잡는 돈의 등짝을 내려쳤다.

“사람이 밥은 먹어야지! 일어나!”

다행히 커다란 솥에 담겨 있는 수프는 아직 따뜻했고 식탁 위엔 빵도 남아 있었다.

“나도 출출해서 온 거니까 앉아. 같이 먹자.”

“아닙니다, 아가씨……. 아가씨랑 같이 먹을 수는…….”

“앉아.”

“네.”

눈치를 보며 주방의 간이 식탁 구석에 앉은 돈에게 빵이며 수프를 있는 대로 갖다줬다.

“아가씨. 제가, 제가 먹을게요.”

“조용히 하고 입에 넣어.”

“네…….”

그 이후로 한마디 말도 없이 빵을 입에 넣고 꼭꼭 씹어 삼키던 돈은 식사가 끝날 즈음에야 내게 말을 걸었다.

“저녁에는 혼자 운동하시잖아요, 그, 그땐 괜찮으세요?”

“아니. 그레이가 너 데려가서 좀 불편해.”

사실이었다.

그레이가 도와주는 건 낮 운동뿐이었고, 걔도 나름대로 바쁜지 저녁 운동은 봐주지 못했다.

그러니 당연히 혼자 운동을 해야 했고, 옆에서 숫자를 세 주는 사람이 없어 불편했다.

하지만 돈은 내 대답이 마음에 들었는지 얼굴을 발갛게 붉혔다.

“그러시구나…….”

“내가 불편해하는 게 좋아?”

“제가 저녁 운동만 도와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레이 도련님께 여쭤보고 올게요.”

“그레이 지금 안 자?”

“아직 주무실 시간은 아니라서요. 이거 다 먹으면 여쭤보고 올게요.”

마음이 급한지 돈은 남은 빵을 입에 욱여넣고 수프를 마시다시피 해치웠다.

“기다려. 같이 가게.”

의자에서 일어나려던 돈은 다시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간단한 식사를 마친 뒤 그레이의 방으로 함께 올라갔다.

노크를 한 후, ‘그레이. 나야.’라고 말하자 그레이가 문을 벌컥 열었다.

“웬일이야, 이 시간에. ……돈? 돈은 왜 데리고 왔어?”

원래는 저녁 운동 때 돈을 데려가도 되냐고 묻는 게 목적이었지만, 그레이의 얼굴을 보니 다른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야, 너는 애를 데려갔으면 밥을 제때 먹는지 안 먹는지 챙겼어야지. 밤에 몰래 주방을 기웃거리게 만들어?”

“어? 밥?”

잠깐 당황하던 그레이가 돈을 보며 물었다.

“너 저녁 못 먹었어? 왜.”

그레이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돈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아, 도련님. 그런 게 아니라 제가 그냥 못 챙겨 먹은 거예요.”

돈은 차마 붙잡지도 못하고 손을 어정쩡하게 내민 채 우리를 말리려 했지만, 나는 이미 눈이 돌아간 상태였다.

하루에 한 번, 700원짜리 삼각김밥 두 개로 끼니를 때우고 일하다가 저녁때 식당에 아르바이트하러 가면 몰래 잔반을 싸 오곤 했다.

그러다 식당 사장에게 걸려 ‘음식 재사용으로 오해받을 수 있으니 버려라.’라는 얘기를 듣고 잔반을 모두 버려야만 했다.

그날은 음식물 쓰레기통 앞에 혼자 한참을 서 있었다.

배가 고파서.

서럽지도 않았다. 그땐 그저 배가 고프다는 생각뿐이었다. 며칠 뒤 잔반을 몰래 싸가다 걸렸을 땐 해고당했다.

그에겐 당연했고, 내겐 가혹했다.

자꾸 과거의 내가 생각나서인지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그레이! 밥은 먹여야지! 애 밥을 굶기면 어떡해!”

“내가 하인들 밥 먹었는지까지 하나하나 어떻게 챙겨! 알아서 먹을 줄 알았지!”

