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1화 (41/192)

41화

라트엘의 눈동자가 약하게 흔들렸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는 듯 잠깐 말이 없다가 이내 천천히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운 좋으면 망하진 않겠네요.”

“장담하죠. 대박을 칠 거예요.”

내가 호언장담하자 여태 별 반응이 없었던 공작이 나를 불렀다.

“솔레아.”

“네.”

“왜 갑자기 사업을 하려는 거니.”

헤이먼이랑 그레이가 여기저기서 무시당하는 걸 보니 빡쳐서요.

그래도 면은 세워 주고 떠나야 할 것 같아서요.

내가 개같이 깽판을 쳐도 남들이 아무 말 못 했으면 좋겠어서요.

여러 문장들이 머릿속에 둥둥 떠다녔지만 그중에 공작에게 해도 되는 말은 없었다.

헤이먼과 그레이는 자신들이 무시당하는 걸 공작이 몰랐으면 좋겠다고 말했으니까.

나사니엘 백작가에서 있었던 일을 알게 된다고 해도 그곳의 분위기와 여태 들었던 말 하나하나까지 전부 알 리는 없으니까.

굳이 내가 말해서 상황을 안 좋게 만들 필요는 없다.

“돈 좀 벌어 보려고요.”

장난스레 대답하자 공작은 난처한 듯 어색하게 웃으며 넌지시 물었다.

“혹시 생활하는 데 불편한 게 있었니?”

“그런 건 아니고 돈 좀 두둑하게 벌어서 지갑 좀 채우고 싶어서요. 공작님, 아니, ……아빠 용돈도 드리고요.”

“……네가 나한테 용돈을 준다고?”

“딸이 돈 벌면 아빠한테 용돈 좀 드릴 수도 있죠.”

대수롭지 않게 덧붙이자 공작이 큰 소리를 내며 웃었다.

의외로 라트엘까지 웃음을 터뜨렸다.

“공작님께 용돈을 드리고 싶어서 사업을 하시겠단 겁니까?”

“잘되면 라트엘한테도 보너스 좀 줄게요.”

“그 전에 시계부터 하나 사 주세요.”

라트엘은 고갯짓으로 내가 박살 낸 시계를 가리켰다.

“음, 그래요. 다음 주쯤에 같이 사러 가죠.”

“좋습니다.”

그가 잠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공작이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시계 사는 거야 라트엘 혼자 보내도 되지 않니. 뭐 하러 둘이 같이 가.”

“들를 곳이 있어서요. 라트엘이 필요해요. 하루만 빌려주세요.”

공작이 입술이 삐죽거렸지만 마땅히 거절할 핑계가 없는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라트엘과 함께 방을 나갔다.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라트엘과 나는 한마디 말도 없이 나란히 복도를 걸었다.

계단을 내려가며 나는 그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정면을 응시한 채 단조롭게 말했다.

“상단이 필요합니다.”

라트엘은 마치 대화가 계속 이어져 왔던 것처럼 매끄럽게 받아쳤다.

“이유는요.”

“라트엘도 알다시피, 베르고는 과거엔 영광을 누렸지만 현재는 귀족들 사이에서 평판이 별로 안 좋잖아요. 교류하고 있는 가문도 별로 없고. 염색 양모를 전국으로 유통하려면 바지 사장이 필요해요.”

“……바지 사장?”

“얼굴마담으로 앉혀 놓을 말 잘 듣는 상단이요.”

라트엘과 함께 천천히 걸으며 정문으로 향했다. 그는 달빛 아래에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저택을 나와 정원을 한참 거닌 뒤에야 그는 입을 열었다.

“사람의 충성을 얻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걸음을 멈춘 그는 나를 향해 몸을 돌렸다.

라트엘의 연한 갈색 머리카락 위로 달빛이 내려와 부드럽게 부서지며 반짝거렸다.

나는 그의 다갈색 눈동자를 보며 솔직하게 말했다.

“라트엘 얘기인가요? 아니면 상단을 얻기 힘들 거란 얘기인가요?”

내 눈을 피하지 않은 채 그는 솔직하게 답했다.

“……둘 다일 수도 있죠.”

“그럼 둘 다 가져 보죠, 뭐.”

나 역시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어느새 공작저의 커다란 정문 바로 앞이었다. 나는 라트엘에게 생긋 웃으며 말했다.

“다음 주에 봐요.”

그대로 돌아서려던 나를 라트엘이 불러 세웠다.

“전엔 죽어도 공작령의 일에는 관여하지 않겠다고 하셨잖습니까. 무슨 심경의 변화를 겪으신 겁니까.”

“……말했잖아요, 돈 좀 벌고 싶다고. 그뿐이에요.”

라트엘의 눈빛이 그전과 달리 다소 날카롭게 바뀌었다.