“그럴 거면 왜 데려갔어! 잘 챙긴다며!”

“그렇다고 갑자기 이 밤에 찾아와서 혼을 내냐, 너는!”

“아무리 바빠도 네가 책임지겠다고 데려갔으면 제대로 돌봐야 할 거 아냐!”

“네가 데리고 있을 땐 뭐, 살뜰하게 잘 챙겼어? 운동할 때만 잠깐 신경 썼잖아!”

“난 그래도 밥은 편히 먹을 수 있게 하고, 잠자리에서도 편하게 쉬라고 했어! 이럴 거면 내가 데리고 있는 게 낫지!”

“내가 데려온다고 했을 때 너도 동의했으면서 왜 갑자기 찾아와서 난리야!”

“애가 밥을 못 먹는다잖아!”

“나이가 몇인데 혼자 밥도 못 챙겨 먹겠어!”

“이 밤에 혼자 주방 가서 남은 음식 먹는 게 정상이야? 네가 더 신경 썼어야지!”

“얘가 눈치 보는 것까지 내가 어떻게 신경 써!”

“왜 못 챙겨! 이럴 거면 저녁때는 내가 데려갈게! 어차피 운동 봐줄 사람도 필요하고, 겸사겸사 밥도 먹이게.”

“그렇다고 또 네가 데려가면 어떻게 해! 얘 데려갈 거면 내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거 아냐?”

“그래서 지금 묻잖아! 뭐, 내가 하루 종일 데리고 있는다고 했어? 저녁이라도 맘 편히 먹게…….”

“저, 두 분…….”

점점 커지는 목소리를 듣고 찾아온 건지 한 손에 램프를 든 하녀장 마르실라가 당황한 눈으로 우리를 불렀다.

그러곤 돈과 나, 그레이를 번갈아 쳐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죄송한데…… 지금 대화만 들었을 땐 양육권 두고 싸우는 이혼 부부 같아서요. 제가 지금 뭘 들은 거죠?”

돈이 새빨개진 얼굴을 푹 숙였다.

내게 화를 내던 그레이가 방금 전 대화를 곰곰이 되새기다가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문고리를 잡은 채 큰 소리로 웃던 그레이는 이 상황극을 계속 이어 가고 싶은지 돈의 손목을 잡고 방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러곤 장난기 가득한 말투로 내게 말했다.

“당신이 애 보냈으면서 이제 와서 후회하지 마! 돈은 내가 남부럽지 않게 키울 거니까!”

문이 쾅 닫혔다.

마르실라의 당황한 눈이 더욱 요동쳤다.

“장난친 거예요.”

어색하게 웃으며 마르실라를 진정시켰지만 그녀는 나를 방에 데려다주는 순간까지 식은땀을 흘렸다.

“세상에, 무슨 연극이라도 보는 줄 알았어요.”

“하하하, 그러게요. 그레이는 저 정도로 잘생긴 김에 배우나 하지.”

그제야 마르실라는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며 나를 방 안으로 들여보냈다.

씻는 동안 그레이가 했던 상황극 때문에 실실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요 며칠 내내 말 안 듣는 일기장이랑 떠오르지 않는 기억 때문에 속이 답답했는데 잠깐 아무 생각 없이 그레이랑 떠들고 나니 속이 시원했다.

그날 밤 난 처음으로 일기장에 ‘오빠’라고 썼다.

밤에 쓴 글은 다음 날 아침에 채워졌다.

오빠랑 상황극을 하며 놀았다. 재밌었다. 다음에 또 놀고 싶다.

초등학교 수준의 작문이었지만 가장 간단하고, 명확한 진심이었다.

처음으로 일기장을 보며 편하게 미소 지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그레이는 정말로 돈에게 신경을 쓰기로 한 것 같았다.

그 예로 낮 운동 때 그레이가 데려온 돈의 복장이 어제와는 사뭇 달랐다.

좋은 걸 입혔는지 부드러워 보이는 질감의 옷은 도저히 바깥 운동을 할 때 입을 만한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운동할 건데 왜 저렇게 휘황찬란하게 입혀 놨어?”

그레이는 자신감 넘치게 웃으며 대답했다.

“당신, 이제 우리 돈한테 신경 꺼. 내가 더 잘 키울 수 있으니까.”

“하하하, 미쳤나. 언제까지 상황극 할 거야. 공, ……아버지가 들으시면 뒤로 넘어가셔.”

“넌 오빠한테 미쳤나가 뭐니. 그것도 공아버지가 들으시면 넘어가신다.”

언제나처럼 매끄럽게 나를 놀린 그레이가 우리에게 새로운 운동 동작을 가르쳤다.

굽은 어깨를 펴기 위해 돈에게도 다양한 운동을 가르쳤지만 그는 몸을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돈. 어디 아파?”

그레이가 운동을 따라오지 못하는 돈에게 물었다.

“그, 그게…… 어깨를 펴면 너무 아파서요.”

돈은 굽은 어깨를 억지로 잡아 내리며 펴려고 하니 쇄골 밑 부분의 가슴이 찢어지는 것처럼 아프다고 했다.

“마사지 볼이라도 있으면 좋을 텐데. 아니면 폼롤러.”

“뭐라고?”

내가 작게 중얼거리자 그레이가 되물었다.

나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작은 통나무를 끙끙거리며 들어 올렸다.

“돈! 이리 와서 여기 누워 봐!”

“넌 무겁게 이걸 왜 들고 와. 하여간 생각 없긴. 이리 줘.”

얼른 달려온 그레이가 나 대신 통나무를 들어 옮겼다.

분명히 우리 회사 경리가 자기 아빠 방이라고 폼롤러 가져다 놓고 틈만 나면 사장실로 들어가 폼롤러 위에서 여기저기 풀었는데.

나는 몇 달 전 기억을 떠올리며 돈에게 그대로 시켰다.

“허리보다 더 위, 양쪽 날개뼈 밑에 통나무가 가로로 가게 눕고, 무릎은 접어 세우고, 그렇지. 그리고 두 손 만세. 이제 통나무 굴려 봐.”

돈이 무거운 통나무 위에서 용을 쓰며 몸을 굴리자마자 어디선가 뼈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우드득.

그레이가 눈을 커다랗게 뜨고 재빠르게 돈을 일으켰다.

“괜찮아? 안 아파?”

그레이가 잡아당긴 탓에 얼떨결에 벌떡 일어난 돈은 허공을 보며 눈을 멀뚱멀뚱 감았다 뜨다 홀린 듯 말했다.

“너무 시원해요…….”

그는 하늘을 보며 중얼거렸다.

“너무, 너무 시원해요…….”

이 세상의 모든 속박과 굴레를 벗어던지고 행복을 찾아 떠난 미소를 머금은 돈의 표정에 나까지 저절로 뿌듯해졌다.

그레이가 일부러 장난스럽게 내 어깨를 붙잡았다.

“당신 애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러는 당신은 애 어깨가 굽을 때까지 뭐 했어!”

우리가 또 이혼 부부 상황극을 시작하자 돈은 고개를 숙이고 조용히 키득거리며 웃었다.

“당신, 애한테 이상한 거 시켰으면 우리도 끝장이야! 나도 못 참아!”

장난스럽게 호통을 친 그레이가 그 위에 똑같이 누웠다.

곧, 그도 깨달음을 얻은 생불의 미소를 지었다.

“와……. 솔레아. 이거 진짜 너무 좋다.”

“그치? 대박이지?”

“대박? 어, 어. 대박이라고 표현할 만하다.”

“도련님은 어깨가 곧잖아요. 저는 굽었으니까 제가 좀 더 누워 있을게요.”

“돈, 아빠 아직 안 잔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거예요! 도련님!”

그레이가 누운 상태로 킬킬거리며 웃었다.

근데 저거 좀 가볍게만 만들면 상품화할 수 있을 거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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