늘 의연하고 시큰둥하던 눈이 아니었다. 내 속을 꿰뚫듯 지그시 바라보던 라트엘이 차가운 어조로 말했다.

“아가씨. 동정은 함부로 하는 게 아닙니다. 가진 게 많으시니 이것저것 손대도 잃을 게 없다 생각하시는 것 같은데, 여기엔 지금의 입지만이라도 지켜야 할 사람들이…….”

“그건 내가 결정해요.”

나는 라트엘의 허전한 손목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웃었다.

“값싼 동정으로 퉁치려고 했으면 전처럼 방에서 울고 말았겠죠. 아니면 당신처럼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든가. 난 절대 이대로 안 넘어가요. 그간 받았던 조롱을 훨씬 비싼 값으로 받아 낼 거예요.”

받아 낼 수 있다면 얼마든지 받아 낼 것이다.

다시는, 누구에게도 부모 없는 새끼라고 욕을 듣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라트엘을 바라보며 매끄럽게 웃었다.

“사업은 수지가 맞아야지. 당하고만 살 수 있나.”

어리벙벙한 눈길로 나를 바라보던 라트엘이 눈을 빠르게 깜빡이다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작게 한숨을 쉬었다.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내일 마리에 살롱에 가서, 새 드레스를 주문하되 한 벌은 가져오지 말고 사람들이 볼 수 있는 곳에 걸어 놓으라 해 줘요. 이왕이면 입구 바로 앞, 눈에 잘 띄는 곳에.”

“왜요?”

“그렇게 해 놓으면 곧 마리에한테서 연락이 올 거예요. 그거면 돼요. 마담은 장사를 잘하니까.”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긴 했지만 라트엘은 내게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방으로 올라와 널브러진 책들을 정리했지만 이대로 잠들 순 없었다.

종을 울리자 앤이 졸린 눈을 비비며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앤. 부탁할 일이 있어.”

“예, 아가씨.”

“학식이 높은 마법사를 알아봐 줘. 가능하면 활동 별로 안 하고 입이 무거운 자로.”

나는 손에 끼고 있던 작은 반지를 빼내 앤에게 내밀었다.

“부탁할게.”

앤의 커다란 눈동자가 좌우로 빠르게 흔들렸다.

사람에 대한 믿음은 때론 작은 일에도 흔들리기 마련이다.

하지만 돈은 아니야.

돈은 거짓말도 안 하고, 배신하지도 않으니까. 주머니가 비었을 땐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 지갑을 채워 주는 돈 한 푼이 더 생각나는 법이니까.

내가 내민 반지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던 앤이 갑자기 무릎을 꿇었다.

“제가 그동안 아가씨께 부족했다면 용서해 주세요.”

“응?”

앤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저를 믿지 못하셔서 이런 걸 주시는 건가요?”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조용히 물었다.

“앤. 저번엔 받고, 이번엔 안 받으려는 이유가 뭐야?”

무릎 꿇은 상태에서 치마를 걷어 올린 앤은 속치마 주머니 속에서 이전에 받은 반지를 꺼냈다.

“이건 아가씨가 제게 처음으로 주신 거잖아요. 돈으로 바꾸지도 않았고, 가족들한테 보여 준 적도 없어요. 소중하게 들고 다닌단 말이에요. 근데 지금은…….”

“지금은?”

“저를 못 믿어서 주시는 것 같아요. 그런 건 받고 싶지 않아요. 저 자체로 아가씨께 믿음을 보여 드리고 싶어요.”

순진한 충성이었다.

내가 원래의 솔레아인 줄 알고 있으니 저렇게 간절하게 믿어 달라 비는 거겠지.

어쨌든 앤을 울리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중요한 건 비밀을 지킬 수 있냐는 거였으니까.

나는 반지를 다시 손가락에 끼운 뒤 앤에게 손을 내밀어 그녀를 일으켰다.

방금 울먹거렸던 탓에 그렁그렁 눈물이 맺혀 있는 앤의 눈이 반짝 빛났다.

나는 조심스럽게 앤을 당겨 끌어안았다.

“저택 일도 바쁜데 날 위해 고생해 줘서 고마우니까. 그런 상황에서 내가 다른 일까지 시키는 게 미안해서 그래.”

“아니에요, 아가씨! 아가씨를 모시는 게 원래 제 일인걸요.”

“마법사를 알아 오는 게 부담스러우면 안 해도 돼. 무거운 비밀도 아니니까.”

안겨 있던 앤이 화들짝 놀라 내게서 떨어졌다.

“할 수 있어요! 해낼게요.”

“위험하니까 네가 직접 알아보지 말고, 다른 사람한테 시켜. 이건 그 사람한테 심부름값으로 주고. 그러면 됐지?”

“아! 알겠습니다.”

내가 다시 반지를 빼서 건네자 앤은 그제야 반지를 가져갔다.

곧장 방을 나설 준비를 하는 앤을 불렀다.

“아, 그리고 나사니엘 영애가 편지를 보내왔어. 함께 놀러 가자더라고.”

“어머! 정말요? 너무 잘되셨어요, 아가씨! 하녀들 사이에서도 좋은 분이라고 소문이 자자해요!”

“응. 그래서 다음에 만나러 갈까하는데 마땅히 착용할 만한 보석이 없더라고. 드레스는 저번에 주문한 게 있어서 괜찮은데. 너도 알다시피 내가 그간 밖에 나간 적이 없잖니.”

고개를 갸웃거리던 앤이 그제야 손뼉을 짝 치며 밝게 웃었다.

“아! 상인을 부를까요?”

“그래, ……음, 귀족들을 많이 상대한 노련한 사람들을 알아봐 줘. 유행이나 귀족들 취향을 잘 알고 있는 자로. 난 사교계를 잘 모르잖니.”

생글거리며 앤은 밝게 네! 하고 답한 후 힘차게 방을 나섰다.

두 사람에게 완전히 다른 목적으로 부탁을 해 두었으니 앤과 라트엘이 뽑아 온 상단 중 공통된 쪽을 골라야지.

아, 갑자기 머리를 팽팽 돌려 썼더니 당 떨어지네.

주방에 가서 간식 달라고 할까.

굳은 목을 움직이며 스트레칭을 한 후 주방으로 내려갔다.

하지만 꽤 늦은 저녁이라 그런지 아래층 복도는 조용했다.

불도 몇 개 켜 두지 않아서 제일 구석의 주방에 가까워질수록 주변이 어두워졌다.

“조용하네.”

그때, 귀에서 위잉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모기가 있나?

주변을 둘러봤지만 작은 모기를 발견하기엔 너무 어두웠다.

위잉 소리가 더 커졌다.

모기가 아니라 벌인가?

몸을 움츠린 채 가만히 서 있는데 복도 끝 어딘가에서 작은 신음 소리가 들려왔다.

“으으…….”

“거기 누구 있어요?”

램프를 가져왔으면 좋았을 텐데.

조금만 더 밝으면 보일 것 같은데.

앞에 뭐가 있는지 제대로 보이지도 않고, 귀에서는 계속 위잉 소리가 들려왔다.

손을 꾹 움켜쥐었다가 펼쳤다.

벽에 붙어 게걸음을 찔끔찔끔 걷다가 결국 짜증을 참지 못하고 입 밖으로 쌍욕이 흘러나왔다.

“아니, 시발, 뭐가 보여야…….”

유창하게 쌍욕을 뱉은 순간, 어딘가에서 빛이 날아와 시야를 밝혔다.

“악! 뭐야! 꺼져!”

불이 꺼졌다.

……뭐지, 이거?

“부, 불 켜 줘.”

놀란 마음에 옆으로 걸으며 작게 중얼거렸지만 불이 다시 켜지진 않았다.

“불……. 켜 달라니까?”

다시 어둠에 눈이 익숙해지기 시작하자 또 짜증이 올라왔다.

사람 가지고 장난치는 것도 아니고.

마법이라고 해 봐야 영화에 나오는 영국인들 마법 학교밖에 모르는 21세기에 살던 내가.

지금 이 백 리 타향 머나먼 이름 모를 제국까지 왔는데.

이젠 뭐가 뭔지도 모를 마법까지 나한테 장난을 쳐?

“불 켜 달라고. 이 새끼야.”

아까보다 더 다급하게 불빛이 날아와 시야를 환하게 밝혔다.

“헤이먼이야? 너 호적 오빠고 뭐고 잡히면 죽는다.”

이 저택에서 마법을 쓸 줄 아는 사람은 헤이먼밖에 없으니까.

복 끝에 쓰러져 있는 사람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왔다.

어깨까지 내려오는 기다란 남색 머리카락, 커다란 체구.

돈이었다.

“돈!”

그에게 달려가던 중 괴상한 악취가 코를 가득 메웠다.

“윽, 이게 무슨 냄새야!”

그레이 이놈은 돈을 데려갔으면 목욕을 재깍재깍 시켜야지.

쓰러진 돈의 위로 작은 벌레가 날아다니는 게 보여 나도 모르게 두 손을 휘둘러 짝, 소리와 함께 잡아 버렸다.

갑자기 무겁던 공기가 안개 걷히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입 밖으로 겨우 신음만 흘리던 돈이 몇 초 지나지 않아 눈을 떴다.

“……으, 아가씨…….”

“돈? 괜찮아?”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돈은 배시시 웃었다.

“빛이 나요……. 아가씨의 모습으로 데리러 오셨군요. 천사님…….”

얘 아직도 정신 못 차렸네.

나는 그대로 돈의 귀싸대기를 올려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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